햇살에 눈이 부신다. 미처 스며들지 못한 물방울이 다육이 맨살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한다. 베란다 창가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옷깃을 여미고 다육이 앞에 허리를 숙였다. 목욕을 마친 듯 다육이 때깔이 반지레하다. 입을 벌리고 있는 새순이 볼수록 정이 간다. 사람들이 이 맛에 화초를 키우는 가 싶다.
초록색 이파리를 보니 웃음이 난다.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화초를 사다가 키워보았는데 모두 단명 했다. 옆집 권유로 다육이를 키운지 꽤 되었지만 자주 물을 주지 않아도 죽지 않았다. 키가 큰 화초는 좋아하지 않는데 다육이는 아주 천천히 자라주어서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코로나 전, 취미샐활에 빠져 살다보니 베란다에 놓인 화분은 뒷전이었다. 물을 좋아하는 화초는 영양부족인지 누렇게 말라있었고 화분 받침대는 이끼가 끼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조리개를 사와서 물을 좋아하는 화초는 날마다 물을 듬뿍 듬뿍 주었고 화분 받침대는 깨끗이 씻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요즈음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화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화분 가까이 다가가 다육이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새순 올라오는 모습이 신기하여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뚱뚱하지도 날씬 하지도 않은 다육이를 보고 있으면 날서있던 마음 한쪽이 유연해지기도 했다. 베란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어깨동무를 하고 한참을 다육이 구경에 빠져있었다.
내 유년의 봄은 소꼽놀이로 시작되었다. 햇살이 꼼지락꼼지락 거릴 무렵, 이가 빠진 사발에 참꽃을 담고 황토 흙을 물에 섞어 고추장을 만들고 흙으로 밥을 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때 저 멀리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야 밥먹어라.”
밥먹어라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삽짝을 나서 집 앞 도랑에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덮여 알아듣지 못하면 엄마 잔소리가 이어졌다. 엄마 꾸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도랑물에 힘들게 차린 밥상을 던지고 나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반찬 이었던 참꽃이 유유히 떠내려간다. 황토흙고추장은 물에 섞여 붉은 빛을 보이더니 이내 옅어지고 만다.
나이 한 살 더 얹은 삶에 유년의 추억은 단단해지기보다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럼에도 애써 유년을 떠올려 보는 건 봄기운 탓일까? 코로나로 지루해진 일상 탓일까?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다육이가 왜이리 고마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