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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여성 설교자 중 한 사람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그녀의 책에서 "전적 태양 영성"(full sola spirituality)이라는 용어를 소개했다.
"전적 태양 영성"이란? 인생에 어두움이 찾아오면 그 인생을 실패자로 낙인찍는 영성을 말한다.
말 그대로, 전적으로 태양(밝은 날)만 쫓는 영성을 말한다.
믿음 생활의 밝은 면만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신앙을 꼬집는 용어라고 말할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리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떤가?
우리도 잘되는 사람, 출세한 사람,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한다.
반면에, 무얼 해도 안되는 사람이나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나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표현은 잘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들 모두는 열등한 사람들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는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판단하는 연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영성을 믿음의 영성으로 받아들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과연 성경은 어두움을 열등한 현상으로, 빛을 우월한 현상으로 해석할까요?
과연 우리 인생에 어두움의 시간이 찾아오면 그 인생은 낙오자의 인생이고, 이런 시간은 열등한 시간으로 간주해도 무방할까요?
오늘은 주신 본문을 통해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어두움의 시간이 과연 낙오자들의 시간인지를 묵상해 보겠다.
두 가지 질문으로 설교를 진행한다.
1. 어두움은 우리가 물리쳐야 하고 대면해서도 안되는 기피대상일까요?
본문 1,2절을 읽어보자.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우주의 모습을 소개한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다"(2절, 공동번역본)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전에 이미 "어둠"이 존재했었다.
어둠이 우주의 표면을 뒤 덮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영어성경)
지구가 흑암에 싸여 있었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어두움이 지구를 뒤 덮고 있었을 때, 빛을 창조하신다(1-4)
어두움이 빛보다 먼저 있었다.
어두움과 빛이 쌍둥이라면, "어두움"이 형님이고 "빛"이 동생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4) "나누사"
분리시켰다.
왜 분리시켰는가? 이름을 명명하시려고..
4-5절의 뉘앙스를 자세히 살펴보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일이다.
이름을 지어주시려고..
과거 초등학교 큰 행사중 하나가 가을운동회이다. 운동회를 앞두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다.
선생님이 전교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다시 정열 시킨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오른쪽에 있는 그룹을 "청군"이라고 불렀고, 왼쪽에 있는 그룹을 "백군"이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오른쪽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은 "청군"이된다.
왼쪽에 있는 학생들의 이름은 "백군"이 된다.
하나님께서도 빛을 낮이라고 명명하셨고, 어두움을 밤이라고 명명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어두움을 제거하지 않으셨다. 어두움을 그대로 두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백해무익한 요소로 판단하셨다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제거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두움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중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어두움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은 그렇치 않다.
지금 한국교회안에는 앞에서 언급한 전적 태양 영성을 가진 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어두움을 무시한다.
어두움은 악이며,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절대로 어두움이 우리 인생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나 신앙이 좋은 사람들의 인생에는 절대로 어두움이 들어올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는가?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런 주장에 속지 마라.
악한 영들이나 악한 마귀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일 뿐이다.
이단들이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어두움을 창조 질서중 일부분으로 인정하신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있다(5,8,13,19,23,31)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본문에 이 구절이 6번 소개됩니다.
이 말씀은 하루의 시간이 어두움에서 출발해서 빛으로 종결된다고 설명하는 구절이다.
하루의 일과는 어두움에서 시작해서 빛으로 마감된다.
이것은 일종의 루틴이고 법칙이다.
하루라는 시간은 빛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빛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그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빛과 어두움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두움과 빛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비로소 그 시간을 하루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우리 인생의 시간도 어두움과 빛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두움으로만 구성된 인생은 없다.
그리고 전적 태양 영성을 숭배하는 자들의 말처럼, 빛으로만 구성된 인생 역시 없다.
우리 인생은 빛과 어두움으로 구성된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제가 어릴 적에 과자 종합선물셋트가 있었다. 이 선물세트의 크기는 밀감 박스만 했다.
그 안에는 웨하스도, 쿠키도, 비스킷도, 크래커도 있었다.
그리고 뽕뽕카라멜이라는 장난감 과자가 들어 있었다.
보통의 사내아이들은 이 장남감을 매우 좋아했었다. 저도 마찬가지다.
우주선 모양의 장난감이었는데, 장난감 밑동을 손으로 누르면 뽕 소리가 나면서 캐러멜이 공중으로 발사가 되는 장난감이었다.
이 장난감을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저는 과자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직 뽕뽕카랴멜 장난감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종합선물세트 박스안에 과자류는 없애고, 뽕뽕 캐러멜 장난감으로만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 바램과는 달리, 그 선물박스 안에는 제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딱 하나밖에 없고,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과자류로 채워졌다.
종합선물세트는 제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그리고 제가 좋아하지 않는 과자류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게 된다. 상대를 만날때마다 두근거리고 행복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점도 있지만,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점보다 자신이 싫어하는 점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좋아하는 점만 가지고 있는 상대는 절대로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도 선물세트와 같다.
