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연꽃 같은 삶
정우頂宇 스님
월간붓다 발행인
군종교구장
《대보적경大寶積經》에 “마음은 바람과 같다.
마음은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마음은 머무는 일 없이 일어났다 이내 곧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은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위대해지지 않아도 참 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는 절대로 위대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삶일까요? 바로 자신이 머무르는 곳에서
근본根本과 도리道理를 다하는 삶입니다.
좀 더 인간적으로 들여다보면, 정직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 생활을 끝없는
고뇌苦惱 속에서 고통苦痛과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안목眼目을
갖추어가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 중의 하나인 복지福祉문제도
여기로부터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군종교구장 소임을 맡은 지 벌써 3개월이 되었습니다.
두 달 동안 전,후방 군부대의 법당을 참배하며
새로운 원력을 세워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군 장병들의 손목에 매년 10만 개 이상의 단주를 걸어
주어야겠다는 서원입니다. 팔목에 무언가를 걸고 다니는 것이
요즘 우리사회의 한 유행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건강에 좋다하여 건강 팔찌를, 목걸이나 반지처럼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확연히 건강 팔찌이거나 보석이라는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합장주合掌珠요. 염주念珠입니다.
손목에 염주를 걸고 다니는 종교가 불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묵주.珠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염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느낄까요.
염주는 부처님 당시부터 수행修行의 방편方便으로
사용해오던 불교의 성물聖物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요즘으로 말하면 파킨슨에 걸린 것처럼,
저절로 움직이는 입술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그 제자의 손에 염주를 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염주를 돌리면서
입의 움직임에 따라 염불念佛이나 진언眞言을 하게 하였습니다.
숨은 숨인데 한숨을 쉬게 되면
백 번 천 번을 쉬어도 뜨거운 기운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숨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님을 실어보세요.
훨씬 시원해집니다. 가슴속에 답답함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하여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목에 걸거나 손으로 돌리는 종교의 성물은
우리의 염주와 합장주가 가장 으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복福 많은 스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은 할 일이 많은 스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군종교구장이 되고 군 장병들의 손목에 염주를 걸어 주어야 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도 복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준 불자들이
함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만 명이 만 원씩만 동참해 주셔도 1억 원이 됩니다.
그러면 매년 10만 명의 군 장병들의 손목에
합장주를 끼워줄 수 있습니다.
정우頂宇는 일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일복 많은 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주셔야 할 승가공동체는 바로 불자 여러분들이십니다.
지난 국군의 날 저녁에 방송된 공중파 방송에서는 전방 부대의
신병교육대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에서 19살짜리 지원병과
23살짜리 훈련병이 한 내무반에서 형,동생하며 사이좋게
병영생활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훈련병의 손목에 합장주가 끼워져 있어서 더욱더 눈길이 갔습니다.
게다가 그 훈련병들이 모범적인 병영생활을 하는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은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전방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해야하는
그 병사는 스스로 자원한 수색대대에서 민정경찰 마크를 군복 가슴에
훈장처럼 하나 더 달고 좋아하는 그 손목에 걸려 있는
합장주는 빛나 보였습니다.
얼마 전, 구룡사에서는 군 포교를 위한 기금으로
종단의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에 1억 원을 전달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총무원장 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스님, 종단의 군종교구장은
총무원장 스님이 겸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우는 부교구장이 되어 전후방 현장을 뛰면서
군불교 진흥에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습니다. 종단의 대표이신 총무원장 스님의 원력과 발원이
논산 훈련소에 장엄한 큰 법당이 이루어질 수 있었듯이
더 많은 신병 교육대와 전방부대 장병들이 신심을 키울 수 있는
법당이 세워질 수 있도록 군법사 스님들의 전법 활동에
자양분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은 1
2.2%로 613만 명입니다. 그리고 2025년에는
1,000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노인 복지지수에서 우리나라는 91개 국가 중
67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 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우리보다 앞선 65위이고,
우크라이나가 66위인데 우리는 그보다 못한 67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노인복지는 굉장히 낮은 수준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거기다 기초생활 수급이니 노인 연금이니 하는
것들도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가난했던 나라였습니다. 당시 국민소득은 69불이었으니,
현재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몇 만 원에 불과합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한 달에 몇 천 원 정도의 수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50년 만에 2만 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나 할 것 없이 살기가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돈은 소금인가 봅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물을 켜는 듯 목말라하니 말입니다.
한편, 현재 세계인구 70억 중에서
100살 넘은 노인은 31만 명이라 합니다.
그중에 6분의 1에 해당하는 5만여 명이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장수비결은 대부분 소식小食을 하고 낙천적인 성격에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 우리나라는 100살 넘은 노인 인구가 현재 1,264명인데,
남성은 200명뿐이고 나머지 1,064명은 여성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모리 교수가 조사한 자료와 우리나라 모 대학교
김종인 교수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직종별로 오래 사는 순서가
일본은 종교인, 경제인, 정치인, 연예인 순서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종교인, 정치인, 고급 공무원, 교수, 연예인, 순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일본과 우리의 차이점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인들이 단명하는 첫 번째 그룹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종교인 다음으로 오래 사는 그룹이 경제인이었습니다.
결국, 건강하게 살고자 하면 사회적으로는 안정된 활동이
보장되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오래 산다고 되어 있는데,
왜 남자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는 것일까요?
집에서는 가족관계에 있고 다른 하나는 몰아 붙이는
사회적 분위기의 불안정함이 원인으로 보입니다.
종교인과 정치인들이 오래 사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왜 산업전선에 있는 경제인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야 하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일정 부분은 긴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고는 하지만,
그 긴장이 가중되면 스트레스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아, 날 닮지 마라. 아버지 노릇 힘들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이 짧은 글 속에서 우리네 아버지들의 사회에 대한
중압감이 얼마나 큰지,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은 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되어서 그것이 암세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자료에는 대체로 집에서 큰소리치는 남편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눈치 보는 공처가는
단명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큰소리치며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부인이 순종하는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집안의 부부가 상대적으로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를 부인과 대화보다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남편이
기대 수명치보다 길더라는 것입니다.
마초형 남편이 아내에게 쩔쩔매는 남편보다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존중하며 서로 위해주는 가정에서 가장 장수하는
부부가 많았습니다. 또 있습니다. 끊임없이 부딪치는 가정의 부부는
불행하게도 부부가 함께 단명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제인들은 단명하는 어떤 가정의 모습인가요?
이 역시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물들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지, 각자가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충분히 살펴보고 보듬어 가는 지혜를 발휘하였으면 합니다.
벌벌 떠는 불안한 인생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서로가 이해하고 존중하는 신념으로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연꽃이 진흙에 묻혀있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곳에서
맑고 깨끗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이 진흙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해서 꽃까지
그 물속에서 피우는 것은 아닙니다. 진흙으로부터 솟구쳐 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보름달이 밝은 밤이라도 연꽃은 그 밝음에 취해
꽃 피우지 않습니다. 아무리 흐린 날이라도 낮에만 활짝
피어나는 연꽃의 매무새를 각자의 인생에 견주어 가면서
다듬어가는 생활속의 불교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3년 11월호}
조계종 군종교구 ARS후원 060-700-0108(한통화 5000원)
자동이체 기업은행 060-70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