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란 접두어는 우리말로 하면 '상호(相互), 사이, 속' 정도의 뜻이 되는데 이 -inter-가 들어간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려면 여간 괴롭지 않다. 모든 -inter-가 '상호'로 옮겨지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처럼 깔끔하게 옮겨지지 않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intertextuality 도 그런 예의 하나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사이먼 디덜러스(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아버지)가 스티븐을 데리고 학교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시기는 스티븐의 소년기로(책 줄거리 진행상 그렇다는 뜻. 더 어린 시기는 스티븐이 학교에서 친구들의 부추김을 받고 교장에게 항의한 시기)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학교를 다니지 못한 시기다. 부친 사이먼의 사업 실패로 재산을 모두 잃고 이리저리 이사다니던 시기인데 그 초기다. 사이먼은 경매로 이런저런 물건을 판 다음 잔뜩 취해 모교를 찾아간다.
수위가 그들을 교실로 안내하고 사이먼은 자신이 책상에 새겨놓은 낙서를 찾고 있는데 여기서 스티븐은 foetus라는 단어가 새겨진 책상을 찾아내고 이 단어는 스티븐의 의식이 자라나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foetus라는 단어는 단어의 뜻만큼 중요하며 그만큼 이 장면은 성장의 의미에서 중요하므로 이 장면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좋아하는 이라면 아마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단어가 아니다.
학교라는 제도가 있고 아이들이 그 제도의 혜택을 받는 한 책상은 아이들이 매일 사용하는 중요한 물건이 된다(거의 모든 아이들이라고 쓰고 싶었지만 이는 현대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므로 거의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뺐다). 학교에서 어느 학생이 사용하는 책상이 없다면 그 아이는 갈 곳이 없다. 아이가 이 공간, 이 위치에 소속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그 아이에게 할당된 책상이요 의자다. 따라서 아이들은 비록 한시적이지만 너나할 것없이 책상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아끼거나 혹은 학대하거나 한다.
학대한다는 것은 함부로 사용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수거나 못쓰게 만들지는 않는다. 자기 것이라는 의식때문이다. 그러나 책상에 낙서를 하거나 칼로 무언가를 새기거나 하는 행위는 의외로 흔하다. 물론 그 행위의 이유야 여러가지다. 지루함을 못 이겨서일수도 있고 시험때 컨닝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일수도 있다. 책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고 해서 그 책상이 자기 물건이 되지는 않는다. 책상에 무언가 낙서한다고 해서 그 책상이 귀중한 물건으로 남지는 않는다. 모두 알지만 소년기의 행위란 그처럼 유치하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책상에 낙서를 남기는 행위를 하지만 장성한 다음에 그 낙서를 찾아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수십년전 졸업한 모교를 찾아가 내가 어느 교실에 있는 어느 책상에 낙서를 남겼는데 그 낙서를 보러왔노라고 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인가 말이다. 물론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사이먼이 다니던 학교는 유서깊은 (아마 클론고우즈였던가. 확실하지는 않다) 학교는 옛날 건물 그대로 옛날 책상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낙서를 찾아내는 일이 가능했다.
사이먼은 낙서를 찾아냈고 아들은 'foetus'를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스티브은 사이먼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로 인해 그의 정신적 독립이 점차 이루어진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이먼의 이 행위자체다.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이 행위가 시대와 공간을 건너뛴 또 다른 책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1951년, 미국에서 나온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다. 이 유명한 책 역시 젊은이의 성장을 다룬 성장 소설임에 틀림없다.
차이라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영재 젊은이를 다룬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은 낙제한 소년을 다룬다는 점이다. 물론 이 차이점은 가장 큰 차이점만 들었을 뿐으로 얼핏 보면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 그러나 시대와 공간을 고려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상당히 많아보인다. 물론 본격적인 비교로 들어가면 더 많이 찾아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책상에 낙서하는 저 행위, 아니 자신의 낙서를 장성한 뒤에 찾아가는 저 행위 하나만을 다룬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유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홀든의 학교 동문회에 참가했던 중년 남자가 홀든을 찾아온다(굳이 홀든을 찾은 것은 아니다. 자기가 썼던 방을 찾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학창 시절에 화장실 문에 손톱자국을 남겼노라며 그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를 안내해 원하는 곳에 데려간 다른 학생들과 홀든은 이 술꾼이 화장실에서 손톱자국을 찾는 동안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책상 혹은 학교 물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는 공통된 것이지만 그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히 그 흔적만을 찾아가는 행위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 드문 행위가 관건이 된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서 이 두 작가는 유사한 경험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후대에 나온 작가가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한 사건을 다른 형태로 나타냈던 것일까.
이러한 사건의 유사성 혹은 동일 행위의 반복은 책속에서 수없이 나타난다. 흔히 이러한 연관성을 가리켜 인터텍스추얼리티라고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톰 스토파드의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전혀 다른 장르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유사 행위가 나타남으로 인해 인터텍스추얼리티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의 행위만 가지고 인터텍스추얼리티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인 인상과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기타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서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다. 어디 그 뿐일까. 여기서는 두 소설 속에서 나타난 한 사건의 유사성을 가지고 인터텍스추얼리티를 논했지만, 텍스트간의 관련성, 혹은 텍스트의 상호 소통, 인터텍스추얼리티 이 어려운 말은 어느 한 장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text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텍스트의 범위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인터텍스추얼리티는 무한히 넓어진다. 하나의 텍스트성을 갖는다면 이미지 역시 텍스추얼리티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 쓰기를 무척 싫어하는 내가 영어 단어를 쓰고 있다. 이 사실은 나도 물들었음을 뜻하는 것일까). 이미지를 논하면 논리의 비약이라는 소리가 틀림없이 튀어나온다. 여기서 그치기로 하자. 두 소설간의 상호관련성에서 말이다.
이제 가장 먼저 언급한 -inter-를 말해보자. 이 두 소설의 인터텍스추얼리티, 상호 관련성은 가능한 것인가. 근본적으로 상호관련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시대적인 맥락에서 보아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샐린저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그 사건을 기억하거나 혹은 무의식적인 영향으로 써냈을 가능성은 있지만 조이스가 샐린저를 읽었을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조이스는 1914년에 저 책을 출판했고 샐린저는 1951년에 저 책을 출판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텍스트간의 관련성'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호라는 접두어를 쓴다. 책을 읽는 우리는 두 책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현대에 읽기 때문이다. 독자의 관점에서 보는 인터텍스추얼리티인 셈이다. 책상에 낙서를 하면 우리라면 어땠을까. 십대에 다니던 학교를 십대가 된 아들을 데리고 찾아간다면, 아니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동문회를 핑게삼아 혼자 찾아간다 해도 그 학교가 예전 모습 그대로 아니 예전에 사용하던 책상이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지 않을까. |
첫댓글 좀 거리가 먼 댓글이지만 우리에겐 그런 소재의 작가가 탄생할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학교 책상은 한 10년 정도면 모두 갈아치우니까요. 그런 걸 보면 우리나라는 정말 잘 사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멀쩡한 집기를 삭 갈아치울 때가 정말 많거든요. 하긴 학교도 20~ 30년이면 마구 없애니 뭐라 할말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한 게 바로 그거였답니다. ㅠ.ㅠ 학교나마 남아 있으면, 선생님이라도 계셨으면....
호~! 제 교양의 어머니, 희야님! 인터텍스추얼리티~!!! 저 내일 낭독할 주례사에 이게 많아욤.^^ 그래도 베낀 것이라곤 하기 싫습니다. 인용한 것이라고 말하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