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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와 헤밍웨이
세계 공산주의 주종국가는 소련, 중국, 북한, 큐바 등이다. 큐바는 1959년1월1일 혁명을 일으켜 공산국가가 되었다. 큐바라고 하면 반미의 국가, 카스트로, 헤밍웨이가 생각난다. 지금부터 12년전 미국을 방문하여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에서 마이에미로 다시 42개의 다리가 있는 overseas highway 다리와 160km를 달려 미국의 최남단 Key wast 에 도착하여 이색적인 남국의 풍취와 헤밍웨이에 취해 온 적이 있다. 그 당시 안내원이 말씀하시길 여기서 큐바까지는 145km인데 어떤 이는 수영으로 건너기도 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헤밍웨이가 살던 집을 방문했는데 두가지가 놀라웠습니다. 하나는 생가 입구에 한글판 홍보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마이에미에서 8시간 차를 타고 왔는데 이런 곳에까지 한국 관광객이 온다는데 놀라웠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여 지금도 침실에 고양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인간은 파괴될 수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지.”
쿠바를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으뜸가는 명대사다. 이 대사는 헤밍웨이가 작가로써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추구한 정신을 압축했다고 볼 수 있다.
1959년 1월 1일, 미국의 코앞에서 벌어진 반미(反美) 쿠바혁명의 성공은 인류사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혁명의 결실로 쿠바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무상주택,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나는 2018년 7월 ‘무상의료’의 맛을 보기 위해 쿠바를 여행했다.
쿠바혁명의 영웅 중 외국인으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체 게바라가 있다는 것은 상식인데, 미국인 대문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가 체 게바라 다음으로 쿠바에서 존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반미의 나라’ 쿠바에서 말이다.
헤밍웨이는 1939년부터 1959년까지 20년 동안 아바나를 자주 찾았다. 미국 고향보다, 그리고 자신의 휴양지로 삼았던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산 12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헤밍웨이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있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같은 위대한 소설 몇 편을 썼다. 아바나는 헤밍웨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키운 셈이었다. 아바나에서 헤밍웨이의 문학은 영광을 누렸다.
헤밍웨이는 1928년 4월 쿠바에 처음 방문했다. 헤밍웨이는 그때부터 쿠바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투우 경기가 왕성한 스페인을 사랑했다. 투우 경기에서 죽음의 미학을 발견해 찬양했으며 투우를 신앙처럼 받들었기 때문이다. 1936년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헤밍웨이는 공화파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는데 파시스트인 프랑코반군이 승리하자 더 이상 스페인에 갈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이 고향처럼 머물던 키웨스트가 1936년부터 관광지 개발로 북적이자 그곳을 떠나는 대신 불과 150km 떨어진 스페인 풍의 도시 아바나에 눌러 앉다시피 했다.
쿠바 혁명의 주역 카스트로는 철저한 반미주의자였지만 헤밍웨이에게는 호감을 나타냈고, 헤밍웨이 또한 이 젊은 반항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의 부패에 반대하고 나선 카스트로를 헤밍웨이는 그런 파시스트 정치인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았다. 바티스타의 부패와 잔학상에 환멸을 느낀 헤밍웨이는 카스트로를 속으로 지지했다.
카스트로는 공식 자리에서 단 한 번 헤밍웨이를 언급했다.
“헤밍웨이가 한 많은 일에 대해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작가 헤밍웨이는 우리나라에 살면서 주요 작품을 써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내가 읽은 다른 작품과 달랐습니다. 그의 작품은 소설이나 픽션이라고만 부를 수 없습니다. 나는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역사를 배웠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를 배경으로 쓴 소설로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같은 중요한 작품을 써서 쿠바를 알린 것에 고마움을 나타내면서 헤밍웨이를 위대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카스트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며 게릴라전을 배웠다고 하며 헤밍웨이를 존경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어요. … 우리 역사 속에는 농부를 땅에서 쫓아낸 지주에 대한 복수의 이야기들이 있죠. 그런 때는 한 사람의 농부라도 제대로만 역할을 한다면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헤밍웨이는 설명했습니다. 나는 늘 적진 깊숙한 곳에서 헤밍웨이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나를 일깨워준 이 책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싫어합니다. 전쟁을 기어코 일으키는 정치가들의 나쁜 처신과 이기심과 야심을 혐오합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전쟁에서 지면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스페인내전이 터지자 나치 독일의 위협을 느낀 자유주의 여러 국가의 문인 혹은 신문기자가 의용군으로 스페인에 몰려왔다. 헤밍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도 참전했다. 스페인과 스페인의 투우를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공화 정부군을 열렬히 지지했다.
