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호킨스)의 어린 시절에서 불러낸 한 장면이 예증이 될 수도 있다.
열두 살 가량의 어느 안경 낀 외배엽형(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 소년이 열심히 플라톤을 읽는 동안
중배엽형(근육질에 건장한 체형) 또래들은 씨름, 축구, 다양한 스포츠와 남성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엄격한 기독교식 훈육에 따라 소년이 주입 받은 의무적 가치는,
싸우지 않는 것과 '다른쪽 뺨을 돌리대라'는 것이었다.
괴롭힘을 당하면 참았지만, 싸우지 않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예방책과 회피책이 되어 주길 바라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써 보았지만,
결과는 코피가 터지고 얻어맞고 하교길에 기습당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드디어 "그만하면 됐다"고 선언하고 손자를 어느 체육관의 권투 교실에 넣어 주었고,
그래서 아이는 '모기 체급반'에서 시작해야 했다.
남성적인 '자기 방어술'을 배우자, 같은 성가대 소년들의 '집적거림'은 줄었고
그것은 결국 커진 자신감과 안전한 느낌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친 동네에 혼자 갔다가 '시빗거리를 찾는' 험악한 태도의 불량배를 만났다.
그는 권투 교실 문하생이 아니라 '무조건 이기고 본다'는 전혀 다른 규칙을 갖고 노는 '더러운 거리의 싸움꾼'이었다.
그에게 '허리띠 아래'인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다음, 소년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거리의 닳아빠진 거친 싸움꾼에게 걸려들었을 때는 절대로 '퀸스베리' 규칙에 의존하지 마라,
만약에 그랬다가는 길바닥에 누운 채 영악한 군중에게 야유를 받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런 군중에게 점잖음은 약함의 표시이자, 나약하게 지각된 대상에 대한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만만한 표적이다.
거리 문화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위의 교훈에 대해 알고 있다.
'패거리' 안에서 '창피당하는' 걸 허용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치명적일 수 있고 그리고 흔히 치명적이다.
유화책은 겁먹은 것으로 보이고, 취약성은 초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200 이상의 측정치는 성실성, 온전함, 정직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주민 복지에 대한 관심의 출현을 가리킨다.
이들은 200 이하에 있는 이들에 비해 훨씬 더 온전하다.
300대로 측정되는 나라는 성공적 생존의 진짜 기초에 도달했고,
실행 기법을 통달했으며, 열정, 야심, 단결, 공평한 보상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래서 300대의 사회에는 합리성에 호소하며
그 사회의 교육, 상업, 과학 기술, 과학, 보건상의 필요에 대한 지원 같은 더 이상의 발달 기회를 제시하며 접근할 수 있다.
300대에는 지원 자체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
200 이하의 정부에서 참된 민주주의는 명백한 위협인데,
그런 정부는 정치권력의 이윤이나 이득과 같은 목표에 도움이 된다면
민주주의에 대해 듣기 좋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유사 민주주의가 나타날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실행은 말뿐이고,
그런 정부는 본질적으로 전과 동일한 온전치 못한 원리에 따라 계속 운영된다.
그러나 이제 온전치 못한 운영은 그러한 정치 구조 자체의 운영 안에서 은폐된다.
예를 들면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민주제이지만 운영상으로는 부패해 있다.
살펴보면, 나라들의 부실한 하부구조에 대한 소문난 '만능'의 마술적 해결책으로
미국이 민주주의의를 과도하게 이상화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공격적 전도는 흔히 감사보다는 분개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논평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은 자신 의 집단적 태도와 문화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일반적 무지가
다른 국가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기본개념이 결여된듯하다"
(《필라델피아 트럼펫》,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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