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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성결교회(원로목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제24대 CBS 재단이사장
<설교 8펀>
참 행복한 사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
좋은 이웃 좋은 관계
주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난 프로그램
(01)
참 행복한 사람
빌 4:2-7
성경에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참 큽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구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사울은 처음 야망이 있고 욕망이 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핍박도 그냥 핍박이 아니고 극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사도행전26장1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심히 격분하여”라고 표현하였고 사도행전9장2절을 보면 “외국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을 잡아 올 정도”로 포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3절을 보면 “교회를 잔멸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모두 바울이 유대교 사회에서 공적을 세워서 인정을 받아 성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바울이 어느 날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바울의 회심하게 되는데 회심도 그냥 회심이 아니고 180도 회심하여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이라고 바꿉니다. “작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인간적 욕망과 자아를 죽이고 절대 순종자가 되고 겸손 자가 되어 아주 작아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사도가 된 후 그렇게 감사했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 후 서간서를 쓸 때마다 첫머리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은...”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한때 예수를 핍박한 것을 회상하고 후회하면서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했고 “나는 모든 사도들 보다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적극적인 전도자로 변신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얻어 배신자로 미움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극렬하게 핍박하였듯이 이번에는 자신이 그렇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성격이 참 좋습니다. 시원하고 딱 부러지고 차든지 덥든지 분명해서 좋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분명한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흐리멍덩한 성격이 문제입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인 상태의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한때 경계인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세상에 경계인이 어디 있습니까.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점에서 아주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그를 불러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받자 바울은 또 열심을 다해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데 철저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도들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애정 어린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충고 속에 정이, 사랑이, 관심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인생을 돌아보면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간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돌봄의 행복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핍박과 고난과 어려움을 다 극복하였습니다. 어려움이 왔으나 하나도 탈락한 사람이 없이 잘 이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면서 옥중에서 이 글을 쓰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주안에서 굳게 서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돌봄의 삶, 가꾸는 삶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마음을 다 쏟아 가꾸고 돌보고 양육하는 마음이 행복한 마음입니다. 아이를 키우고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화초를 가꾸는 마음도 행복한 마음입니다. 애완동물을 가꾸는 마음도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웃을 영적으로 돌보고 가꾸는 마음도 더 없이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내 이웃이 나의 손을 통해서 반듯하게 세워져 갈 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정성을 다해 양육하고 돌봄의 삶을 통해 행복한 삶을 누린 사람입니다.
오직 한 마음
또 사도바울은 주님을 향한 오직 한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때 오직 한마음으로 핍박했듯이 회심한 후에는 또 예수를 위해서 오직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 했습니다. 고린도전서2장2절에서 “나는 이제부터 예수와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1장8절을 보면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사람은 마음이 오직 한마음일 때 행복한 법입니다. 두 주인 섬기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갈라지고 분열된 곳에도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하나 되라”고 하셨습니다(에베소서4장)
가정도 한마음을 이루어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마음이 하나 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도 한마음이 되어야 행복해집니다. 마음들이 갈라지면 불행해지고 갈등이 조성되고 불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내적으로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서로 열심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서로 경쟁하느라 자연스럽게 파가 형성되고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열심이 지나친 것이 좋지 않습니다. 열심히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두 기둥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양대 산맥처럼 강한 여성 지도자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 두 여인은 능력이나 실력이나 지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둥이 둘이니까 동시에 다툼과 분쟁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2)고 충고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에 분쟁이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분쟁은 대부분 너무 열심일 때 발생합니다. 조금 적게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교회마다 이 열심히 넘치는 분들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내적으로 열심자들 때문에 갈등이 있었고 외적으로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극성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단들이 정치에도 등장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훈련시킨 지도자 급 임무를 띤 사람들이 교회마다 침투시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교회도 왔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는 잘 훈련된 전도사급을 침투시켜 뿌리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염려하고 두마음으로 갈라진 것을 염두에 두고 “주안에 서라“(1)고 당부하고 “한마음이 되라”(2)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중심으로 오직 한마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몸을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와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노라.”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것이 행복의 방법입니다.
사랑 나눔
또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함께 사역한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 곁에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16장을 보면 그 동역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문안하고 기억하고 안부를 전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한다”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이 멘 사람은 여러 지도자들이거나 빌립보교회 감독 중 한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탁하기를 “저 여인들과 글레멘드와 그 외 여러 동역자들을 돌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 길에서 여러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함께 수난당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을 돌보라고 옥중에서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존대 받을 사람들이고 사랑받을 사람들이며 하나님도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마음은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그것이 가장 성숙한 정신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피를 흘린 사람은 국민들이 존대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전사한 사람, 국가 유공자, 피 흘린 사람, 그들은 마땅히 나라가 사랑하고 국민이 사랑하고 존대해야 합니다. 미국은 고기도 군인들에게 첫등급으로 먹이고 일반인은 2등급을 3등급은 수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를 보면 서양에서 귀족의 전통을 가진 집안들이 전쟁터에서 자식이 죽는 것을 명예로 알고 자랑거리로 알고 어디서든지 자랑하고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교계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부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공을 쌓았는가를 따지고 사회에 얼마나 기부했는가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현재 공화당의 메케인 대통령 후보자는 아들이 현재 이라크 전쟁터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점이 부족합니다. 우리와 사고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늦었지만 공로를 인정하고 국가가 추념해 주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런 죽음을 무시하면 누가 나라를 사랑하고 위해서 피를 흘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자는 마땅히 사랑해 주어야 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정신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고 너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고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일입니다. 에릭 프롬은 사랑은 미성숙한 사랑이 있고 성숙한 사랑이 있다고 했습니다. 미성숙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는 나에게 필요하니까” 이것이 미성숙한 사랑입니다. 내가 본위가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숙사랑은 “너는 내게 필요해,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정신을 주고 뜻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사랑은 주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주지 않고 받으면 진정한 감사를 모릅니다. 진정한 행복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마땅히 존대할 사람은 존대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랑받아야 할 사람은 마땅히 사랑받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하고 기쁘기 때문이고 사랑을 줄 때 더 감사하고 더 기쁘고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동역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참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확실한 신앙고백
신앙고백하면 또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이 아주 확실했습니다. 디모데전서1장15절을 보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10절을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옥중에 앉아서 밖에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기뻐하라”는 말은 현재 능동태 명령어법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 당시는 로마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바울은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1:14, 17, 20-23). 누구를 막론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은 기뻐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 스스로 기뻐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2장17절에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너희도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전제”라는 말은 “제사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제물이 되어 피를 붓는 심정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제물이 되어 피를 뿌릴 지라도 나는 기뻐하겠다” 는 말입니다. 상상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여기서 “기뻐하라”고 한 말은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을 때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그처럼 기뻐한 것(행 16:19-25)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이 옥중에 있는 바울을 상당히 격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보면 기쁨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라는 단언가 무려 14번이나 나옵니다.
신앙생활에는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반드시 좋은 것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주어져서 얻어서 횡재해서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것은 어쩌면 저급한 기쁨일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죽음이 다가올 때 기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역설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갈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 천사 같은 얼굴 모습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앙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십자가를 스스로 찾아서 질 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설의 기쁨인 것입니다.
