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3일 금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터키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또한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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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가 6,39-42)
“Can a blind person guide a blind person? Will not both fall into a pit?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들처럼 여기는 동료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난날 죄인이었던 자신을 부르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신 사실을 떠올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책망하며 그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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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도에서 전해진 교훈적인 내용 하나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를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한다.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친절하면 나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그렇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유쾌하고 좋은 내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한다.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다른 사람을 보는 눈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잘 드러내는 내용인 듯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다른 이에게는 엄격하려는 것이 인간 대부분의 심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이러한 모습을 호되게 지적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다른 이에게 충고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그보다 먼저 두세 차례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자기 성찰 없이는 참된 충고나 가르침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되풀이하는 “제 탓이오.”라는 고백이 일상생활에서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이창순-
저도 대들보에 눈이 가린 그런 사람입니다. 내 속은 지금 엉망진창으로 얽히고 상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문제를 풀어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서 충고도 해주고, 길을 인도해 준다고 나서기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 입을 뗄 형편도 아닌데 ‘충·판·해·탐忠·判·解·探’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충고忠告와 판단判斷 그리고 해석解析과 탐색探索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콩깍지가 끼어서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잘못하는 것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얼굴의 큰 흉터도 보조개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정상으로 돌아오면, ‘내가 미쳤지, 귀신이 씌었나, 눈을 감고 살았군, 살았어 !’ 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곤 합니다. 그런 때는 차라리 눈을 뜨지 않고 그냥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마음이 떠나면 어떤 아름다움이나 애교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음 안에 있으면 어떤 모습도 아름다워 보일 것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습니다. 자신을 살펴보는 거울을 깨끗이 닦고 비쳐봐야겠습니다. 아주 큰 아픔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안약으로 눈을 닦아내고 주님의 손끝으로 수술해 성령의 은총으로 크나큰 대들보를 걷어내야 하겠습니다.
네 눈의 티, 내 눈의 들보
- 김정미 수녀-
올해 어느 날, 검찰의 PD수첩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하여 청와대 대변인은 “게이트키핑 기능이 없고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 진실을 압도하는 것은 언론의 본령이 아니다.”라며 “이런 사건이 외국에서 일어났다면 경영진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총사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보도를 읽고 나는 얼핏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꼭 ‘경영진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총사퇴해야 하는 상황’이 맞는다면, 우리는 이 경우를 다른 경우에도 공정하게 적용해야 맞다. 같은 잣대로 앞뒤를 잘 재보고, 같은 생각을 일관되게 밝혀야 하며, 또 자신이 말 한 그대로 자신이 먼저 실행에 옮겨야 옳다.
대부분의 국민이 원하지 않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4대강 살리기사업을 구태여 힘으로 밀어붙여, 예산배정과 착공을 강행한 우두머리한테도, 없는 이의 삶의 터전을 밀어내는 뉴타운 개발사업과 용산 참사의 왜곡과 진실은폐의 권력자들한테도, 없는 이들을 등쳐서 가진 자들을 부양하는 부도덕하고 불의한 정책 추진자들에게도 외치고 적용해야 한다.
