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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공부의 필요성
출 25: 1-9
출 25장부터는 모세가 사십 주야를 시내 산상에 머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막 제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성소를 어떻게 지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성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 하는 말씀인데, 얼핏 보면 성경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구속의 진리가 놀랍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는 데는 단 6일을 요하셨지만, 성소의 설계를 모세에게 지시하신 데는 40일이 걸렸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성소에 나타난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단 번에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계시는 모두가 모형이나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왜 우리가 성막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건강일까요? 돈일까요? 행복일까요?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사형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나 돈이나 행복이 아니라,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그냥 버려두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우선 구원받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보아야 합니다. 어느 수필 이야기입니다. 어느 총각이 한 처녀를 너무나 사랑하여 매일 편지를 보냈습니다. 365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우체부가 매일 편지를 날라다 주러 가서 그 처녀를 365번을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처녀가 우체부와 결혼하였습니다. 만남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는 우선 안전 착륙을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아닙니다. 고장 난 인간입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정비공을 만나야 하듯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냐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행복만이 깃들어 있었고,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저주와 관계가 없었고, 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인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같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고쳐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의 변동의 역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돌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에서 사람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완성시키던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내가 명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성막이란 본래 단어 ‘미쉬칸’이란 뜻은 거처한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에 성막 공부를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성막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대답하면 ‘성막이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중심은 오실 예수, 신약의 예수는 오신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헨리 홍’이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어린 딸에게 성경을 매일 읽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경을 읽던 딸이 “아빠! 너무 두꺼우니 요약 좀 해주세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약 한 달간 요약해보니 결국은 ‘예수’ 두 글자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것과 같이 성막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구약의 성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신약의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성막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희 육체니라”라고 성막과 예수님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흠없는 짐승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켜 죽임으로 죄사함 받았던 제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예표 합니다.
노르웨이 어떤 마을에 있는 교회 종탑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까지 조각되어 있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교인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건축비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기술자들을 보내고 자기들이 직접 건축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종탑위에서 한 교인이 떨어졌습니다. 실수였습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때 마침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교인은 양위에 떨어져서 양이 죽고 그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말했습니다. “아! 양이 죽어야 사람이 사는구나! 그렇습니다. 양이 죽어야 사람이 삽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구약을 의미하는 양과 신약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동시에 종탑에 장식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같이 성막에서 짐승의 죽음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일치합니다. 그렇기에 성막을 공부해야 십자가의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에 대한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13장, 레위기에서 18장, 민수기에서 13장, 신명기에서 2장, 히브리서 4장, 모두 50장이 성막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모르면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 무지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단일 주제로 최고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4. 성막은 죄인의 구원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너무나 귀한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몇 가지의 이유에서입니다.
1)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죄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서 죄악 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그리고 상막을 본 자는 예수님을 본 자입니다. 성막이 곧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레 1:1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 같이 대화하는 너무나 흥분된 곳입니다. 어느 날 한 사림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지금 당장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 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소. 난 방금도 하나님과 30분을 대화하였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늘 죄인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성막입니다.
4)하나님이 죄인을 받아 주시는 장소입니다. 레 1:4에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으시는 모습이요 방법입니다. 자동차는 네 바퀴 위를 굴러 가지만 복음은 두 바퀴 위를 굴러갑니다. 하나의 바퀴는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산다.” 다른 하나는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입니다. 구약은 흠없는 짐승이 죽고, 신약은 흠없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막에서 짐승이 죄인 대신 죽음으로 죄인이 하나님께 용납되었습니다.
5)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엡 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성막에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았다는 영수증입니다. 성막의 번제단에서 불이 타오를 때 이는 바로 용서의 표징이었습니다. 이같이 성막은 죄인이 구원받은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죄인이 구원받은 유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5.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철저한 성령의 인도, 가장 분명한 성령의 인도는 성막의 인도였습니다. 성막이 완성된 후 바로 성막에 구름기둥이 임하였습니다. 출 40:34-38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으며,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생활하면서 “자 이제는 그만 가자! 여기서 오래 머물렀으니”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짜를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12명의 족장 회의에서 타협을 본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민주화되면 안 됩니다.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좀 더 쉬고 싶어도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가야했습니다. 좀 더 가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머물면 멈추어야 했습니다. 풀밭에 매어 놓은 소가 그 끈을 반경으로 풀을 뜯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날 수 없듯이 지금은 성령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슬려도 안 되고 성령을 훼방해도 안 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성령 안에서 찬송해야 하고, 성령으로 말씀도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만 붙잡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에만 의지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6.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막의 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배우고, 번제단에서 우리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배울 수 있습니다. 등대에서 우리의 사명을 배우게 되고, 떡상에서 말씀의 축복을 배우게 되며, 분향단에서 기도를 배우고, 법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부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의 전체요 성경의 전체입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의 완벽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좋은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모형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을 통하여 수많은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구리 뱀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본 이들은 구원을 받았고, 보지 못한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문설주에 피를 발라 구원받았습니다. 이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모형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희생 제물입니다. 흠없는 짐승이 안수를 통하여 죄를 전가 받아 죽는 모형은 가장 정확하고도 분명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8. 복 받는 길을 정확히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신 첫 선포는 축복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복되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하게 되면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 복을 찾는 비결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용서받는 길이 번제단 안에 숨어 있고, 은총을 얻는 길이 물두멍에 들어 있고, 축복과 응답을 받는 비결이 분향단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9.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고장은 병원에서 진단하여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고장은 성막을 통해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부터 공부하면 영혼이 어디가 고장 났는지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막의 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번제단에서 나의 죄를 예수 피로 속죄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물두멍에서 나는 죄를 버린 후 성결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중생하고 지은 죄의 사슬을 끊었는가? 촛대에서 나는 빛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가? 떡상에서 나는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분향단에서 나는 기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는가? 법궤에서 나는 말씀 속에서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죽은 나무에게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가? 나는 주님을 통하여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이같이 성막 공부를 하면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를 해야 합니다.