긴장감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관용은 손해나 역경을 당했을 때 흔들림이 없음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핍박 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의연함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오실 주님이 상도 주시고 심판도 하실 것임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삶에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형편, 넉넉함과 평안함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열악함이나 빈곤함도 내일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학 강의실에서 열심히 강의를 듣는 사람은 청강생입니다. 그는 스스로 왔기 때문에 강의를 열심히 들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대 주는 학비로 어려움 없이 공부하는 학생은 그렇게 열심히 강의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일반 대학생보다 계절의 변화를 더 빨리 알게 되는 것은 재수생들입니다. 때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수생들은 남들이 잠잘 때 스스로 일어나 공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 양보하고 관용하고 사랑하고 고난 시에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확실한 신앙고백이었었고 그에게는 종말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빌립보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행복하게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누구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까. 이 요소들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사역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02)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골 3:1-4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저 위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위를 보고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목적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귀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오기 때문”
세상에서 귀한 것은 모두 저 위로부터 옵니다.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로부터 주어졌습니다. 헐몬산의 이슬이 위로부터 밤사이에 내립니다. 주님도 저 위로부터 오셨습니다. 주님의 재림도 저 위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존슨 오토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시 121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저 높은 곳, 인생의 모든 근본적인 도움은 저 높은 곳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은 저 위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저 위를 보고 살고 짐승은 아래를 보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사람은 두발로 걸어 다니게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짐승은 네 발로 기어 다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땅을 보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저 위를 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이고 삶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사람은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갈 때 인간의 값이 인정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 위를 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현실주의자 입니다. 이상주의자는 저 위를 중시합니다. 미래를 중시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 수고하고 고통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물질보다 정신에 더 비중을 두고 저 높은 곳에 뜻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내일 천국을 위해서 오늘의 즐김과 놀이와 환락과 재미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 수난도 수고도 희생도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인간이 값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저 천국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 위를 보고 생각하고 뜻을 두고 목적하고 흔들림 없이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주의자는 먼 장래보다 당장의 일에 열중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생일날 먹자고 오늘 굶지 않습니다. 정신적 기반 보다 물질적 기반을 중시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뜻도 생각도 관심도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속물이 될 수 있고 짐승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귀한 것은 한결같이 저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이 거기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길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길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땅히 저 위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위를 보려고 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 위를 보게 되느냐 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올려다봅니다. 앞이 콱 막혔을 때 위를 올려다봅니다. 미래가 막막할 때 위를 올려다봅니다. 장래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 위를 올려다봅니다. 무신론자도 그 상황에 빠지게 되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어머니의 고지식한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배우지 못하고 너무 무지해서 저렇게 고지식하게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주일마다 꼬박 교회에 나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어머니의 저속한 믿음생활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젊은이가 군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한마디를 했습니다. “전선에서 암담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거든 너는 위를 보라.”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고 전선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 잘난 아들이 전선에서 작전 중에 적진에서 퇴각하다가 홀로 낙오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별 수단이 없었습니다. 지금 자기가 위치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방향조차 모를 만큼 혼돈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 젊은이 마음속에 그 무지하고 고지식하기만 했던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탈 때 마지막으로 전해주시던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전선에서 암담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지거든 저 위를 보라.”
그때 이 젊은이는 일생 처음으로 가장 진솔하고 가장 솔직하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저 위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도 모르게 절박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나를 살려 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나를 기억해 주세요.” 이 젊은이는 일생 처음으로 그렇게 진실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동안 유치한 어머니 신앙을 비웃었는데 오늘 처해 보니 오직 길은 저 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이 젊은이는 비로소 뼈저리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위를 바라보고 기도한 후 극적으로 구조대에 의해서 구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이 정도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능력을 가지고 지금 그렇게 큰소리치고 폼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좀 여유 있다고, 건강하다고, 능력이 좀 있다고, 기술이 있다고 자만 떨고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 참 가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하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길은 저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인들의 영적상태를 조사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59%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믿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65%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공공건물 앞에 머릿돌처럼 십계명 현판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판을 그냥 놔두자는 응답이 79%였고 그것을 제거하자 하는 응답은 18%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동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 라는 문구를 그냥 두자는 응답은 84% 제거하자는 응답은 1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말은 미국의 국민 7~80%가 저 위를 보고 생각하고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국민은 국가에 재난이 오고 위기가 올 때는 백악관에서 국회의사당에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여 구국 기도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기 때 미국이 나아갈 길과 방법은 오직 저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강한 민족입니다. 위기 때 저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민족, 국가가 강한 나라이고 지혜 있는 민족이고 구심점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나라들은 위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기가 올수록 더 강해지고 뭉치고 단결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길이 저 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저 위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저속해지기 때문”
오늘 이 세상은 온통 오염되고 병들어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 하면 성한 곳이 한곳도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골 3:5-8을 보면 오늘 이 세상의 오염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이 저속해지고 천박해졌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한결같이 저속한 소리만 들려옵니다. 오늘 뉴스를 들어 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정하고 혼란스럽고 정신이 혼란스러워졌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소식, 딸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소식, 어린 아이를 유괴해서 죽여 산에 묻었다는 소식, 알고 보니 그 유괴범은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동업했던 사람이었다는 소식, 아파트 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 우리들이 매일같이 똑같이 일어나는 이런 소리들만 듣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날마다 이런 소리만 듣고 살아가게 되면 저속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이나 주위 여건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삶의 주변이, 환경이, 여건이 경건하고 엄숙하고 숙연하면 그 인생도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분위기가 고상한 분위기이고 경건한 친구들이 있는 환경에 살아가게 되면 내 인생도 나의 삶도 그렇게 경건하게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을 떠나 산에라도 가 보십시오. 우선 들려오는 소리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느낌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순간 마음이 맑아지고 조용해지고 침착해지고 잃어버렸던 생각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최소한 도심을 떠나 산에 가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저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저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과 생각은 물론이고 우리의 영까지도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소리가 거기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귀한 것은 거기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조건 - 수고”
그런데 그런 삶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그것은 수고입니다. 저 위를 올려다보는 생활에는 반드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 위에 있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 위를 보며 살아가려면 위를 올려다보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토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도중에 하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왜 도중에 하차하는가 하면 올라가는 수고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 수고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묵상생활도 하고 산에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매일 피곤한 육체를 끌고 저녁이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려면 때로 금식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식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금식하게 되면 사람이 처량해지고 비굴해집니다. 보험은 사고가 발생하고 난 후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가 발생할 것을 미리 대비해서 가입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식은 사고가 난후에 하는 것이 아니고 사전에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 금식하게 되면 그 금식이 더 힘들어집니다. 살을 빼기 위해서 금식해 보십시오. 더 먹고 싶고 더 힘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을 빼면 헛수고입니다. 금식 후 더 먹게 되어 살이 더 찝니다. 금식은 연단을 위해서,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평소에, 여유 있을 때, 기회 있을 때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 수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만들고 영적 깊이를 깊이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려가는 것은 모두가 쉽습니다. 산을 올라가기는 어려워도 내려갈 때는 쉽습니다.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습니다. 깨끗해지기는 어려워도 더럽혀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수양하기는 힘들어도 타락하고 방탕하고 추해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오토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옛날 중국의 산동성에 어느 신념이 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앞에 큰 산이 가려서 살아가기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노인이 어느 날 “이 산을 옮겨보자” 하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데리고 삽으로 산을 옮기기 위해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그 큰 산을 옮기겠느냐고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노인이 “내가 죽는 날까지 파 낼 것이고, 파다가 죽으면 내 아들들이 파낼 것이고, 손자들이 파내다 보면 언젠가 이 산은 옮겨질 걸세”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꾀도 있어야 하고 요령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 것은 믿음이고 행동입니다. 저 높은 곳을 동경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는 데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 안 되면 내일하고 내일도 안 되면 모레까지 한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그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은 너무 급한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서두는 것이 병입니다. 그러니까 포기도 빠르고 체념도 빠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 생명의 주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03)
하나님을 기쁘시게
창 6:5-8
