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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군을 함락했습니다.
주변 10여 군현을 빼앗았습니다.
금성군을 나주(羅州, 벌일 라·고을 주)로 고쳤습니다.
수비군을 남겨 놓고 돌아갔습니다.
다만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이 사건을 911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연도 차이가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려사》의 903년 기록을 기본으로 보면서, 903년부터 912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나주 장악과 방어가 진행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즉, 나주 장악은 단 한 차례 전투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약 10년에 걸친 해상·육상 공방전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3. 나주 상실이 견훤에게 치명적이었던 이유첫째, 후백제의 안방에 적의 교두보가 생겼습니다
나주는 후백제의 수도 완산주, 곧 전주보다 남쪽에 있었습니다. 후백제의 관점에서 보면 적군이 전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토의 깊숙한 배후에 들어와 성과 항구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를 지리적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의 본거지 송악
↓ 서해 수로
나주·영산강 하구의 고려군
↑ 후백제의 배후 위협
무진주·전주 중심의 후백제
견훤은 북쪽에서 왕건과 싸우면서도 남쪽 나주의 고려군을 항상 경계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병력과 군량을 두 방향으로 나누어야 했습니다.
둘째, 영산강 수운과 서남해 해상 교통망을 빼앗겼습니다
당시 나주는 단순한 농업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영산강 유역의 곡창 지대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수로
중국 오월국 및 후당 방면으로 가는 해상 교통로
일본·탐라와 연결되는 교역 거점
서남해 수군을 확보할 수 있는 항구
나주를 차지한 왕건은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시에 서남해 해상 교통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후백제의 국제 교역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임피·희안·승평 등 다른 항구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주를 잃어 해외 교역이 완전히 봉쇄되었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설명입니다.
셋째, 견훤의 수군이 왕건의 수군에 밀렸습니다
909년 왕건이 다시 나주 방면으로 진출하자 견훤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맞섰습니다. 후백제 함선은 영산강의 목포, 곧 오늘날의 영산포 부근에서 덕진포까지 길게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火攻, 불 화·칠 공: 불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함)을 펼쳤습니다. 후백제 함대의 대열이 무너졌고, 많은 병사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500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견훤은 작은 배로 탈출했습니다.
이 덕진포 해전의 패배는 견훤에게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수군 패배 → 영산강 제해권 약화 → 나주 탈환 실패 → 후백제 배후의 고려 거점 고착
넷째, 왕건의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나주 정벌의 가장 역설적인 결과는 견훤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키워 주었다는 점입니다.
왕건은 나주 원정에서 다음을 얻었습니다.
뛰어난 수군 지휘관이라는 명성
서남해 해상 세력과 호족들의 지지
독자적인 군사 기반
궁예 정권 안에서의 높은 지위
훗날 고려를 건국할 인적·경제적 기반
왕건은 나주에서 세운 공으로 궁예 정권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고, 913년에는 시중(侍中, 모실 시·가운데 중: 국정을 총괄하던 최고 관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견훤은 나주를 잃음으로써 영토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장차 자신을 무너뜨릴 왕건의 성장 발판까지 제공한 셈입니다.
4. 견훤은 나주를 되찾으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견훤은 여러 차례 나주 탈환을 시도했습니다.
909년 덕진포 해전
견훤은 대규모 수군을 이끌고 왕건군과 싸웠지만 화공에 패했습니다.
910년 나주성 포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직접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했습니다. 열흘 동안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궁예가 수군을 보내 공격하자 견훤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습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견훤전에 모두 전합니다. 《삼국사기》 910년 나주 공격 기록
912년 덕진포 일대의 재충돌
《삼국사기》에는 912년에 “견훤이 덕진포에서 궁예와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강진 무위사의 〈선각대사비〉 등을 근거로, 이때 궁예가 직접 서남해 지역에 내려와 나주 경략을 마무리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다만 궁예의 직접 참전 범위와 구체적인 전투 과정에는 연구자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5. 그렇다면 견훤은 언제 나주를 되찾았는가
현재 연구에서는 나주 일대가 약 929년부터 935년 초까지 후백제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성전투’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929년 어느 날 견훤이 나주성을 함락하였다”라는 명확한 기사는 없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탈환 날짜와 방식은 알 수 없습니다.