1937년 6월 스페인에서 귀국한 헤밍웨이는 카네기 홀에서 개최한 '제2회 전 미국 작가회의'에 참석, 파시즘의 폭력주의를 부정하고 전쟁에 대한 문인의 책임을 통렬하게 주장했다. 스페인내전에 반파시스트 공화파로 참전한 헤밍웨이를 그 점에서 ‘행동하는 인류’ 양심인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민중을 대변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민주선거를 통해서 우리 땅을 경작할 권리를 얻었다. 그런데 군벌들과 부재지주들이 우리 땅을 다시 빼앗으려고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는 귀족들이 자기들의 오락을 위해 방치한 스페인 대지에 물을 대고 경작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운다."
헤밍웨이는 파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가 뒤섞여 이념(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었던 스페인내전에서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참전은 이념보다는 양심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그 경험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물론 참전했고, 중일 전쟁에 기자 역할을 하며 참가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취재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1937년 카네기홀에서 열린 미국 작가회의 연설에서 파시즘의 폭력주의를 부정하고 전쟁에 대한 문인들의 책임을 주장했다.
“정말로 훌륭한 작가들은 그들이 참을 수 있는 정부라면 거의 모든 현존하는 정부 체제 아래서 항상 보상을 받습니다.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없는 정부 형태가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파시즘입니다. 파시즘은 골목대장들이 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작가는 파시즘 아래서 살거나 창작을 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지녀야 할 기본 자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작가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영재학교 졸업앨범이나 편집하는 게 나을 것이다. … 좋은 작가의 가장 핵심적 재능은 충격방지처리가 된 헛소리 감지기를 내장하는 것이다. 그게 작가의 레이더이며, 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걸 가지고 있었다.”
2018년 7월 6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 근교에 있는 ‘핀카 비히아(Finca Vigia 전망 좋은 집)’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은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살던 집의 모든 방과 마당에는 헤밍웨이의 삶을 농축해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마당에 전시한 『노인과 바다』에 영감을 준 낚시보트 ‘필라호’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문학의 깊이에 대해 잘 모른다. 헤밍웨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세대에서는 헤밍웨이 소설로 만든 영화가 제법 인기 있었다.
내가 본 영화는 게리 쿠퍼와 잉글리드 버그만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 작)와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나온 『무기여 잘 있거라』(1957년 작)다. 1960년대 중반 중학교 다닐 때 보았다.
두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세계영화사에서도 대표적인 미남‧미녀 배우들이었다.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로 사춘기 가슴에 깊이 새겨진 영화의 원작 소설가 정도로만 느꼈지 헤밍웨이가 실천 문학으로 깊은 발자국을 남긴 것은 몰랐다.
그리고 70년대 초 고등학교 때 성격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의 『노인과 바다』(1958년 작)를 보았다. 이 세 영화는 명절 때 TV에서 아주 단골로 방영이 돼 그 뒤 각각 영화를 명절 때 심심풀이로 몇 차례 더 본 적이 있다.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헤밍웨이의 불필요한 수식어가 없는 ‘하드 보일드(hard-boiled)’란 메마른 문체에 대해 관심을 조금 가졌을 뿐이다.
2018년 쿠바여행을 통해 헤밍웨이가 쿠바에 남긴 여러 흔적을 보았고, 괴팍했지만 현실 참여에 열정이 남달랐던 헤밍웨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 나는 헤밍웨이의 이런 낙관을 좋아하게 되었다.