자녀가 할 일은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자녀가 할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자녀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성경은 잘되고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속을 썩이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제자의 할 일은 스승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어느 스승은 졸업 후 출세한 학생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성공한 제자의 모습을 배후에서 보는 마음까지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다니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제자가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이 스승은 반색하며 맞아주었습니다. 돌아가는 그에게 스승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성공하는데 내가 성공요인을 조금이라도 제공했다고 생각하나” 스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 스승은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것이 스승의 보람이고 제자의 할 일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감성과 공동체의 삶을 알게 해 주고 스승은 사회인식을 키워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식물들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꽃을 피우는 일이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이 주어진 할 일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고 할일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입는 삶이고 복을 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엡 5:10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웃으시게 해야 합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노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노아가 살던 그 시대는 극도로 타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온 세상이 타락해서 파탄 중이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쾌락 충족을 위해서 살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셨습니다. 근심하셨습니다. 마치 자식을 낳고 그 자식 때문에 속을 썩는 부모처럼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부모를 근심하게 하고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자식이 복을 받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슬프게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당신이 스스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 단 한사람 있었습니다. 그것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기쁨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의 내용이 본문에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노아가 하나님을 사랑했던 마음은 아주 특출 났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창 6:9를 보면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갔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아가는데도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참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신이 지으신 이 세상을 당신 스스로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대에도 노아는 하나님 안에서 살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노아를 사랑하셨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함”
사람도 자기를 믿고 신뢰해 주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느 가게에 갔는데 마침 지갑에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다음에 주고 그냥 가져가라고 합니다. 미안해서 전화번호라도 적어 놓으라고 하는데도 알겠으니 그냥 가라고 합니다. 나를 믿어주는 그의 마음이 그렇게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 가게를 늘 이용합니다. 나를 믿어주고 신뢰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기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그것을 하나님이 또 기뻐하십니다. 노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때로 이해되지 않는 일에도 노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여 실행에 옮겼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배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배도 그냥 배가 아니고 길이가 137m, 무게가 2만 톤짜리 3층으로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것이 납득이 가는 일입니까. 그 명령을 받고 산위에서 노아가 배를 만듭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조소하고 비웃었겠습니까. 그것도 참을 수 있었는데 내면에서 올라오는 내적 회의감은 참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실행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노아는 묵묵히 그 일을 다 해냈습니다. 자그마치 노아는 120년에 걸쳐서 그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전적인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아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노아 혼자서 고고하게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계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젼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절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전적인 믿음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전적인 믿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이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와서 지금 하인이 죽을병에 걸렸으니 고쳐주십시오 하고 간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러면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수고는 안하셔도 됩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낫겠사옵니다.” 이것이 절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를 얼마나 칭찬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순종할 때”
창 6:22를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 지시하신 대로 그대로 다 행하는 자세입니다. 노아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그대로 다 실행합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대단한 순종의 사람입니다. 만일 오늘 그런 명령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랬다면 말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모두 기가 막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뜻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이런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이 요구될 때는 때로 모험도 인내도 수고도 필요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가 나올 때는 거기에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순종의 모습을 보면 무조건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어디로 얼마만큼 가면 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를 만나면 너를 인도할 것이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떠나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순종하라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시 100:2를 보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은 제물보다 순종을 좋아하신다(삼상15:22)”고 했습니다. 요 14:15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에게 한 가지 아주 훈련된 의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이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요소 중 또 하나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예배생활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노아는 언제나 예배생활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노아는 홍수 전에도 제단을 쌓았고 홍수 후에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 8:20을 보면 홍수 후에 노아가 가족과 함께 홀로 살아남습니다. 홍수가 그치자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였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감사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지만 반드시 찬양과 제물을 드리는 감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삶은 그냥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감사의 삶은 생각이나 발상이 전환되어야 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고정관념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 삶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생각도 발상도 의식도 전환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살” 이라는 문구를 보면 사람들은 우선 끔찍하다고 생각부터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의례히 모든 글을 읽을 때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읽습니다. 그것이 아주 고정된 관념입니다. 그러니까 “자살”입니다. 글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살자”입니다. 이 고정관념이 사람으로 하여금 틀을 벗지 못하게 하고 생각을 열지 못하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어느 처녀가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손가락의 반지까지 뺏겼습니다. 집에 돌아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재수 없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가 강도를 만났냐”하며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참 재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한 억울함이나 분노 그리고 불만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생각이 바로 고정관념입니다. 그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결코 그 일로 인해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딸의 원망과 불평하는 소리를 듣다못해 어머니가 한마디 했습니다. “손가락 안 다친 것을 감사해라, 네 손가락은 그냥 있지 않느냐, 반지야 또 사면되지만 손가락이 잘렸으면 어떻게 할 뻔 했냐“.
그것입니다. 그것이 생각의 전환입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이 잘렸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꿀 때 감사가 오고 찬양이 오고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선 내가 기쁘고 감사해 집니다. 내 마음에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은 전염됩니다. 너에게로, 세상으로 전염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건강한 세상으로 발전됩니다. 내 삶의 주변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감사하고 거기서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사와 찬양의 삶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살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때 바라보는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쁩니까. 그 자녀들이 커서 이 세상에서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이 또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그 부모의 마음이 꼭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건강한 마음과 건전한 정신과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때 그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모두 아들딸이 커서 장차 큰 사람이 되고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바람과 소망은 자식들이 평범하게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서 건전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건전하고 아름다운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감사하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고향을 떠나라, 아들을 바치라” 하시듯 그런 요구는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해서 순교하고 피를 흘리라는 그런 요구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로 그런 사명이 아주 소수에게 주어지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펄벅이 쓴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의 어머니는 22세 때 결혼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선교를 했다. 나의 어머니는 굶주림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일곱 자녀를 낳았다. 그중 네 명은 어머니 앞에서 죽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분은 우리를 기쁘게 해 주려고 자주 노래를 불렀고 낡은 옷에 무늬를 놓아 새 옷처럼 만들어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새 옷처럼 입고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얼마나 건강한 삶입니까. 이 삶이 건강한 삶의 모습입니다. 건강한 삶은 몸이 무쇠같이 감기도 안 걸리고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건강한 삶은 아닙니다. 건강한 삶은 정신과 영과 마음이 아주 건전하고 반듯하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며 매일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건강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고 표현되고 증명되는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지음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세 가지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내 삶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건강해집니다. 그 삶은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십니다.
(04)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
요 3:16
양주동 박사라는 분이 일본에서 유학시절 서울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워낙 문학솜씨가 있어 문학적으로 연애편지를 여러 통 써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여학생 기숙사 사감이 편지를 검열하고 연애편지니까 전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편지에 “요한 일서 4장7절” 만 간단하게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편지가 통과되어 본인에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그 성경구절 내용이 “우리 서로 사랑하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편지에는 “마가복음 10장 7-8절” 을 써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므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남한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사용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만났다 헤어질 때 “안녕, 잘자, 내 꿈꿔, 사랑해”라는 언어들입니다. 지금 북한에서도 한창 사랑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이 물결을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양의 김책 공과대학의 어느 여교수가 이런 한국에서 유행하는 언어를 사용했다가 당적과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5년 교화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북한은 참 살벌한 동네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언어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난 너를 좋아해, 우리 사랑하자, 사랑해” 얼마나 따뜻한 대화입니까. 동물들도 “사랑해”라는 말을 알아듣고 좋아하고 식물들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잎이 윤기가 난다고 합니다. 닭장에 있는 닭들에게 조용한 음악을 들려주면 알을 더 잘 낳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주면 더 알을 잘 낳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은 듣는 대로,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만들어지고 조성되는 존재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고 정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연애편지”라는 말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3장16절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농도는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깊고 넓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 중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을 영원한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는데 이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약 2천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연간 수백만부가 보급되고 있습니다. 2006년도 월 스트리트 저널이 소개한 자료에 의하면 2003년도에서 2005년도까지 3년간 보급된 성경은 25%가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낮추어도 미국서만 성경책이 2천 500만부가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이 해리포터 시리즈인데 그럼에도 성경은 그 책보다 두 배나 더 많게 배부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연애편지의 내용 중에서도 핵심 내용은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16절입니다.
이 땅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과히 맹목적입니다.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죽도록 벌어서 자식들의 과외비로 다 지출합니다. 엊그제 사고로 죽은 어느 기러기 아빠의 죽음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지상에서 최대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심으로 제물 삼아 인간을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야기가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몇 가지 읽는 법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선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읽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첫 번째 원칙입니다. 연애편지를 읽을 때는 글자와 문자 그대로를 읽어야 합니다. 속독이 아니고 정독으로 한자 한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그 글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연애 초기 같으면 속마음을 가능하면 감추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야 감추어진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대충 읽는 연애편지라면 그것은 별 볼일 없는 상대의 편지일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미국인과 만날 기회가 있어 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기에는 미국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만 빼고 오늘 오바마를 비롯해서 모두가 크리스천이 아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겉모습은 그럴지 몰라도 속은 크리스천이 아닌 대통령도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퍼슨 같은 대통령은 겉으로는 크리스천으로 비추어졌지만 성경에서 기적내용은 모두 가위로 도려내고 만든 성경책을 3천권이나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성경책이 지금도 보관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크리스천이냐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빼면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모두가 기적인데 그것을 빼내면 무슨 성경이겠습니까.
