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딧 (1)
유딧기가 비록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되지만, 사실 그 내용은 비역사적입니다. 예를 들면, 유딧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대성읍 니네베에서 아시리아인들을 다스리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제십이년의 일이다.(1,1)
그런데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시리아의 임금이 아니라 오히려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로니아의 임금이었죠. 그리고 니네베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왕위에 오르기 7년 전인 기원전 612년에 이미 멸망합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는 훨씬 후대인 페르시아 시대의 인물이며, 배툴리아라는 지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유딧기의 핵심적인 역사적 정보가 모두 틀리거나 확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역사성이 유딧기가 매우 늦은 시기에 그리스어로 쓰인 것으로 여겨진 점(사실 유딧기의 원문은 히브리어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과 함께 유다인들의 정경 타나카에서 빠지게 된 이유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유딧기는 처음부터 유딧을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상징적인 인물로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딧이라는 이름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유다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가상의 세상과 유딧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유딧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유딧 이야기는 아시리아와 메디아의 전쟁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아시리아를 정복하지만, 여기서는 메디아가 패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었기에 두 왕국의 국운이 걸려있어서 각자 동맹군을 총동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의 원군 요청에는 어떤 나라도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아시리아는 결국 메디아에 승리한 후 홀로페르네스 대장군에게 대군을 주어 배신자들을 응징하도록 합니다.
파죽지세로 정벌을 이어가던 아시리아의 군대의 말발굽이 어느덧 유다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풍전등화의 처지가 된 유다의 백성들은 하느님께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고행을 하며’(4,9) ‘힘을 다하여 주님께 부르짖습니다.’(4,15) 이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 군사적 요충지인 배툴리아에 내립니다. 배툴리아의 함락은 곧 유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2023년 7월 23일(가해) 연중 제16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