영화 <블랙>에서 주인공은 신체장애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절대적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주인공과 선생님의 처절한 삶은 겉이 멀쩡한 비장애인인 우리의 어둠을 더욱더 또렷이 비춰준다. “하느님 앞에선 우리 모두 장님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장님에 귀머거리입니다. 누구도 하느님을 보거나 듣지 못하니까요.”(영화 <블랙>의 주인공, 미셸의 졸업연설 중) 네 눈의 티, 내 눈의 들보란 무엇인가? 들보로 가려진 내 눈으로 어찌 맑고 투명하게 다른 이의 티를 볼 수 있겠는가? 무겁게 내 안에 갇힌 마음으로 어찌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런 세상 한가운데서 오늘은 내 눈의 들보를 의식하고 만지고 느껴보자. 할 수 있다면 그 들보를 걷어내 가볍고 환한 눈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자. 눈이 열리면 귀도 같이 밝아짐을 느낀다. 하느님 앞에선 우리 모두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하는 맹인이지만 새로운 눈과 귀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웃과 세상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새로운 눈은 예수님의 눈이 되고, 우리의 새로운 귀는 예수님의 귀가 된다. 우리의 새로운 마음은 예수님 마음이 되고, 그 마음으로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된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전삼용신부-
저의 첫 번째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입니다. 그 분들 곁에서 기어 다니기도 하고 재롱도 떨곤 했는데 삼 개월 새에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죽음을 많이 두려워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어차피 죽는다면 행복하게 살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무엇이 되어야하는가를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선생님들이 이승복 열사나 안중근 의사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저는 처음엔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죽은 다음의 생명까지 책임져주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크니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행복하다고 배웠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혹은 빌게이츠처럼 큰일을 이뤄내야 행복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또 그 말이 옳은 줄 알고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일을 이뤄내야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부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이루어내기까지는 그 맛을 알 수 없으니 마치 쇼윈도에 서서 갖지도 못하는 물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해버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많은 대통령이 손가락질을 당하고 부자들도 결국 감옥신세를 지는 것을 보고는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무엇을 달성해도 그것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빈 라덴도 그의 나라 백성들에게는 자신의 민족과 종교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애국자이자 종교지도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사람이 위대한 스승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찾은 가장 완전한 스승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분만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 없는 영원한 행복을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순간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옷도 못 입으신 가난한 예수님이 달려 계셨지만 그분만큼 부자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것들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실 만큼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힘없이 못 박히셨지만 그분만큼 강하신 분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로부터는 미움과 배반을 당하셨지만 그분만큼 사랑받는 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만이 저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스승임을 깨닫고 다니던 대학도 포기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라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불렀듯이 우리의 유일한 스승은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다운 스승을 갖고 그분처럼 되기 위해 꾸준히 배워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스승이라고 불렸던 분들은 어쩌면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는 했지만 참다운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고, 스승도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고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기에 스승처럼 되기 위해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는 살아오면서 가장 감사한 것은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합한 스승을 만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선생님은 너무 엄해서 첼로를 배우는 것이 재미없었지만 그 다음 선생님은 먹을 것을 함께 먹어가면서 첼로를 즐겁게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 때부터 천재로 불렸고 또 더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지휘를 배우고 있는데 그녀는 휴가를 대신해 위대한 지휘 선생님께 지휘를 배우고 돌아온 것이 휴가를 즐긴 것보다 훨씬 즐겁고 가치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천재는 자신이 천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 배우고 또 배우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은 이제 배울 만큼 배웠다는 교만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유학 와서 만났던 저의 스승은 학문적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나라 나이로는 회갑이 지나셨지만 너무 겸손하여 제자와 무릎을 꿇고 이야기 하시는 분이시고 가난하지만 자신이 받는 대부분의 돈을 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시고 남이 버린 옷을 주워 입으시며,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과 사제관을 함께 쓰며 사랑을 실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며 잠시나마 가졌던 교만한 생각을 접고,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고 끊임없이 배워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는 스승만큼만 되면 되는데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만큼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기까지 배워야합니다.
이렇게 따질 때 사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우리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닮아나갈 스승이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스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또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당에 다니시는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사제로부터 배우는 제자들일 수 있지만 집에서는 아이들의 스승이고 또 직업적으로도 가르치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좋건 싫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고 닮아가야 하고 또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야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참 스승인 그리스도를 멈추지 않고 배워나가는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스승과 같아질 때까지 배워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거울을 보라!
-김찬선신부-
눈 먼 이가 눈 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시는데, 어찌 보면 인도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영적 동반을 받으러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저와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흐뭇했던 적이 많습니다. 눈 먼 제가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저야말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는 보는 바로 그것 때문에 눈이 먼 저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인도하기도 하는가봅니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해결책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멱을 감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헤엄을 조금 치고 그 친구는 헤엄을 전혀 치지 못하기에 그냥 물놀이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흐려 쑥 꺼진 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m만 나와도 얕은 곳인데 당황을 하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등을 조금 떼밀어주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릇 모든 봄은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눈이 얼굴에 있고 얼굴이 눈에서 제일 가깝지만 얼굴에 붙은 밥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자의 바라봄-객관이 필요하고 거울이라는 객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음-거리가 객관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거리와 객관을 확보하지 못할 때 자기를 보지 못함, 특히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 그러니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명합니다.