성경은 있는 그대로를 정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을 통해서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되고 말씀이 주는 감화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경을 너무 속독 시킵니다. 어떤 단체에서는 성경을 1주일에 한번 읽게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연애편지를 그렇게 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신비의 책이다. 속에 비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는 돈으로, 금덩이로, 달러로, 보석으로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진로를 안내하시고 운명을 개척하게 하는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길을 찾고, 천국을 보고, 미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다가 모세가 갈대상자에 버려졌는데 그 갈대상자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발랐다는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역청”이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합니다. “역청”(bitumen)은 우리말로 “원유”라는 뜻입니다. 이 분이 역청을 읽는 순간 “그럼 그 지역에 원유가 있다는 말 아니냐”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달려가 지질을 탐사한 결과 그곳에서 유전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음미하고 연애편지 읽듯이 정독한 사람에게 이런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연애편지를 읽듯이 정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 숨겨있는 보고를 발견하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되고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서 “무한한 보고”라고 부릅니다.
영적으로
성경은 영적 감화로 쓰인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영적 양식의 보고라고도 부릅니다. 육신은 육신의 음식을 필요로 하고 영은 영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책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 성경을 읽을 때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게 됩니다. 성경을 영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겸손하게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여졌다고 전제하고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이 말씀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영적인 뜻과 의미와 교훈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21절 이하를 보면 왕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1만 달란트면 오늘 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6조원의 돈입니다. 이 6조원의 빚을 진 사람이 왕으로부터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 나옵니다. 나오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100데나리온이면 오늘 돈으로 천만 원 정도입니다. 그때 6조원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천만 원 빚진 자에게 빚을 빨리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며칠만 연기해 달라는 빚쟁이에게 당장 갚으라고 처자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다시 불러 “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거늘 너는 백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하느냐, 너도 다시 갚으라”하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채는 죄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 값이 얼마냐 하면 자그마치 일만 달란트나 됩니다. 우리들이 그 빚을 갚기는 불가능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제물 삼으심으로 우리의 엄청난 죄를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가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이신 이유가 6조원이나 되는 우리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읽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을 영적으로 읽는 방법입니다.
생활로 읽음
성경은 한번 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내 생활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성경말씀이 내 생활에 적용되지 않으면 이 성경책은 소설책이나 역사책에 불과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소설책만도 못합니다. 소설책은 재미라도 있는데 성경책은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손에 들자마자 잠이 오지 않습니까. 이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말씀의 책입니다. 동시에 이 성경은 나 한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성경책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고 동시에 이 성경은 모든 개개의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고 변화시키고 소명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육자는 이 성경을 읽고 교육에 적용하고 법조인은 법에 적용하고 사업가는 사업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성경은 읽고 삶에 적용해야 하는 책입니다. 그 적용이 없으면 이 책은 무의미한 책이고 윤리나 도덕책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값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성경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재산을 맡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를, 또 한사람에게는 2달란트, 한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또 5달란트,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왔을 때 그대로 내놓았다가 큰 책망을 받고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왜 그렇게 혼이 났습니까. 여기 이 한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잘 모르면 이 종의 무책임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를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일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의 돈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1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오늘 날로 말하면 약 10만 원쯤 됩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면 6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는 한 데나리온의 6천배이고 당시 6천일 분의 품삯이니까 오늘 돈으로 환산하면 6억 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종이 6억 원이나 되는 돈을 땅에 그냥 묻어두었습니다. 그러면 이 종이 무사하겠습니까. 그런 정신, 자세, 생각가지고 남의 집에서 월급 받으며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종은 직무를 철저하게 유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생활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 달란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재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이런 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당장 내게 주어진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안하고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을 생활로 읽는 방법입니다.
본체를 발견하는 일
성경을 보면 많은 이야기와 비유와 역사와 사례들과 죄와 심판과 족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두께가 큽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그림자 속에 들어 있는 본체를 발견하고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이고 설교를 듣는 이유입니다. 그 본체가 바로 예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글들은 다 예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각종 비유나 역사나 족보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예수의 그림자들입니다. 그 그림자들 즉 비유, 역사, 족보,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를 말하기 위해서 써진 그림자들이고 나뭇가지들 입니다. 그래서 그 그림자들과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연구해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본체인 예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을 압축하면 한마디로 요약이 나오게 되는데 그 말씀이 본문 요한복음 3장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성경공부이고 그것을 발견한 것을 알리는 작업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본체가 자꾸만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성경에 나오는 그림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교사들이 자꾸만 가지를 가르치고 그림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이름이 뭐냐, 아버지 이름은 무엇이고 고향이 어디냐, 제자가 몇 명이고 아버지 직업은 뭐냐,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에 찔렸는데 그것이 죽은 후인가 죽기 전인가를 묻습니다. 모두 숲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림자이고 나뭇가지들입니다. 그것들은 몰라도 구원받는데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예수는 누구인가?, 왜 세상에 오셨는가?, 왜 죽으셨는가?, 그의 죽음과 오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숲과 가지와 나무들과 그림자들을 헤치고 나가서 본체 되시는 예수를 발견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변화하였고 사역자들이 되었고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마리아는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소서”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네 정혼자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오해를 풀고 순종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께 달려가 경배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오늘 이라크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수개월을 걸어서 찾아와 경배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진정 예수를 발견하고는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예수를 발견하고 나서 “나는 예수를 위하여 다 버리노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그림자만 보고, 이상한 기적 내용만 읽어 보고 무슨 성경이 이러냐고 하지 말고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진정 예수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말씀의 초점을 알고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 예수를 만나서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나도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많은 위인들은 그렇게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런 축복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05)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
창 24:12-16
저는 오늘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앙중심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려고 힘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종을 통해서 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장성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며느리를 구하는데 두 가지 전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이면 복잡해집니다. 이방인의 문화, 생각, 습관, 전통이 섞이면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선택하는데 순수혈통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앙의 순결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이방신앙을 가진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오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며느리를 꼭 동족에게서 얻으려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살면서 이 중심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풍습을 존중하는 것은 좋습니다. 질서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딸을 주고 며느리를 얻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삶에 누구는 안 되고 누구는 되고 하는 식의 삶의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는 일에 유념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문화와 사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고 발전해 가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동족이 살고 있는 하란 땅으로 종을 보내서 며느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며느리 간택권을 종에게 전적으로 위임해서 고향 땅으로 보냈습니다. 이 종이 주인으로부터 중책을 위임받고 하란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이 종의 모습을 보게 되면 참 그 모습에서 행복함, 신실함, 충직함을 보게 됩니다. 보시면 여러분도 오늘 제목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유념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당부”
24: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종을 보내면서 종으로 하여금 서약을 시킵니다. 그 서약이 아브라함의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약속하라는 것입니다. 남자의 허벅지는 생명을 잉태시키는 근원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남자의 허벅지를 권위와 주권을 상징하는 곳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약속으로 알고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거기다 손을 넣고 세 가지 조건을 약속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이방여자를 데려오지 말라”(3). 두 번째는 “반드시 하란의 여자를 택하라”(4). 세 번째는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6)는 조건입니다. 지금 이삭은 촌놈입니다. 만일 데리고 갔다가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세속도시 메소포타미아를 지나다가 혹시 환락의 도시를 보고 유혹받고 거기서 어떤 여자를 만나 정착을 고집하면 큰일입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신앙중심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돋보이는 신앙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이 두 사람은 참 진정한 성자였습니다. 그 외에 엘리야, 에녹, 다니엘, 노아 같은 위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일생에서 한 부분만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생애 전체가 나옵니다. 생애 전체를 봐서 그 정도면 완벽한 성자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여기 나오는 이야기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힘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반드시 하란으로 가서 그 딸 중에서 며느리를 선택하라.”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을 살면서 이 중심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 상대의 조건도 중요합니다. 환경도 중요합니다. 외모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로 신앙인들도 조건과 환경에 너무 치중해서 신앙의 바탕도 없는 사람들에게 딸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일말의 불안함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안 믿는 사람이니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 말은 스스로 안위 받으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 가지 알 것은 세상에는 전도해서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 신앙의 문제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몰라서 그 멀리에서 며느리를 구하려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 여인들을 볼 때 완전히 세속에 물들고 타락하고 방종생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신앙이 달랐습니다. 그러니 그 딸들을 데려다가 순수한 혈통이나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하란으로 가서 며느리를 고르라고 다짐 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중심을 보게 됩니다.