10.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알면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막을 공부하면 성경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어설프게 예수를 알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예수를 분명히 안 다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두를 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때까지 그는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너무도 분명히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게 해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성경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성막에 관한 부분을 왜 우리가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까? 성막 공부를 통하여 1)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고, 2)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되며, 3)성경에서 50장이 성막에 관한 기사이기 때문에, 4)성막은 죄인의 구원의 장소이기 때문에, 5)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6)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7)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좋은 모형이기 때문에, 8)성막은 축복 받는 길을 가장 정확히 알려 주기 때문에, 9)성막은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10)성막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을 공부하는 동안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시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주님께 충성을 다 바쳐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성막의 진정한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막의 축복
25: 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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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보면 고통스런 광야가 축복의 장으로 변해
우리는 지난주에 율법, 말씀의 축복을 나누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사막이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먹을 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40년동안 집어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광야입니다. 죽음이 있고 고통이 있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우리 주변에 있는지 모릅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광야에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 비밀을 봅니다.
또 기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이 광야는 순식간에 피는 장미꽃같이 풍성한 옥토로, 축복의 장소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기적과 복을 받으면서 살 수 있겠는가를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먹을 음식이 없었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배불리 먹게 해주셨습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해올 때 아말렉군대를 막아주셨습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는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수 있는 기가막힌 축복이 바로 말씀의 축복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온누리 성도여러분, 무엇을 가졌느냐, 많은것을 가졌느냐가 행복의 기준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행복의 기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나를 만드시고 나를 창조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도, 먹을 음식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고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말씀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은 선하고 거룩하며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빛이요, 등불이 됩니다.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나가야 할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 이야기하라고 한다면성경말씀이라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만사형통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시간에는 과연 우리가 말씀만 가지고서 진정 잘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말씀앞에 절망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성막의 축복 주셔
그러나 우리는 그 율법을 모두 지킬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다면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누리면 됩니다. 그 말씀은 나에게 지혜를 주고 나를 정결케하고 나를 영원까지 이르게 하는 축복을 줍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고민이 있는 것은 그 말씀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지킬 수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행위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얻어지지 않고 은혜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갈등의 원인은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 좋기는 한데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음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음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음란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남의 것이 갖고 싶어집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짓말하고,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싸웁니다. 그래서 율법을 보면 볼수록 내가 더 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차라리 죄인이 아닌데 율법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내가 더 큰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만 가지고 다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연약한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주심과 동시에 다시 한번 모세를 산으로 불러 올립니다.
이것이 24장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처음에 모세를 산으로 불러 올렸을 때 하나님은 돌판에다 말씀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말씀만 받는 인간은 절망하기 때문에 40일 주야로 모세에게 하나님이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의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의 축복과 함께 성소와 성막의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막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25장 1절과 2절을 읽어주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 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처하는 집을 짓기 위해서 너희들은 나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부터 7절까지 그 예물의 종류가 나타납니다.
3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이 8절에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하나님께서 자기가 거할 집을 짓기 위하여 이런 축복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여기 3절부터 물건의 종류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을 하나님께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집에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만들기 위해 기본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금으로 쌉니다.
4절을 보면 실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놓여 있었는데 그 휘장은 4색인 청색, 홍색, 자색, 흰색의 가는 베실로 수를 놓아 만든 것입니다.
또 해달의 가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해달의 가죽은 홍해 앞바다에서 나오는 물개 같은 짐승의 가죽입니다. 해달의 가죽은 성소 지붕 끝에 씌우는 가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다음 7절에 보면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제사장이 입는 에봇이라는 옷에열두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열두개를 답니다. 그래서 호마노며 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쁨으로 드리는 나의 모든 것 쓰시는 하나님 이것이 진정한 축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헌금이며 헌신입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것을 다 예물로 받겠다고 얘기를 하십니다.