자기를 잘 보기 위해서는, 1) 자기의 눈만으로는 자기를 보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자기의 모습을 일러주는 다른 이의 눈이 필요합니다. 3) 다른 이의 눈이 없으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 거울입니까? 모든 이의 덕행과 악행이 모두 거울입니다. 상대의 얼굴에 숯검댕이가 묻었으면 나도 묻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웃의 덕행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글라라 성녀는 우리 서로 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시니,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그대 안팎으로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그 거울에 자주 비춰 보십시오.”
같이 사는 형제, 자매가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하느님 아버지를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도 비추시는 가장 티 없는 우리의 거울이십니다.
어떤 부부가 대판 싸움을 하고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남편도 또 아내도 절대로 먼저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요. 그런데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음 날 출장을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야 했거든요. 하지만 새벽잠이 많은 남편으로써는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먼저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깨워달라는 부탁을 안 할 수도 없어서 테이블 위에 이러한 메모를 남겼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깨워 줘.’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시계 바늘이 7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깨워주지 않은 아내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는데, 거실의 테이블 위에 다음과 같은 메모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4시 30분이에요. 빨리 일어나세요.'
괜히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서 말로 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부탁을 이야기했던 남편이었지요. 이에 아내 역시 글로써 남편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글만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굽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원하는 시각에 일어날 수가 있을 테고, 제 시간에 출장을 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손해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을 가지고는 화합하며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는 마음,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이 모든 이를 받아들이며 행복한 주님의 나를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이, 또한 눈 속에 티가 들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든 티를 빼주겠다고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을 놓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께서도 제1독서를 통해서 이러한 겸손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겸손의 삶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주님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주님으로부터 썩지 않는 화관을 얻는 삶입니다.
겸손합시다.
사제, 그 위험과 은총 -김귀웅 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하신 이 말씀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많은 말을 하여야 하는 사제들에게는 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경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섞여 나올 수밖에 없고(코헬 5,2), 말이 많으면 실수가 따르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상처받는 사람 또한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모인 데서 살아야 하는 사제에게 늘 주어지는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을 외면하고 살 수도 없고…. 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강론은 짧은 강론, 그 다음이 신부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신부 본인의 실수나 옛날이야기에는 누구나 귀를 쫑긋 세우고 듣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신부 자신의 복음을 실천하려는 노력은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고, 실패의 이야기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지만 스스로는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많은 이를 하느님에게로 더 가까이 이끈다면 그 삶은 이미 은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보게 하는 거울 -방순자 수녀-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 못났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지만,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본성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어느새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낸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본성 안에 가장 깊고 질긴 뿌리가 자만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는 큰 허물을 지닌 주제에 늘 남의 허물을 고치겠다고 하는 우리네 짓거리를 탓하신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다. 날 때부터 교만이라는 안경을 쓰고 있는 인간이기에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거울을 주신다. 하나는 내가 본받고 싶은 삶을 사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거울이야말로 하느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다시없는 ‘환상의 커플’인 것이다. 유난히 고통스럽게 생각되는 거울이 있다면 분명 그의 흠결을 통해 내가 직면해야 할 나의 들보가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살면서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서로 부딪치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죽는 날까지 업그레이드하며 풀어 나가야 할 과제다. 누구도 같은 이가 없는 이 사람들이 바로 나를 사람 만들어 주는 ‘살아 있는 교재’다. 만일 어떤 문제가 풀리지 않고 오래 걸린다면 그것은 아직도 나의 들보는 못보고 상대방의 티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하느님이 아무리 꼭 맞는 거울을 내게 보내주셔도 이것 역시 내 노력, 내 힘만으로는 내 안의 들보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성령을 보내주셨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내 안의 들보를 보게 해주시고 빼내주실 수 있는 분, 나를 인도해 주실 참 인도자는 오직 성령이시다. 내 안의 질기고도 질긴 이기심과 자만심은 나를 눈멀게 한다. 내가 밝게 볼 수 있고 내가 변해야 상대방이 변하게 되어 있다. 먼 눈을 가지고 여전히 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헛손질을 하고 있는 이 눈뜬 장님을 위해 하느님은 대신 탄식하며 기도해 주신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참조) 주님, 성령 안에서 저를 보게 해주소서!