“종의 출발”
드디어 이 종이 중책을 가지고 하란으로 출발을 합니다. 아마 그 길을 가는데 상당기간 세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때 하란이면 오늘의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있는 이라크 땅을 말합니다. 가나안이면 오늘의 이스라엘 땅을 말하는데 거기서 오늘의 이라크 땅까지 가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이 말없이 가고 있습니다. 가면서 고민도 많았을 것입니다. 가서 어떻게 처녀를 만나며 만났으면 그 처녀를 어떻게 설득해서 가나안까지 데리고 가는가 하고 참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고민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종은 가면서 신중하게 기도합니다. 이 종이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감동적입니다.
이 종이 드디어 하란에 도착합니다. 하란 땅에 도착하자 이 종이 또 기도부터 합니다. 이 종의 기도를 들어보면 기도의 길, 기도의 방법을 배우게 되고 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향기로운 기도입니까. 10-12절을 보면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낙타를 성밖 우물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려 나올 때였더라“.
이 종이 지금 어디에 멈추어 있는가 하면 동네 우물가에 쉬고 있습니다. 왜 우물가에서 지금 쉬고 있는 아십니까. 옛날 시골에서 살 때 보니까 이 우물가 여기가 밤새 일어난 모든 사건의 취재원입니다. 동네 소식과 통신이 가장 빨리 전해지는 곳이 이 우물가입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동네처녀들, 아낙네들이 다 모여듭니다. 그곳에서 간밤에 일어난 모든 소식이 전 동네로 AP통신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런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래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종은 우물가에서 기다려야 동네의 처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이 거기 앉아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2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이 종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 주인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입혀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종입니까.
오늘 이 시대는 종이 주인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종도 없고 부하도 없고 사원도 없습니다. 오늘은 모두 주인 앞에서는 충신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돌아서면 모두 주인을 욕합니다. 오늘은 배은망덕의 시대입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 주인에게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종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가는 길을 아주 순조롭게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를 보면 “이것이 기도하는 법이구나”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주인에 대한 사랑과 맡은 임무에 대한 충실한 모습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13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며느릿감인 줄 알겠습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그 말은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처녀들이 물을 길으러 올 것인데 그 처녀들에게 물 좀 달라할 것이니 그러면 기쁨으로 ‘마시세요.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리다’하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처녀가 있으면 그 처녀가 하나님이 골라주신 이삭의 신붓감으로 알겠습니다“그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까 리브가라는 처녀가 물동이를 메고 물 길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 하니까 물을 주더니 당신의 약대에게도 물을 주겠다며 목이 갈한 낙타들에게 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가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질 수가 있습니까. 그 종은 그 순간 참 신기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기도의 지름길, 응답받는 기도의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들이 기도하다가 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여기 이 종의 기도를 들어보면 한 가지 힌트를 얻게 됩니다. 이 종의 기도는 아주 순박합니다. 그 순박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리브가를 순전하게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순박하고 전적으로 위임하는 기도를 한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주시는 가를 한번 깊이 눈여겨보십시오. 장래와 직결되어 있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상대에 대해서 매력과 키와 조건만 따지는 사람들은 이런 방법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신붓감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고 물으니까 “장단지는 가늘고”라는 말부터 시작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젊은이 입니다. 응답되는 기도는 하나님께 위임된 기도를 말합니다. 위임된 기도는 그 결과에 순종하겠다는 순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미에 가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때 이 종이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을 보면 “이 종이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유숙할 곳이 있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우리 집에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26절을 보면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하고 기도합니다. 이 종이 그때 상당히 놀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렇게 신비할 정도로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까. 참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이렇게 순리적으로 길이 풀려나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억지로 만들고 업고설키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 일이 그 방향으로 잘 풀려나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종의 길을 얼마나 잘 인도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이 종도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너무 신앙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순수함이 없습니다. 나를 너무 내세웁니다. 계획을 짜 놓고 이렇게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기도의 응답받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때로 금식도 하며 기도는 하는데 사실은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 이 아브라함의 종처럼 한번 생각하면서 기도 생활했으면 합니다. 한번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로를 놓고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진로문제가 얼마나 진지한 문제입니까. “나의 앞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나는 이런 재능이 있습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또 오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합니까. 매력이나 키 큰 것만 따지지 말고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배우자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나에게 이런 배우자를 주십시오. 신앙이 신실하고 무엇 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가진 것 없어도 무방합니다. 과묵하고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키는 170cm전후. 몸무게는 70kg 전후이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세하고 구체적입니까. 우리는 여기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확신 있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 주인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이 종이 처녀를 따라서 브두엘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 지금까지 되어진 일을 그 부모에게 그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떠날 때부터 여기 우물가에서 되어진 일들을 그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51절을 보면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그 부모들이 두말하지 않고 쾌히 승낙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인 것을 그들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에게 이렇게 공감을 줍니다. 믿음을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너도 나도 모두가 합당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모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믿어질 때 모두가 승복하게 됩니다. 얼마나 듣기에, 보기에, 아름답고 시원하고 행복한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기도 응답 받아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기도응답을 받아보면 그 순간 내 몸 안에서 기운이 약동합니다. 성령의 감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적 힘이 순간적으로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 종이 우물가에서 신기하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할 때 얼마나 그 발걸음이 신났겠습니까. 그 맛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행복하고 즐거운 삶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06)
좋은 이웃 좋은 관계
딤후 4:9-18
가정은 서로 관계를 이루어 형성된 집단입니다. 가정은 가족과의 관계가 건강해야 진정한 가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그 가정은 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안식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 가족 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으면 그 가정은 안식처도 아닌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우리교회 납골공원이 있는 메모리얼 파크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이다음에 갈 납골함이 있습니다. 그곳에 이미 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엊그제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생각된 것은 “나도 언젠가 저 단지 속에 가루가 되어 넣어져 저렇게 놓여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은 한편 재미도 있지만 또 한편 씁쓸한 마음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생각되기를 “결국 인생은 저렇게 결말나는 거야”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모두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옹다옹하며 다투며 더 가지려고 더 안달하며 살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자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납골함 옆에는 가족사진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그래 결국은 가족이 최고야”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가족은 생존 시에도 사후에도 변치 않는 관계입니다. 끝까지 지켜주고 사모하고 염려하고 애달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족들뿐입니다. 이 가족이 최고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가족의 중요성을 모르고 불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불행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지면 다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관계에 성숙미를 보여야 합니다. 가족과 교우와 이웃들이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제가 들어갈 납골함 오른편 옆에는 원로목사님이 들어가실 자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와 원로목사님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떨어질 수 없는 질긴 인연을 가진 관계입니다. 제 옆에 이종활 집사님 부부가, 제 바로 위 칸은 최종진 목사님 부부가 위치해 있어 지금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계속 같이 붙어 있어야 하는 관계들입니다. 살아서도 좋은 분들과 함께 하지만 사후에도 좋은 분들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좋은 관계의 삶을 중시해야 합니다. 좋은 관계유지는 삶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기쁨을 부여합니다. 그리움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마침내 삶의 역동성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관계가 악화된다면 이상의 내용들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까지 상실하게 됩니다. 여기서 삶의 윤활유와 같은 작용을 하는 웃음까지 잃게 됩니다.