선물 상자를 볼 때마다 기쁘고 행복하지만, 그 선물상자 속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물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물건도 있다.
우리 인생은 종합선물세트와 같아서 어두움의 시간과 빛의 시간이 교차하도록 구정되어 있다.
사람에 따라 어두움의 시간이 좀 더 긴 인생이 있고 빛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긴 인생이 있을 수 있지만, 어두움으로만 반대로 빛으로만 구성된 인생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이다.
어두움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일부분이다.
2.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어둠의 시간을 주시는 것인가?
어두움은 반드시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두움은 과정이지 결과는 아니다.
어두움의 시간은 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영혼의 밤"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16세기에 활동했던 아탈이라 수도사 성 요한이 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수도사로 수도원을 개혁하고자 했다.
수도원을 개혁하는 과정중에 개혁을 반대하는 수도사들에게 붙잡혀 톨레도 수도원에 약 11개월간 감금 생활을 했다.
그는 독방에 갇혔는데, 그 방에는 벽 틈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제외하고는 온통 어두움으로 가득 찼다.
이때 그의 영적 체험을 글로 남겼는데, 그 글을 그의 제자들이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의 제목이 "영혼의 어두움 밤"이다.
그는 그 독방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어두운 시간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할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영혼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시간을 가질수 있는 비결이 어두움의 시간 속에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시간 중에 하나님과 가장 친밀했던 시간은 언제였을까요?
빛의 시간과 어두움의 시간으로 구분해서 살펴보자.
예수님의 시간중에 빛의 시간들을 살펴보자.
언제였겠는가? 즉 예수님의 인생 중에 태양 영성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언제인가?
세례의 시간, 오병이어의 시간, 변화산상의 시간, 죽은 지 4일 되는 나사로를 살린 시간..
어느 한 시간을 꼽을 수 없을 만큼 모든 시간이 귀한 시간이고 기적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생중 가장 태양이 밝았던 시간들이다.
하지만 이 시간들중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했던 시간은 언제였을까?라는 물음에 해답을 제시해 주는 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다음으로 예수님의 시간 중에 어두움의 시간을 한 번 살펴보자.
십자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인생을 사이클에 비유한다면, 인생이라는 그래프의 곡선이 밑바닥과 가장 가까울 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시간에 인생 최대의 고통과 고초를 겪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숨지셨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신의 영혼은 단 한 번도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지금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과 긴밀한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신 것이다.
어두움의 시간이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십자가의 시간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경험을 하고픈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자나 깨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유지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우리 인생에 어두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즉 밝은 빛의 시간속에서만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싶어 한다.
태양의 시간만 빛의 시간이요, 빛의 시간만이 성도들의 시간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라는 말씀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통 빛이 내리 쬐이는 날을 날씨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며 오늘 하루 날씨가 좋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좋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이 세상은 사막으로 변해가게 될 것이다.
사하라 사막이 타클라마칸 사막이 고비 사막이 무슨 연유로 사막지역 변했는가?
그곳에 빛의 시간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에 빛의 시간만 계속된다면 우리 인생은 사막처럼 변해 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인생에는 어두움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어두움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어두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캄캄한가? 앞이 보이지 않는가?
지금 이 어두움의 시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에 우리 인생을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어두움의 시간은 우리 인생을 절대로 무너뜨리지 못한다.
오히려 어두움의 시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어두움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빛의 시간만이 성공의 시간이라고 배웠고, 반면에 어두움의 시간은 실패의 시간이라고 배웠다.
어두움의 영역은 성도들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비행금지구역였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나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나 모여드는 열등한 장소라고 배워 왔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에 이제는 반기를 들어야 한다.
어두움의 시간은 열등한 시간이나 가치 없는 시간이 아니고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어두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 질서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어두움의 시간은 우리 인생의 시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역이다.
없어서는 안될 필수 아이템이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제일 먼저 그 어두움의 시간을 인정해야 한다.
피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시간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도 어쩔수 없이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는 범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이때 수용한다는 의미는?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이 있다.
결혼한 지 27개월 만에 남편 선교사를 에콰도르 선교지에서 잃은 부인 엘리자벳이 지은 책이다.
그녀의 책에서 그녀는 남편을 잃었을 때에도 자신은 번민하는 대신 남편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했다고 말한다.
이때 수용은 포기가 아니라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딸과 사역을 감당했다.
엘리자벳은 자신에게 찾아온 어두움의 시간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
어두움의 시간은 열등한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청산해야 할 제거 대상도 아니다.
어두움의 시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 질서의 일부분이다.
어두움의 시간은 과정이지 결론이 아니다.
그리고 어두움의 시간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멎을 수 있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두움의 시간이 찾아오면 성도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두움의 시간을 통해 창세기에 소개된 말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완성될 것이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오듯이
어두움의 시간을 믿음으로 잘 견디며, 여러분의 별에도 봄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