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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3월 5일부터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4월 20일이 부활주일이고, 그 전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사순절 기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 40일을 보낸 것을 되새기며,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마음으로 생활의 모든 면에서 절제하며,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은 성 금요일을 앞두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주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꼭 이 기간 동안에만 하는 것으로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십자가 앞에서” 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참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죤 칼빈이나 마틴 루터,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을 단행한 그들의 모토는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중심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선행을 하는 것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장식품으로 볼 것도, 예술품으로 볼 것도 아니라, “저 십자가는 내가 달려야 하는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달리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십자가 앞에서 하염없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삶의 위로를 받게 되고, 예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속하고자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죄 없으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겁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오직 믿음으로만” 죄에서 구원을 받으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인도하심을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순절 기간을 채우시고, 더욱 성숙한 성도의 자리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 - 17절을 보시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결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율법의 하나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야 하기에, 열 가지 중, 아홉 가지만 충족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에, 이를 법정으로 본다면, 검사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 15: 6을 보시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믿으니”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 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그 순간만 행하는 단회적 믿음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있어서의 믿음입니다. 시 51: 16 - 17을 보시면,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의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이 의로움은 나의 어떤 행위로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어, 본문 17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 중의 죄인으로 만드는 악한 범죄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악한 범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범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신 분을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만드는 이 죄악보다 더 악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결코, 율법주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자신이 행한 의로 구원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그러한 율법주의가 우리를 정죄와 멸망에 이르게 함을 명심하고 항상 자신을 살핌으로써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8 - 19절을 보시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려는 간절한 열정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에게 우리의 의는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율법을 의식하고 그 율법으로 자신을 정죄하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그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 당시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나 변함없이 수많은 성도들이 율법적, 혹은 윤리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가운데,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많은 성도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늘 율법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가운데,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게 되어,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의를 쌓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혀 있던 병사가 종전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수용소에 남아 탈출용 땅굴을 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로 말미암는 구원이 무관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롬 8: 1 - 2을 보시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이어, 본문 19절을 보시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율법이 나를 좌지우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으면 우리는 무조건 죄인으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에, 율법이 우리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처럼,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살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듯이, 우리는 두 생명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면, 율법에 대해 죽어야 하고, 율법에 대해 살려면 하나님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난 성도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려는 열정과 소망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죽었나니”는,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갈 6: 14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자기가 붙들고 추구했던 율법주의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율법주의를 깨끗이 청산했던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19절의 끝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합니다. 고후 5: 17을 보시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이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려는 열정과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0 - 21절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더 이상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대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전부이고, 또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된다는 겁니다. 실로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착각하여, 자신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에, 자신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로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면했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 때,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감을 알고, 이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삶을 무가치 하고 아름답지 못한 삶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아를 부인하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헌신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그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요, 그 어떤 삶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도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 나의 자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어, 본문 21절을 보시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든다고 합니다. 여러분!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 나가지 않으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이끄신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날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