이 시대의 불행한 것은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책을 보니까 일주일 내내 웃으며 살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원래 웃는 날로, 화요일에는 화사하게 웃는 날로, 수요일에는 수수하게 웃는 날로, 목요일에는 목숨 걸고 웃는 날로, 금요일에는 금방 웃고 또 웃는 날로, 토요일에는 토실토실 웃는 날로, 일요일에는 일없이 웃는 날로 웃으며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웃으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 중 인간만이 웃음의 삶이 부여되었습니다. 이 웃음의 삶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 웃음은 성공자의 삶입니다. 실패자는 웃음이 없습니다. 슬픔자도 웃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음은 성공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웃음이 있어야 할 이유 중에는 웃음의 삶은 치유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웃음의 삶에는 소화기능을 활발하게 해 줍니다. 웃음의 삶은 질병이 고침 받게 해 주고 질병퇴치도 이루어지게 하며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작용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이 웃음이 자꾸만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웃음소리는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의학자가 우리나라 남성들이 얼마나 웃으며 살아가는가를 조사했더니 하루에 한번 웃는다는 조사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데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 이유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의 어려움이나 실패 그리고 아픔과 삶의 고달픔 등의 원인들이 모두 웃음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들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마음의 상처들이 더 큰 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관계의 악화에서 기인되는 요인들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관계의 원만함은 그런 요인들을 얼마든지 상쇄하고 극복하며 더 행복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문제는 관계가 악화되면 궁궐 같은 집안에서도 지옥과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은 눈만 뜨면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그 관계에서 불가불 많은 상처들을 받게 되고 그 상한 마음들이 마침내 웃음을 잃게 만들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의 상처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목회자요 사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였고 많은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니까 교회는 참 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슨 소문이 돌면 “그럴 것이다”하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말이 말이되어 뭉쳐져서 나중에는 엉뚱한 말로 둔갑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 때는 참아내기가 참 힘들어 집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종말이 다가옴으로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너는 속히 오라”(9) 고 부릅니다. 네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느니라(10). 그 말은 다 떠나버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가만 남았느니라.”(11) 누가는 주치의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입니다. 누가는 2차전도 때부터 바울을 수행하여 끝까지 그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밖의 소식을 바울에게 전하고 안의 소식을 밖에 전하였습니다. 본 서신도 누가가 전한 내용입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14). 알렉산더는 우리나라 김 씨와 같이 많은 성입니다. 그래서 앞에 구리 세공업자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는 초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이단에 빠져 배교하여 치리를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알렉산더는 바울이 재판받을 때 불리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내게 해를 많이 입혔느니라,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 사도바울이 그로 인하여 많은 심적으로 고난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소심자였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 사실을 잊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복수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너도 그를 조심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다”(15)고 환기를 시킵니다. 사역을 인계할 때 그를 요주의 인물로 인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불행합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특히 조심할 사람이야” 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인생이 참 비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된 사연들을 고백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느니라.”(16) 사도바울이 1차 투옥 때 한사람도 도와주지 않고 다 나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알렉산더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때 누구도 개입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마음에 상처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바울을 괴롭히고 떠난 것은 아닙니다. 19절을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로마인 부부로 황제신앙 숭배강요를 거절하여 추방당한 후 사도바울과 합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래서 롬 16장4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그들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 놓았던 사람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감정표현이 아주 분명한 사람입니다. 도움을 준 사람과 상처를 준 사람들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처 중에서 가장 큰 상처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다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히브리어로 “라짜즈”라고 말합니다. “산산 조각나다.” “타박상을 입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블랍토”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방해하다”, “해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상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사건이 큰 상처를 입힌다는 점입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상처를 남깁니다. 부부싸움의 원인을 보면 세계평화의 문제로 부부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경제문제로 싸우지도 않습니다. “반찬이 왜이래”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월급이 얼마인데” 이렇게 나옵니다. 갈등과 상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또 하나는 가장 가까운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서 기인된다는 것입니다. 상처는 멀리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에게서 기인되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형제와 시부모와 친구와 교우와 구역식구에게서 기인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 한마디는 상처가 안 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크게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어느 7순을 넘긴 노 할머니가 이혼을 신청했습니다. 영감님과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격적으로 상처를 주는 할아버지와 더 이상 부부로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마음의 상처가 크면 이제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이혼을 생각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이 마음의 상처는 점점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암과 같습니다. 초기에 방치하면 치유가 어려워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이지만 놔두면 커지기 때문에 빨리 치유해야 합니다. 이 마음의 상처는 외부상처와 다릅니다. 외부 상처는 약으로 수술로 쉽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고 약으로 수술로도 고치기가 힘듭니다.
본문서 고백하는 바울의 마음의 상처가 그런 것입니다. 그는 배가 파선하여 두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여러 번 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외부적인 핍박이나 고난은 모두 기쁘게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그레스게는 .... 디도도 떠났다” 이 배신감이 오래갔습니다. 배신감은 마음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예수께 베드로와 유다와 도마의 배신은 오래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을 보면 가장 무서운 죄인으로 배신자를 꼽아 가룟유다와 같은 죄인을 모두 지옥 9층에 집어넣습니다.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느니라.”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를 심히 대적 하였느니라.”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끼리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우와의 관계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여야 할 관계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안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복잡한데 교회에 와서까지 갈등하는 일은 아주 큰 과오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공동체로 하여금 건강하도록 서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성숙이 이루어지고 할 일을 다 하게 됩니다. 또한 부부와의 관계는 가장 조화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조화를 이루는 데는 남편들의 말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가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깰 수도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는 기둥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답지 못하고 옹졸하면 아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무시하고 핀잔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사업이 안 되어 위축되는 때인데 그런 때 말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고 자괴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결과 기쁨을 잃게 되고 행복감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신앙이 퇴색되고 웃음을 잃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는 원래 남남끼리 만난 관계임으로 처음부터 성격이나 마음이 서로 잘 맞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부의 관계는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관계이고 서로 존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특별히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주어진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은 좋은 위로를 만나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위로자를 만나게 되면 깊은 마음의 상처도 쉽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 방법이 가장 궁극적인 해답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알렉산더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고 주님을 쳐다보고 주님께 맡겼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서 나를 강건케 하셨고 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져내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상처를 고쳐주실 분은 주님뿐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상처를 준 사람만 쳐다보게 되면 마음의 감정이 더 깊이 흔들립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진해질 것입니다. 더 미운 생각만 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매사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력은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배려할 만큼 아량도 이해력도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에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늘같이 어렵고 짜증날 때에는 아주 사소한 작은 말 한마디도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우리에게는 그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넓고 깊고 크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적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영적은혜가 나로 하여금 그런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뭄 때에는 모든 식물들이 다 말라 죽습니다. 그러나 오직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늘 푸름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냇가라는 물 곁에 나무가 심겨져 있기에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안에 내주하시는 삶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불가능 하지만 그런데 주의 영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해 하십니다.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의 안내와 임재하심 속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오늘 현대인들은 누구나 이 마음의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마음의 상처는 제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아니면 우울증으로 발전됩니다. 그리고 웃음의 상실로, 기쁨도 잃게 되고 마침내 삶의 의욕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소명은커녕 자신의 삶도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암흑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성숙한 삶은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삶입니다. 거기에서 기쁨이, 행복이 발견 됩니다. 우리들은 그 힘으로 세상에서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07)