카스트로의 집무실 벽에는 액자 세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헤밍웨이가 헌정한 사진인데 그 액자 사진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 박사에게, 코히마르의 바다에서 이것과 같은 놈을 하나 찍기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랑으로.”
1959년 혁명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헤밍웨이는 쿠바에 있지 않았지만 뉴욕 타임스 기자 매튜스(Herbert Matthews)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카스트로가 타협하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없을 것이네.”
헤밍웨이는 오랜 친구인 매튜스 기자와 함께 쿠바혁명에는 무언가 소중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정세 격변이 있는 곳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을 누빈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과도한 소요는 점차 가라앉을 것이고, 쿠바의 새로운 혁명 체제가 지배계급에게 수세기 동안 무시당한 일반 노동자를 보살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반미주의자인 카스트로는 이런 헤밍웨이를 예외적인 미국인으로 보았다. 카스트로는 이 유명한 작가야말로 비록 양키(Yankee 미국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지만 이 섬(쿠바)에서 언제나 환영받을 거라고 옹호했다.
아바나에는 1950년 5월부터 현재까지 '헤밍웨이 낚시대회'가 열린다. 해마다 5~6월이면 아바나 주변 해안에 전 세계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20㎏ 가량 되는 낚시대로 청새치, 황새치, 참치 같은 몸집이 큰 심해어를 잡아야 한다. 잡은 물고기는 증거만 남기고 다시 놓아준다.
1960년 제10회 대회 때 헤밍웨이는 혁명군 지도자 카스트로를 초청했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그의 부인과 함께 갔다.
카스트로는 낚시 경험이 없었지만 우승을 했다. 카스트로 역시 헤밍웨이처럼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카스트로의 머리에 혁명 정신이 없었다면 당시 미국 프로야구 투수로 뽑혀 갔을 정도로 야구를 잘했다고 한다.
주최자 헤밍웨이가 우승자 카스트로에게 트로피를 전달할 때 두 사람이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얼굴을 마주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노벨상 수상 작가와 반미 쿠바혁명군 사령관의 기묘한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친구에게 카스트로가 자신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세력이 미국을 비방하고 다른 미국인을 추방하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고 말했다. 헤밍웨이는 어쩔 수 없이 1960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제공= 송필경)
핀카 비히아를 방문하고 오후에는 작은 해변으로 갔다.
이 해변의 어촌마을 이름이 ‘코히마르Cojimar’다. 헤밍웨이의 낚시 배 ‘필라’호를 정박했던 곳이며, 바로 소설 『노인과 바다』의 소설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의 터전이었다. 이 마을에서 아바나 시내 중심부까지 거리는 약 10km 정도라 한다. 또한 헤밍웨이의 저택인 핀카 비히아도 금방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헤밍웨이는 이 작은 항구에서 필라호를 타고 청새치를 비롯한 대형 물고기 낚시를 했다. 이 마을은 오메가(Ω)형의 조그만 만 주위에 자리잡았다. 만 입구에는 작은 성이 보였다. 성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푸른 색 원형 콘크리트 기반 중앙에 대리석 기단이 있고 그 위에 은은한 비취색의 흉상이 있다.
가까이서 보니 헤밍웨이의 모습이다. 원형기반 가장자리에 그리스 신전 기둥같은 것이 6개 서 있고 기둥 위에 둥근 천장이 얹혔는데 천장은 둥근 테두리만 있고 지붕은 없었다. 이 흉상과 조형물은 1962년 코히마르 마을 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4대륙 20여 나라에 흔적을 남기며 초인적이라 할 정도로 아주 분주하게 살았다. 가는 곳마다 그 곳을 소재로 걸작을 남겼다. 그 중 쿠바 아바나는 헤밍웨이가 가장 오래 산 곳이고 노벨상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라서 헤밍웨이가 다닌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흔적을 많이 남겼으며 잘 보존돼 있다.