인생 단상 -김찬선신부-
<인생 단상 I>
저는 10대와 20대를 아주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아니 우울하기보다는 고민하며 보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고통스런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부조리한 세상의 그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이런 고민을 하느라 저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떠난다는 것이 방황이고 목적지가 없으니 부지런히 달려간들 의미 없었던 것입니다. 공부도 의미가 없었고 신앙도 의미가 없었고 연애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인생이 의미 있고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열심히 삽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인생 단상 II>
이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그래서 공부도 안 하고 있을 때 형이 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셨기에 아버지 같은 형이었습니다. 처음 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第一)”을 나타내는 손 모양을 보여주며 엄지손이 제일이 되기 위해서는 중지, 검지, 약지, 소지를 접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은 접을 줄 알아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말이 멋있어서 그 말에 속아서 한 달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간신히 대학은 갔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 단상 III>
이렇게 속아서 대학은 들어갔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황은 끝나지 않았고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고민을 너무 진지하게 하다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10여년을 거친 이 길고도 힘든 고민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목표는너무도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목표, 그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산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학문을 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무엇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으로 행복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시키지 않아도 한다면 그것으로 행복하기 때문에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인생 단상 IV>
다시 나는 인생의 목표가 있나? 나는 그 목표로 행복하나? 나는 그 목표에 열심한가? 나는 그 목표를 위해 다른 것 포기하나? 그래서 나는 나의 이 인생을 사랑하나? 이 사랑으로 다른 인생도 사랑하나? 같은 목표의 인생 동반자로서 그 인생을 사랑하나? 이 사랑으로 자유롭고 기꺼운가?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밤에 운전하는 것을 상英?힘들어 합니다. 그 이유는 운전을 할 때 졸음이 많이 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밤에 운전을 하면 불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제가 운전을 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즉, 낮 시간에 운전하는 것과 밤 시간에 운전하는 것은 똑같은 거리를 운전한다고 할지라도 거리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인천에서 일을 하고서 밤늦게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가깝게 느껴지던 거리가 왜 그렇게도 멀게 느껴지던 지요. 바로 몸이 피곤하고 그래서 졸리기 때문에 그 거리도 멀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갖게 된 생각이 하나 있어요.
우리들의 신앙도 이렇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일상의 삶 안에서 죄를 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지 않을 때, 분명히 주님께 나아가는 그 길이 멀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짓는 것을 피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할수록, 주님께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점을 종종 잊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힘든 것은 주님께서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원망하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주님 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먼 곳에 계시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 그 방법은 바로 나의 역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때로는 주님의 곁으로 가까이 오기도, 반대로 멀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렇게 함께 연결의 고리를 지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 혼자 주님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대충 대충 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세상의 것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다른 이를 주님의 길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먼 길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게 됩니다.
과연 지금 나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나의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주님을 느낄 수가 있을까요? 혹시 세상의 사람보다도 더 형편없이 살아서, 주님과의 간격을 더욱 더 멀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되겠느냐?
-강영구신부-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그대에게
저는 자주 저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는 눈 뜬 사람인가? 네 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는가?” 솔직히 제 자신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수많은 교우들 앞에서 무엇인가 지껄여야 하고, 무엇인가 가르쳐야 하는 저의 처지가 한심하고 처량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경이 눈 밝은 사람들의 길잡이를 하겠다고 어설프게 설쳐대는 모습입니다. 세상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 도를 닦아온 교우들이 저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둥근 달은 말을 하지 않아도 어둠 밤을 비추어줍니다.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으로부터 충만한 빛을 받아서 어둠을 밝힙니다. 촛불도 소리치지 않지만 스스로를 태워서 주위의 어둠을 밝힙니다. 한 자루의 촛불만 있어도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달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스스로를 태워서 주위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내 탓이오!