그러나 아무 예물이나 받지 않습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억지로 내는 것이나 체면으로 내는 것을 싫어 합니다. 기쁨으로 내는 것을 좋아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내 것을 다 쓰십니까? 너무 좋아서 내는 것만 가지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하는 집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8, 9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들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여기서 보면 성막이란 하나님께서 자기가 거할 집입니다.
왜 이것이 축복인가를 광야같은 세상을 사는 여러분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 성소는 축복일까요?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해와 달과 별과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곳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범신론이 생깁니다. 해도 섬기고 달도 섬깁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이 너무 많으니까 물 떠놓고 빌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영도 있지만 육체도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예배드리면 되지만 육신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육신이 있는 몸을 통해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야 인간이 제일 쉽게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제일 낮은 인간으로 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너 내가 구원했다라고 하면 될텐데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와 만날 장소를 하나 만들어 놓겠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기저기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딱 한 곳에서 정기적으로 내가 너를 만나주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지은 것 용서받고 찬양과 감사 드리며 위로받고 회복되는 성막
성막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율법으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죄지은 것을 용서받을 자리가 바로 성막입니다. 만약에 성막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를 지었는데, 잘못을 했는데 해결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해결하는 것은 십자가로 인해서이지 말씀자체가 우리 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을 받는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막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서 죄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씩 내가 죽을 수 없으니까 염소나 양이나 송아지를 대신 죽게함으로써 그 피를 가지고 내가 죽을 죄를 대신해서 그 성소에 가서 뿌리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내 죄를 용서받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소의 축복입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성소에 들어가서 감사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싶을 때 그 성소에 가서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소에 들어가면 죄용서를 받고,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감사가 넘칩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경배와 찬양이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를 세탁해 주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셔서 그 더럽고 추잡하고 형편없던 나를 깨끗이 씻어서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동안 광야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온누리 성도여러분,
광야의 40년동안 축복 받았던 성소가 바로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믿고 구원받았습니까? 그런데 만약 교회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방황하겠습니까? 세상에 예수믿고 제일 불쌍한 사람이 교회 정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하는 사람은 장례식 치를 곳도 없습니다. 6개월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제사드리는 제단, 자기가 위로받을 곳, 자기가 치유받을 곳, 자기가 회복받을 곳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 중에 축복은 여러분이 나와서 예배드릴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소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위로와 격려를 받고 세상을 향하여 다시 나갈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넉넉히 버틴 이유는 성소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습니다.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것도 보았고 원수도 다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수하고 반복하는 그들에게 다시 죄용서함 받고 회개하고 위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새힘을 얻어 다시 광야로 나갈 수 있게 했던 성소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동안 넉넉히 이길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온누리교회가 여러분에게 준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매일 절감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불행하면 개인의 생활도 영적으로 불행해지고 교회가 행복하면 개인도 행복해집니다. 교회가 시끄러우면 내 생활이 얼마나 복잡해지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축복이 넘치고 찬송이 흘러 넘치고 예배가 이루어지면, 또 그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일주일동안 구름에 뜬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말씀 한번 받으면 그렇게 신나고 좋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성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때문에 40년동안을 넉넉히 버티고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파나 제도가 아닙니다. 건물이나 교파나 제도로 교회를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에 와서 누구를 만납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광야에 있는 성막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성막의 축복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죄사함을 받던 구약시대의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교회성도
중요한 것은 이 성막이 바로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몸을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몸이 교회입니다.
이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여러분이 깨끗하게 만들고 거룩하게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 내 몸이 깨끗하면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승리하며 살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보십시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또 로마서 12장 1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절망한 인간이 성소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 예수님을 만나서 믿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지만 구약의 사람들은 성막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느끼고 만나고 거기서 죄 용서함을 받고 회개를 하고 회복을 하고 변화를 받고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이 매일 매일 승리하며 사는 비결은 예수님을 매일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부활 앞에 매일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삶을 매일 살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은혜를 더하여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잘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정말 성령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셔야 합니다. 마귀의 최대 전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싸움 시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싸움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가 싸우고 이혼하는 것 같이 됩니다. 부모가 싸우고 이혼하면 자식들은 다 방황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자꾸 싸움시키고 분열시켜서 교인들이 신앙생활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혹시 여기 오신 분들 중에 온누리교회 교인이 아닌 분들에게도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가 부족하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좋은 교회를 만드십시오. 그래야 할 이유는 교회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싸우면 어디에 가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축복이 여러분 개인의 축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를 눈물이 있고, 기도가 있고, 감사가 있고, 위로가 있고, 축복이 있는 교회로 만들 때 이 광야같은 세상은 축복의 도시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의 주인이며 교회의 주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높여질 때 여러분의 삶에 고통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될 것입니다.
기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