주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롬 1:17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는 무속이 우리민족의 정신과 의식을 무섭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속의 지배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집집마다 신이 있었습니다. 안방에는 그 집의 수호신인 성주신이 있었습니다. 작은 방에는 삼신이, 부엌에는 조왕신이, 마당 장독대에는 터주신이, 문에는 문신이, 뒷간에는 측신이, 외양간에는 우마신이 있었습니다. 모양새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경기, 충남, 경남, 동해안지역에는 한지로 묶은 신을, 전라지역에는 단지에, 충북내륙지방에는 혼합형의 신을 만들어 놓거나 걸었습니다. 특히 천정위 대들보에는 터줏대감인 성주신을 모셔 놓고 천정에 구멍을 뚫어 숨을 쉬도록 했습니다. 이 수많은 신들의 제사장은 무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당에게 매사를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이사할 때도, 이름을 지을 때도, 혼인할 때도 택일을 하고 사주도 보고 실행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적 의존도는 오늘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혼인을 할 때 사주와 택일을 보고 이사하는 날도 좋은 날을 잡아 하느라고 좋다는 날에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풍습은 참으로 우리조상들의 삶을 무섭게 억압하였고 속박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이 그렇게 우매하게 무속에 얽매여 살아갈 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우리민족은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자유 해졌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매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유대인들은 율법을 최고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서 사정없이 얽매여 살았습니다. 율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에 사람들은 더 철저히 믿겠다 해서 더 많은 법을 첨가하여 스스로를 얽어맸습니다. 안식일 날에는 뜻을 다해 지키면 되는데 스스로 법을 만들어 구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사람이 우물에 빠져도 건져내지를 못했습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미처 전등을 끄지 못한 사람은 불을 켜 놓은 채로 있어야 했고 아니면 이웃집에 사는 타민족을 불러 불좀 꺼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구속이고 속박입니까.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 그들은 수많은 수고와 자선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던 그들에게 어느 날 세상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오셔서 제물 되시고 마침내 그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믿음의 중심이 율법에서 예수께로 옮겨지고 율법과 제물에서 은혜와 믿음과 말씀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분명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왜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제물을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제물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때 성소안에 쳐져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중간에 칸막이로 휘장이 쳐져있어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도 들여다 볼 수도 없었지만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 말은 이제는 하나님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 졌다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누구나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하였고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 세상에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었고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시작되어 1500여년이 되던 때에는 그 참신했던 믿음이 흐려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 강했던 영성이 증발되고 깊었던 믿음이 얇아지게 되었고 그토록 묵직하게 그 시대마다 메시지를 주던 믿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교권이 강해지면서 순수한 말씀에서 이탈하고 믿음이 변질되고 생동감을 잃고 형식주의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날마다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오랫동안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놔두면 믿음이 형식화 되고 나중에는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그때 믿음이 얼마나 신선하고 강렬했습니까. 그 후 300여 년 동안 극심한 고난과 핍박이 왔고 로마의 압제가 가혹할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동굴 속에서 300여 년 동안을 피신 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땅에 굴을 파고 그 안에서 300여 년 동안을 생활했습니다.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혼인하고 또 낳고 죽어 그곳에 묻히기를 300여 년 동안을 유지했습니다.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 힘이 마침내 325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 후 로마교회는 발전하여 정신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유감없이 행사하였고 그러다가 그 권위가 마침내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어 종교권이 황제 권을 압도하여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그때부터 기독교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가 유례없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서 마침내 있어서는 안 되는 성직을 사고팔았고 마침내는 면죄부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에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라는 것을 하는데 신부가 듣고 그 죄를 사해줍니다. 처음에는 사죄의 값으로 로마순례를 하게 하였고 노동을 시키기도 하였는데 교황 레오 10세에 이르렀을 때 성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는데 비용이 모자라자 면죄부를 팔기로 했습니다. 면죄부 판매 담당이었던 수도승 테첼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돈을 통에 넣으면 돈이 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본인의 죄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그 부모와 친지의 영혼까지도 연옥의 불바다에서 튀어나와 천국문에 이르게 된다”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우매한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돈만 주고 면죄부를 사면 내 모든 죄가 다 사해질 뿐 아니라 지옥에 가 있는 내 부모님의 영혼도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평소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마틴 루터가 “이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했는데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일들이 그치지 않고 계속 번져서 더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해 1517년에 종교개혁의 시동을 걸게 된 것입니다. 그때 종교개혁의 목표가 “원시 기독교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자”해서 “오직 은혜”를, “예배를 회복하고 말씀을 회복하자” 해서 “오직 믿음”을, “성경으로 돌아가자” 해서 “오직 말씀”을, “구원의 길에서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해서 “오직 예수”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다고 루터는 마침내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대제 칼 5세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절대권력 행사자로 누구도 그 앞에서 오금을 펼 수가 없는 권위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당당하게 그 막강한 교황권에 맞섰고 마침내 루터는 종교재판에 회부당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루터에게 “재판정에 가지 말라, 재판정에 가는 도중에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렸습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겁 없이 갔습니다. 당시 루터는 겁 없이 막강한 교황권에 도전하고 거부했으니 사형감이었습니다. 당시 교황권에 도전하면 누가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교황의 칙서가 발표되었을 때입니다. 추상같은 명령입니다. 누가 감히 그 앞에서 도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젊은 수도사 루터는 그 종교재판을 받으려고 당당히 집을 나서면서 외쳤습니다. “기독교인은 면회부와 같은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많은 고통을 통해서 천국에 간다.” 얼마나 겁이 없습니까. 사람들은 이 겁 없는 젊은 신부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 날이 1521년 4월17일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가지 말라, 교황은 얀 후스에게 한 것처럼 너에게도 화형을 시킬 것“이라고 말렸습니다. 얀 후스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입니다. 프라하 대학의 학장이었던 후스는 후에 성직을 받았습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구령예정설을 제창하였다고 파문당해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성직을 박탈당하고 화형당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을 떠 올리고 루터를 만류했지만 그는 다시 외쳤습니다. “그들이 내가 가는 길에 불을 질러 그 불꽃이 하늘에 닿을 지라도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간다, 나는 맹수의 입안으로 들어가 그 이를 부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다, 마귀가 보름스 의사당 지붕의 기왓장만큼 많아도 나는 간다.” 누가 이 사람의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루터가 재판정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놀랐습니다. 루터가 그 죽음의 장소까지 나올 줄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재판이 열려 루터가 칼 황제 앞에 섰습니다. 그 곁에 고관대작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었습니다. 그때 트리니에 대주교의 고문관이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는 “루터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이 모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이었고 두 번째는 “책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모두 취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들은 “믿음, 영혼 구원, 말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취소하면 당장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주장한 믿음, 영혼구원, 말씀은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뿐만 아니고 계속 뜻을 굽히지 않으면 루터는 화형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터는 순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루 더 고민한다 해도 답은 뻔했습니다.
루터는 다음날 같은 자리에 섰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슨 말이 나올까 루터의 입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루터가 하늘을 처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뜨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믿음, 영혼구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쓴 책의 내용들을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답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강조된 것이 4가지입니다. 그것을 4S라고 부릅니다.
sola scriptura - 오직 말씀
초기에 그토록 참신하고 강렬했던 믿음이 1,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말씀의 종교가 의식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중세까지 1,500년을 거쳐 오는 동안 온갖 형식적인 의식이 다 들어와 말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중세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일반인들은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없어지니까 그 대신 십자가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기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 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토마스 아켐퍼스 까지 나서서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이 예배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 십자가는 악마를 물리치고 전염병이나 재앙을 물리치는데 능력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중세말까지 이 십자가가 예배의 대상으로 제단에 비치되었고 다른 기물들이나 형상들은 왜소하게 보이도록 십자가를 더 크게 세웠습니다. 그리고 중세 십자군 전쟁 때에는 이 십자가 깃발을 들고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회교도들은 이 십자가만 보면 치를 떱니다. 중세 종교개혁자들은 십자가가 우상화 되는 것을 우려하여 교회 내에서 십자가를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정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십자가는 성공의 자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그 밑에 가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일은 기피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보이는 형상들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제일 먼저 외친 말이 “말씀을 회복하자”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일반인에게 나누어 주고 읽게 시켰습니다. 그때부터 강단에서 그 말씀으로 설교하고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내용 중 가장 위대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개혁자들은 “하나님이 일찍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오늘도 성경 속에서 말씀하신다”고 외쳤습니다.
sola fide - 오직 믿음
개혁자들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선행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외쳤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이신득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신득의입니다. 이 이신득의가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의 모토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돈으로 노력으로 선행으로 헌금으로 봉사로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입니다.
sola gratia - 오직 은혜
믿음이나 구원받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믿음이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행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이 믿음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것만도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solus christus - 오직 예수
개혁자들은 예수만이 구세주이고 중보자이고 주님으로 높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외친 내용을 요약하면 “인간의 구원은 행위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의로부터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 안에서만 나타난다, 고로 이 같은 진리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 나타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과정입니다.
믿음은 순전해야 합니다. 믿음에 불순물이 들어가면 순도를 잃게 되고 강렬한 신앙의 의지를 잃게 됩니다. 중세 기독교는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씀이 없으니까 수단이 나타났습니다. 방법이 나타났습니다. 형상을 믿었고 성인을 믿었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 그 십자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약화되고 예수가 약화되다 보니까 행위와 봉사와 수고함이 구원이 조건이 되는 것처럼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직 믿음을 강조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히브리서 11장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충천하기를 기원합니다.