-조성풍 신부 -
제가 어렸을 적에 비하면 지금은 안경을 쓰는 어린 친구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안경은 각자 다릅니다. 그 모양뿐만 아니라 각자의 시력에 따라, 그리고 눈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잘 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안경을 쓰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이나 사물을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면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잘 보기 위해 쓸 수 있는 그런 안경이 있었으면 합니다. 정말이지 자신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헛된 그림자들, 자기 부족, 자기 상처를 인식하고 보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은 엄하게 대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단순히 미사 중에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는 행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한 행위에 진정으로 마음이 함께해야 합니다.
제 눈속에 있는 들보
-서영남 -
◆저도 처음에는 노숙자들은 게을러서 비참하게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민들레 국숫집을 찾아오셔서 고래고래 소리지릅니다. 왜 게으른 사람들에게 밥을 줘서 동네를 지저분하게 만드느냐, 아무데서나 소변을 봐서 지저분해 죽겠다고 합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라고 합니다. 동네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쌍한 사람들 밥을 주는 것은 좋은데 왜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들에게 밥을 줘서 더 게으르게 만드느냐고. 그럴 돈이 있으면 노인들을 대접해 드리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고 합니다. 청송 감호소에서 오랫동안 징역을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까지도 민들레 국숫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을러서 노숙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3D 업종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쩔쩔맨다는데 일을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민들레 국숫집을 찾아와서 식사를 하는 분들 중에도 자신은 어쩔 수 없어서 밥을 먹으러 오지만 다른 사람은 게을러서 오니까 밥을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들을 보면서 그들이 부조리와 불의 앞에 희생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게을러서 노숙생활을 한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권을 빼앗기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납니다.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들은 왼뺨을 맞고 오른뺨을 댈 힘이 없습니다. 왼뺨 한 대에도 일어설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눈에 들보를 빼지 않고 이웃의 티를 봅니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을 이끄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복음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스스로를 인도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또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주려고 애쓰기 전에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자신부터 고치기 시작해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르게 보아주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섣불리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양승국신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말씀>
급히 ‘출동’할 일이 있어서 공동체 식당에 있는 자동차 열쇠함으로 달려갔습니다. 마당에 차가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올라갔기에 당연히 키가 있으려니 했었는데...없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혹시 자동차 키 못 봤냐?”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가고, 조급한 마음이 들면서 ‘그 누군가’를 향해 투덜거렸습니다.
“자동차를 썼으면, 키를 제 자리에 갖다 두어야지!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그러고 있는 제게 뭐든 꼼꼼히 챙기고 사려 깊은 한 형제가 그랬습니다.
“신부님, 어제 저녁에 신부님이 그 차를 쓰신 것 제가 봤는데, 혹시 모르니 호주머니 확인 한번 해보시죠.”
‘아차!’ 하면서 호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나가다 보니, 자동차 키는 제 호주머니 속에 얌전히 들어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도로로 나가서는 더 합니다. 형제들에게는 ‘제발 신호 좀 잘 지켜라’ ‘중앙선은 생명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선 침범하지 마라’ ‘그렇게 예의 없이 끼어들기 하지마라’ ‘왜 그렇게 브레이크를 팍팍 밟느냐?’ 지적하지만, 그러는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도로의 무법자’ 수준입니다.
‘수도자가 돈 버는 사람도 아닌데, 제발 딱지 좀 끊어오지 말고, 딱지 날아오지도 말게 하라’고 거품 물고 강조하지만, 정작 날아오는 딱지는 제 탓으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이런 제게 오늘 복음 말씀은 거의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말씀이군요.