헤밍웨이는 투우의 나라 스페인 대신 카리브 해의 쿠바를 찾아 낚시를 즐겼던 1936년부터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1952년 『라이프』지에 『노인과 바다』를 선보였다. 출간 이틀 만에 500만 부가 팔렸다. 다음해인 1953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당시 쿠바인들은 문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쿠바를 진정 사랑한 헤밍웨이를 쿠바인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고 기렸다. 그런 헤밍웨이는 미국인이 아닌 명예 쿠바인의 신분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수상 소감을 말했다.
“우선 저는 매우 기쁩니다. 전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라서 더 행복합니다.”
헤밍웨이는 스스로를 입양 쿠바인으로 불렀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노벨상 메달을 쿠바 동쪽 끝자락에 있는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의 코브레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l cobre)에 기증했다.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코브레 성당을 두 번 언급한다. 소설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가 사는 판자집을 묘사할 때 나온다. “섬유질이 억센 구아노 잎을 여러 겹 반반하게 붙인 갈색 벽에는 예수 성심 채색화와 코브레 성당의 성모 마리아 채색화가 걸려 있다. 죽은 아내의 유품이다.”
또 한 번은,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면서 노인은 혼자 중얼거린다. “지금부터 이 물고기를 잡게 해 달라고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열 번씩이라도 외우겠어. 그리고 만약 물고기를 잡기만 한다면 ‘코브레’로 순례를 가겠다. 꼭!”
소설 속 노인이 독백하면서 바랐던 바를 작가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메달을 코브레 성당에 기증함으로써 실현했다. 작가로서 최대 영예물을 쿠바에 바쳤다는 것은 그만큼 쿠바를 사랑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헤밍웨이는 그 당시 건강 악화로 노벨상 수상식에 불참했고 수상 기념 인터뷰와 행사는 핀카 비히아에서 했다.
헤밍웨이는 쿠바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세력을 지지하면서 자신을 명예 쿠바인으로 불렀다. 그런 헤밍웨이마저 쿠바에서 미국인이 겪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인 재산몰수 원칙에 따라 핀카 비히아 저택은 몰수당했다. 혁명 후 미국인에 대한 쿠바인의 눈총도 대단했다. 헤밍웨이는 미국과 쿠바의 관계 악화에 큰 상심을 하고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추방은 아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헤밍웨이는 이듬해 1961년 엽총 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자살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헤밍웨이의 평소 말이다. “내 육체가 나를 배반한다. 그래서 내 육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쿠바에 있을 때부터 우울증, 당뇨병, 알코올중독 같은 정신질환과 전신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는 죽음이라는 운명에게 당하는 패배보다는 스스로 파괴하는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까?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가혹한 현실에 결연히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힘차게 묘사했다. 잔인한 현실을 성숙하고 균형 잡힌 통찰력으로 불굴의 인간성을 조명했으며, 또한 인생 동전의 다른 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고독을 실존주의 기법으로 날카롭게 묘사했다.
간결한 서술은 헤밍웨이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복잡한 이야기가 늘 그렇듯 요지는 간단했다. 헤밍웨이는 문학적 수사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장황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짧고도 강렬한 문체를 빙산에 비유했는데 이를 빙산이론(Iceburg Theory)이라고 한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소설 『오후의 죽음』에서 이렇게 썼다.
“산문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실히 글을 쓴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이동하는 빙산의 위엄은 오직 팔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
헤밍웨이는 이야기의 깊은 의미가 표면에 나타나서는 안 되며 암묵적으로 빛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빙산처럼 대부분의 이야기와 특별한 감성은 드러난 빙산이 아니라 물속에 잠긴 빙산에 있다는 것이다.
이 빙산이론에 따르면 말하듯 글 쓰는 것(=구어체)이다. 젊을 때 기자생활을 한 헤밍웨이는 신문기사를 쓰면서 상황이나 해석이 거의 없는 사건 자체에만 집중했다. 헤밍웨이의 소설가로서의 글쓰기 역시 장황하게 주제를 논하지 않고 서술을 최소한으로 했다.