(08)
하나님의 고난 프로그램
행 8:1-8
저를 농촌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는 우리집안의 가세가 한창 기울어 갈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을 부족한 것이 많은 채 살았습니다. 꿈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고 꿈도 크게 갖지를 못했고 그래서 한때 방황도 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어른들이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농촌에서 태어나고 어려서 부족함을 경험하였고 또 한때 방황했던 기회를 가졌던 것들 모두가 다 제 인생에 유익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날의 고난의 삶들을 참 고맙게 생각하고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오늘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되었고 마음에 여유가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그런 경험들이 오늘 남의 입장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고난들은 생각해 보면 참 유익한 고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난이나 아픔 그리고 부족함은 때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기업이나 민족이나 신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저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우리민족의 지난날의 고난도 똑같은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민족도 지난날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약하고 무지하고 힘이 없어서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역사를 보면 우리역사가 한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왜 우리민족은 이렇게 당하기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좀 조용히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과 뜻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읽어보면 더욱 그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무참하게 돌에 맞아 죽임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뽑은 7집사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이 스데반이 돌아다니며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사도행전6장8절을 보면 “성령이 충만하여 다니며 큰 기사와 표적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그 전도에 당시 제사장들도 개종하여 넘어왔습니다. 당시 레위인은 18,000명 정도였고 그중 제사장이 8천명 정도였습니다. 제자들과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전도하고 설교했을 때 제사장들이 개종하여 넘어올 정도였으니 일반인들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때 바리새인들이 큰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스데반을 유인하여 회당에서 논쟁을 벌이게 하였고 그때 사람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위증(6:11)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끌고 죽이려 성 밖으로 나가 약 4m 되는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렸으나죽지 않으니까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사도행전8장1절을 보면 그 사건을 주동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사도들과 기독교인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울의 핍박은 곧 바로 기독교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의 수난이 시작되었고 피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수난은 기독교의 운명처럼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고난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새 왕이 나타날 때 마다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기독교 들어갈 때에도 이 점이 나타납니다. 어느 집단에 기독교가 들어갈 때에도 어느 나라에나 기독교가 들어갈 때에는 통과의례처럼 고난과 핍박과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얼마나 저항이 심하고 수난이 심했습니까.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천주교에서는 제사문제만 가지고도 2만 명 여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너무 많이 순교를 당하니까 천주교가 제사제도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천주교가 제사제도를 그냥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우리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1910년대 초 감리교 권사 딸로 우리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유교로 찌들은 우리집안을 하나씩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참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온 씨족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적당한 시점에 우리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을 복음화 하는데 크게 기여를 해 주셨습니다. 오래 사셨으면 아마 어려웠을 것이고 아니면 훨씬 세월이 더 흘러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60년 만에 온 가문 전체가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도저히 믿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다 복음화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단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죽음 후에 심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야밤을 틈타 도망가기 시작하였고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맨 정신으로는 갈 수 없는 사마리아 땅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급하니까 사마리아 땅으로 가서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리는 어딘가에 가면 그냥 있지 않고 반드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오늘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간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운 것이 155개국에 약 5천여 개 교회가 됩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 곧 바로 고난과 수난과 검거선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모두 전국으로 흩어졌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고난과 불행인 것 같이 보였는데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전국으로 또 이방 땅으로 전파되는 효과를 자져 온 것입니다. 그 고난이 없었더라면 유대인들은 오늘까지도 사마리아 땅에 전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여 안주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평안하면 움직이지 않고 주저앉아 뭉개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이 세상에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아픔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날 우리민족의 아픔의 역사도 좀 깊이 바라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고난의 역사 때문에 오늘 우리나라가 형성된 것입니다.
시대마다 지도자 나라들 활용
성경에 보면 큰 나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애굽이 나오고 바벨론이 나오고 메데와 바사가 나오고 헬라와 로마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러시아와 미국과 중국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을 예민하게 한번 눈여겨보면 하나님은 이 나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도자 나라들을 통해서 복음의 흐름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득하지만 애굽, 바벨론, 메대와 바사, 헬라, 로마로 이러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섭리가 로마에서 영국을 중심한 구라파로 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와서 오늘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시아를 보십시오. 지금까지 복음의 흐름이 줄기차게 전 세계를 한 바퀴 돌게 하시더니 오늘은 그 복음이 아시아 지역에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앞에 복음화가 되어야 할 여러 나라들 앞에서 그냥 멈추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중국 신장지역인 티베트, 몽골, 위그루지역의 중국 남부지역, 또 알타이와 튜바 지역인 시베리아 전 지역,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등 모슬렘지역, 또 인도등과 같은 힌두교 지역들이 앞으로 복음이 뚫고 들어가야 할 지역들입니다. 그 지역을 동경 105도 지역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의 흐름이 계속 흘러오다가 그 지점을 앞에 두고 지금 멈추어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지역들 중간지역에 우리 한국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한국이 오늘 이상하게도 복음의 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앞으로 뭔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한국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고 들 말하는 것입니다.
21세기 한국의 역할
앞으로 한국이 이들 나라들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난날의 고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지난날의 우리민족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한국민족의 발자취를 훑어보면 하나님이 우리민족을 훈련하시듯 훈련하셨구나 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이스라엘민족이 세계에 가장 많이 퍼져 살아가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의든 타의든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렇게 퍼져나가 흩어져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렇게 퍼져나간 이스라엘 민족은 나름대로 전 세계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 할 일을 다 해 왔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오늘 이스라엘 땅에서만 모여 살았더라면 오늘 원대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한곳에 모여살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넓게 흩어져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데 한곳에 머물러 안주하니까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서 세상에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날의 환란도 고난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은 우리 한국민족이 이스라엘민족을 제치고 가장 많이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1세기의 세계를 이끌고 갈 나라들을 사람들은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라고 지칭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네 나라에 가장 많이 퍼져서 살아가고 있는 민족이 한국민족으로 자그마치 540만 명입니다. 중국에 220만 명, 미국에 200만 명, 일본에 70만 명, 러시아에 50만 명이 나가 살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의 인구라고 합니다. 효과적으로 인류를 위해 사랑하고 봉사를 실천할 수 있다면 대단한 파워가 될 수 있다는 숫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점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날 역사에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민족을 강제로 세상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고난이 아니면 흩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무서운 환란을 통해서 흩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민족이 반만년동안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세상을 모르고 울안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작은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며 주권과 나라도 잃고 이름도 다 빼앗긴 채 살았습니다. 그 일본의 지배가 너무 고난스러우니까 견디다 못한 일부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북쪽 간도로 갔고 일부는 중국에 정착하여 살면서 민족을 형성하여 살았습니다. 그들을 오늘 우리는 조선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지금 220만 명이나 됩니다. 그곳 북간도에서 살다가 더 북쪽으로 올라가 러시아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고 그들이 다시 강제로 이송되어 거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 사할린에서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지금 50만 명이나 됩니다. 또 6․25로 고난의 삶이 또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고아들이 또 세상으로 입양되어 흩어지기 시작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스위스, 스웨덴, 프랑스, 덴마크 등 15개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지금까지 14만 명이나 됩니다. 지금도 매년 3천 명씩 해외로 입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알고 일찍 눈을 세계로 돌려 나가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미로 하와이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구라파 등 오늘 세계 150여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수가 300여만 명이나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으로 흩어진 우리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자그마치 600여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작은 우리민족을 이 세상 150여 나라에 왜 이렇게 흩어놓으셨을까요. 평안하게 살면 흩어지지 않으니까 이 나라에 숫한 고난과 전쟁과 가난을 통해서 강제로 이 백성들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눈을 좀 크게 뜨고 세상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고난 프로그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큰 핍박과 수난의 역사와 고난들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라는 의문이 이렇게 풀리게 됩니다.
본문 사도행전8장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 “흩어지니라”라는 말씀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핍박으로 흩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언뜻 볼 때는 재수 없어서 스데반이 죽임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처럼 보였지만 그 흩어짐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흩어짐으로 인하여 넓은 지역에 복음이 확장되고 전파되었습니다. 사도행전8장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말씀을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예루살렘이 복음화 되었고 그 후 400년도 안되어 로마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그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 100년 만에 천만 그리스도인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흩어진 우리민족이 전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민족의 복음화로 현재 세계 180여 개국에 복음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지난역사의 고난도 하나님 주신 선물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다보니까 “아 그랬구나”하는 깨달음이 주어집니다. 36년간 아픔을 당할 때는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나”를 생각했었습니다. 6․25의 아픔을 당할 때에도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 시대를 살아갈 때에도 “우리들이 무슨 악을 저질렀는가”라는 의문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의 역사가 지나고 난 오늘 생각해 보니까 그 고난들이 오늘 우리나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8․15후 60년 만에, 6․25후 50여년 만에, 우리나라는 세계 12번째 무역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전 세계 180여 개국에 2만여 명의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또 앞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이 주어진 우리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삶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어제 8․15 64돌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날 8․15역사나 6․25역사를 잊을 만도 한데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그런 뜻과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난날 우리민족에게 뼈에 사무치는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 고난의 역사 때문에 오늘 우리민족이 이렇게 세계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며 순응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우리민족도 할 일을 다 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