“이 위선자야, 먼저 네 속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티’는 작은 결점이고 ‘들보’는 큰 결점을 지칭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결점에 대해서 먼저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 결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면,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 결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다가는 둘 다 큰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개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오직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도 바울로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바울로는 2차 전교여행 때 루스트라에서 유대인 모친과 그리스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테오를 만났다(사도 16,1-3). 바울로는 그를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성실한 아들”(1고린 4,17)이라 부를 정도로 사랑했고, 오랫동안 함께 전교여행을 하면서 그와 함께 사목했으며, 그에게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켰다. 바울로는 에페소에서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에페소 공동체를 지도하라고 디모테오를 그 곳에 남겨 두었는데(1디모 1,3), 이는 그 공동체에 스며든 여러 가지 그릇된 사상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교회를 잘 이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로는 자신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은 성령께서 주신 능력 때문이었음을 밝히며 디모테오를 격려한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사람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도록 해주셨음을 전하며, 디모테오를 격려한다.
바울로는 자신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의 은총에 언제나 감사드렸다.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주님께서 자신을 성실하고 의로운 사람임을 인정해주신 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이켜보면 주님을 모독하고 박해했던 부끄러운 사람이며, 무가치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신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어 사도로 택하셨으니, 이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의 은총임을 확신했다. 때문에 그는 어떠한 역경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복음만을 전하였다. 그는 결코 사람이 만든 여러 가지 교리나 이설에 혹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덧붙이지도 않았으며, 하느님께서 전해주신 구원의 복음만을 성실히 전하였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주님의 은총으로 자신 안에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사랑이 가득함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언제나 감사드렸다.
사도 바울로는 이처럼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에페소에서 그릇된 교리나 이설을 퍼뜨리는 자들과 싸우며 복음을 수호하고 있는 사랑하는 디모테오에게 용기와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바울로는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2-24)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며(필립 1,21), 목표이고(필립 3,14), 유일한 힘(1고린 1,18)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인 그 어떤 이론이나 사상, 지혜 또는 물질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의지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며(로마 1,15) 사명이었다(1고린 1,17). 그는 복음의 힘으로 복음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간다.”(1요한 2,17) 지나가버리는 그러한 것들에 얽매이고, 그러한 것들로부터 힘을 구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신앙인이 되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마음속에 사랑이 차고 넘치는 사도 바울로와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장훈철 신부-
지금 혹시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다른 사람 때문에 화가 나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가 내 의견대로 따라 주지 않아서 아니면 내 의견에 반대를 해서 더 많이 화가 나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너무나 난무하는 비방과 비판의 판단기준을 새롭게 제시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옛날에 한 과학자가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기술을 발견했는데, 복제품과 진짜를 구분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완벽했습니다. 하루는 하늘 나라로 데려갈 천사가 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는 자기 자신을 열둘이나 만들었습니다. 천사는 자기 앞에 있는 열 셋 중에 어떤 것이 그 과학자인지 알아 낼 수가 없어서 난처해 졌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문가인지라 영리한 꾀가 떠올랐습니다.
천사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으니 선생님은 천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선생 작품 중에서 흠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저 아주 작은 흠 하나를요 ...
그러자 과학자는 즉시 펄쩍 뛰며 외쳤습니다. “그럴 리가! 그 흠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때 천사는 “바로 여기” 하면서 그 과학자를 복제품 사이에서 집어 올려 데리고 갔습니다.
지상의 있는 모든 악에는 모두 똑같은 한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것이다”라는 마음이랍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만이 최고의 자리에 있다는 맘으로 상대방의 의견이나 마음과 생각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을 기준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분열이 일어나고 비판과 비방이 시작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욕심을 꼬집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복음의 앞부분에 ‘원수를 사랑하고, 판단하지 말라.’라고 하신 맥락에 이어서 오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앤소니 드멜로 신부님의 ‘개구리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물을 아는 것은 박식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지혜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자신을 아는 것은 깨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들도 오늘 말씀에 따라 내 눈의 들보를 빼내는 깨치움의 시간을 가져 보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 허인 신부-
사제들의 직무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복음 선폽니다. 복음 선포는 강론을 통해서, 예비신자 교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제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제들이 강론이라고 답합니다. 자기들의 직무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니, 참 딱한 일입니다. 자기들의 직무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야 행복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고 하니 딱할 수밖에요.