이야기의 깊은 의미있는 사건의 진실은 빙산처럼 표면에 나타나서는 안 되며 암묵적으로 가라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략한 부분이 이야기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적은 묘사를 최대한 활용한다. 언어를 정리하고 쓸데없는 동작묘사를 피해서 문장 강도를 배가시키면서 진실만을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글을 쓰면 진실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사실로 밝힌 몇 가지 사실과 독자가 알고 있는 중요한 일이나 사건을 생략하면 그 이야기는 강렬하게 된다. 독자가 모르고 있는 것을 생략한다면, 그 이야기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의 평가는 편집자가 아닌 독자가 생략이 얼마나 좋은지를 아는 것이다."
20세기의 헤밍웨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개척했다. 19세기 작가들이 까다로운 산문체로 쓴 긴 서경문(敍景文 long descriptive passages 자연경치를 위주로 해 묘사한 글)과 달리 헤밍웨이는 주어, 동사, 그리고 최소한의 형용사만으로 분명하고도 쉬운 글을 썼다.
헤밍웨이는 소설의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독자에게 말하기보다 대화와 행동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헤밍웨이는 독자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독자들이 실제 삶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진실을 독자가 밝힐 수 있기를 바랐다.
빙산이론을 생략이론(theory of omission)이라고도 한다. 때때로 말하기보다는 말하지 않고 두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헤밍웨이의 특성인 침묵에서 오히려 내면의 모순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행동에 초점을 맞춘 묘사로 독자는 빠르고 생략한 경제적인 말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문학 이론을 모르지만, 다음은 경제적인 글쓰기의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우리 시대의 글쟁이 한양대 정민 교수가 스승 이종은 교수에게 혼난 이야기이다.
空山木落 雨繡繡(공산목락 우수수)”를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번역했다.
스승은 정 교수에게 대뜸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라고 핀잔을 했다. ‘空(빌 공)’자를 가리키며 “여기 ‘텅’이 어디 있어?” 그래서 ‘텅’을 지웠다. 다음 “잎이 나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나무’를 뺐다. ‘떨어지고’에서 ‘떨어’와 ‘부슬부슬 내리고’에서 ‘내리고’를 덜어냈다.
문장은 이렇게 남았다.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문장은 전달력이 중요한데, 문장 양을 줄이면 전달력은 더 늘어났다는 예이다.
헤밍웨이의 글쓰기를 보면서 18세기 조선에서 최고 문장가라 평가받는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글쓰기가 떠올랐다. 글쓰기를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마음을 고상하게 하거나 위로하는 도구가 아닌, 사회 비판을 위한 활동으로 생각한 연암의 글쓰기 말이다.
연암은 유교이념만을 강조하는 고상하고 엄숙한 틀에 박힌 글보다, 살아 있는 감정에 호소하는 짧은 산문으로 변화무쌍한 삶을 표현했다. 글의 유일한 생산자이면서 유일한 소비자였던 사대부의 고리타분한 글쓰기 틀을 연암은 자유분방한 글쓰기로 깨트렸다.
당시 임금이던 정조는 이런 연암의 신선한 글들을 허접한 잡문으로 봤다. 연암의 글들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규정하고 이런 글쓰기를 금지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셈이었다.
18세기 연암의 글쓰기를 나름 정리해 보면, 21세기 어떤 글쓰기 이론보다 진보적이고 웅혼하다고 감히 생각한다. 다음은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쓰는 이가 뜻을 읽는 이에게 정확히 전달하면 좋은 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밀한 글을 써야 한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제자리에서 역할을 할 때 그 글은 읽는이를 설득할 수 있다.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으면 되고,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험한 요새(城)라도 정복할 수 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이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잊지 않고 모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런 자세로 쓰지 않으면 글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헛것이 된다.
생략과 함축은 겉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읽은 이가 생략과 함축의 의미를 잘 살피면 그 실상이 떠올라 '바로 이것'하며 무릎을 친다. 속물적인 이익이나 명예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글을 쓴다면 세상의 어떤 힘보다 글의 힘이 강할 것이다.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을 싹 쓸어버릴 글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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