사제들이 강론을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오늘 복음에 다 나옵니다. 사제들이 강론을 하면서 매일 느끼게 되는 것이, 강론을 하는 자신이 위선적이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신앙의 길을 안내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그 길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렇지만 이 두려움이 바로 자신을 지켜주는 버팀목이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복팔단으로 잘 알려진, 참된 행복에 관한 말씀을 해주시고 난 후에 하신, 말씀의 일붑니다. 한마디로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쭐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겸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한경쟁시대에, 자기 PR시대에 겸손하라는 것은 경쟁에서 뒤처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겸손하라는 말은 과대포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볼 수 없는 소경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께서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심으로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치 자기들이 구원의 길을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자기들이 그 길을 개척한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실 사제들이 가장 쉽게 받는 유혹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은 비단 사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서공부에 관심을 갖고, 신학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열심한 사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배우고 나면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불운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얼마나 열심한 신자들이었는지!
겸손한 사람, 훌륭한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닮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접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남을 비판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이런 유혹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몇 가지 고사성어가 떠오릅니다. 복음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우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이지요. 비슷한 의미로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도 있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제 허물은 더 크면서 남의 작은 허물을 들어 시비한다는 말들로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들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루가6,41-42)
사람들과 접하다 보면 특히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부족한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참을성입니다. 툭하면 다투고 싸워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지요.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도 옛날 사람들과 달리 참을성이 없어서 갈등이 잦고 문제가 많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높은 이혼율이지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작은 어려움 하나도 참지 못하고 불편해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도 남의 탓만 하기가 일쑤이지요. 사고가 나면 어찌되었든 양쪽 모두에게 과실이 있게 마련인데 덮어놓고 상대방의 잘못만을 목청 높여 따지고 듭니다. 상대방이라고 가만 있나요?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을 탓하고 나섭니다. 당연히 싸움이 되고 길은 난장판이 되지요. 길이야 막히든 말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지 말든지 아랑곳 않고 흥분한 두 사람은 이제 사건의 처리보다는 감정 싸움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맙니다.
이렇게 남의 탓만 하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잘못만을 눈여겨보고 떠버리는 사람은 시기와 미움, 다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그런 사람은 무엇인가가 항상 불만스럽고 옆 사람이 늘 못마땅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해 줄 이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 외로울 밖에 없지요. 그래서 그는 점점 더 괴팍해져만 갑니다.
반대로 내 탓을 하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다툼을 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내 탓이라는 한 마디 말에 화해가 되는 것이지요. 화해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흥분으로 끓어올랐던 감정도 가라앉게 됩니다. 평화롭고 온화한 인간 관계가 만들어지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신식과 구식이 얽혀지던 우리나라 개화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신학문을 배운 어느 신식 부부가 있었습니다. 세련된 양장을 입고 집안의 가구도 모두 신식으로 갖춰놓고 사는 보기 드문 인텔리 부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집에는 몇 대의 가족이 함께 사는 아주 구식 그대로의 대가족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남부러울 것이 없던 이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큰 소리가 나고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는데 어쩌다 조용한 날이면 썰렁한 집안 분위기가 사람을 냉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집에서는 언제나 떠들썩하니 웃음꽃이 그치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식구도 많았지만 늘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는 그 동네에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루는 젊은 부부가 옆집의 나이든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어르신, 어떻게 하면 화목하게 살 수 있는지 비결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보다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훨씬 많으신 분들인데 저희가 가르쳐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찾아온 부부가 하도 간절히 요청을 하자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비법이란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우리 집에는 모두 자기 탓을 하는 바보들만 산다는 것이지요. 며칠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우리 집에는 어린 며늘아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침에 마누라가 솥에 쌀을 앉히고 그 며늘아이에게 불을 때라고 이르고는 잠시 텃밭에 볼일을 보러갔지요. 어린 며느리는 별 생각 없이 장난을 치며 불을 때다가 그만 밥 타는 냄새에 깜짝 놀라서 솥뚜껑을 열어보니 밥이 반이나 타 있었지 뭡니까?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밥을 태웠으니… 큰일을 낸 며느리는 주저앉아 울기만 했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돌아와서 울고 있는 며느리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지요.
<아가, 무슨 일이냐?>
시어머니께 차마 대답을 못하고 며느리는 솥을 가리키고 훌쩍거리기만 했습니다. 솥뚜껑을 열어보고 밥이 탄 것을 본 할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며느리를 다독거리며 말했지요.
<늙은 내가 눈이 어두워서 밥물을 잘못 부어 밥이 타고 말았구나.>
그런데 밖에서 들어오던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아침에 귀찮아서 물을 조금만 길어 놨더니 이런 일이 생겼네요. 제 잘못입니다.>
조금 후에 이 이야기를 다 전해듣고 제가 말했지요.
<내 잘못이 크다. 근력이 부족해서 장작을 너무 굵게 패 놨더니 불이 너무 과했구나.>
우리 집은 이렇게 늘 자기 탓만 하는 식구들이 있을 뿐 별 다른 비법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젊은 부부는 깨달은 바가 있어 조용히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자기를 살피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일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단죄하는 인간 관계 속에서 점점 메말라 갈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불행하고 여유 없이 혼란스러운 것은 똑똑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은 지나치지 못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힘들고 건조한 인간관계 속에서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미사가 시작되면 우리는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고백합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바로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루가6,42)
조금 손해보는 삶, 어리석어 보이는 삶이 결국 지혜로운 삶입니다. 삶 안에서 먼저 이웃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바로 우리 모두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현대인의 이기적 ‘10죄종’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형제에 대한 비판과 선입견을 금지하는 가르침으로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37-38절)과 연결된다. ‘남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31절)는 황금률의 범주 안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오늘 복음은 남을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3개의 아주 짧은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는 현세에서 행하는 만큼 내세에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를 들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종말론적 인과율을 지금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신다. 즉 현재의 시점에서 행하는 하나의 원인은 반드시 현세 안에서 원인에 따른 결과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소경이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39절) 마태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소경에 국한시켜 비유하였지만 루가는 이를 보편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둘째는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을 다 배웠다 하더라도 스승을 능가할 수 없고 스승만큼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40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 중 누구도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면 제자들도 그 만큼이면 된다. 그러나 분에 넘치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제자들도 그만큼까지 요구받는다. 그 이상은 아니다.
셋째는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와 자신의 눈 속에 들보의 비유이다.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주기는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42절) 자신이 허물을 지닌 채 타인의 허물을 논(論)한다면 위선자가 된다. 만약 어떠한 허물도 없는 자라면 그는 타인의 허물을 탓할 그런 소인배(小人輩)는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일상(日常)은 오늘 비유말씀과 크게 다르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무자비한 사람들이 우리가 아닌가? 자신이 소경이면서도 소경의 길잡이가 되려하고,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자신이 비록 허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우리들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가 용이하지 않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선의(善意)의 비판과 판단, 부단한 노력과 용기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불의(不義)에 대한 최종적인 응징(膺懲)은 하느님의 몫이다.
자기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꼼꼼하게 무자비한 현대인들의 ‘이기적 10 죄종’이란 글이 있어 소개하겠다.
1.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2. 내가 하면 창조적 권고이고, 남이 하면 거짓말이고, 3. 내가 침묵하면 그만큼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원래 생각이 없는 것이고, 4. 내가 화를 내면 그만큼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그릇이 작은 것이고, 5.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 만큼 유능한 것이고, 남이 자리를 비우면 또 어디서 노는 것이고, 6. 내가 통화중이면 업무상 긴급한 것이고, 남이 통화중이면 사적인 일이 너무 많은 것이고, 7. 내가 아프면 아픈 만큼 쉬어야 하고, 남이 아프면 기본적이 체력마저 의심스러운 것이고, 8. 내가 가족사진을 걸어 놓으면 가정의 화목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남이 가족사진을 걸어 놓으면 직장에서도 집 생각만 하는 것이고, 9. 내가 회의 중이면 남은 잠깐 기다려야 하고, 남이 회의 중이면 나는 잠깐 만나야 하고, 10. 내가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