연구자들은 다음 정세를 근거로 견훤의 나주 탈환을 추정합니다.
927년 공산전투에서 견훤 승리
→ 고려 주력군에 큰 타격
→ 후백제의 군사적 우세 확대
→ 928~929년 후백제의 대대적인 공세
→ 고려의 나주 수비력 약화
→ 후백제가 나주 일대 회복
즉, 견훤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인 뒤 그 여세를 이용하여 나주를 되찾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견훤이 직접 나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견훤이 직접 지휘했는지, 후백제 장수가 점령했는지, 현지 세력이 다시 후백제로 돌아섰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6. 되찾은 나주는 어떻게 다시 고려로 넘어갔는가
935년 3월 후백제에서 신검의 정변(政變, 정사 정·변할 변: 권력자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내분을 이용하여 고려의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장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결과 935년 6월 견훤이 금산사에서 탈출했을 때 다음 경로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금산사 탈출 → 나주 도착 → 고려군의 보호 → 고려 수군의 배를 타고 개경으로 이동
왕건은 유금필 등에게 병선 40여 척을 주어 나주에 있던 견훤을 맞아 오도록 했습니다. 이는 935년 6월 무렵 나주가 이미 고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역설적으로 견훤이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나주는 훗날 자신이 아들 신검에게서 탈출하여 왕건에게 망명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7. 나주 상실은 정말 견훤의 ‘결정적 실패’였는가
저의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주 상실은 견훤이 후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실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만 견훤은 927년 공산전투에서 왕건군을 크게 격파했고, 929년 무렵에는 나주까지 되찾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주 상실만으로 후백제의 패배가 이미 확정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견훤의 최종 실패는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였습니다.
중요도실패 요인의미
| 1 | 왕위 계승 실패와 신검의 정변 | 후백제가 내부에서 붕괴 |
| 2 | 왕건의 호족 포용과 연합 전략 | 고려가 더 넓은 지지 기반 확보 |
| 3 | 나주 상실과 서남해 제해권 약화 | 후백제의 배후가 지속해서 위협받음 |
| 4 | 930년 고창전투 패배 | 경상도 북부와 동해안 세력 이탈 |
| 5 | 신라에 대한 강압적 정책 | 경순왕과 신라 세력이 고려를 선택 |
따라서 저는 나주 상실을 “견훤의 결정적 실패”라기보다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습니다.
나주 상실은 후백제의 배후를 열어 놓고 왕건을 성장시킨 장기적·구조적 실패였으며, 신검의 정변은 후백제를 실제로 무너뜨린 직접적·결정적 실패였다.
요점 정리
903년경 왕건은 궁예의 명령을 받고 금성군과 주변 10여 군현을 장악하여 나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견훤은 909년 덕진포 해전과 910년 나주성 포위전 등으로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나주의 상실로 후백제는 배후가 위협받고 영산강·서남해 해상권도 약화되었습니다.
왕건은 나주 원정을 통해 군사적 명성과 해상 세력의 지지를 얻어 고려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견훤은 929년 무렵 나주 일대를 되찾아 935년 초까지 약 6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탈환 시점과 전투 과정은 사료가 없어 알 수 없습니다.
935년 신검의 정변을 틈타 고려가 나주를 다시 장악했고, 견훤은 바로 그 나주를 통해 왕건에게 망명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주 상실은 견훤의 가장 치명적인 장기적 전략 실패 가운데 하나였지만, 후백제 멸망의 직접적 결정타는 왕위 계승 분쟁과 신검의 정변이었습니다.
친구야, 가장 큰 이유는 나주 호족들이 ‘옛 백제의 부흥’보다 자신들의 독립적 지배권과 해상 교역권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주 호족들이 모두 처음부터 견훤을 배척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주 세력은 견훤과 왕건 사이에서 협력과 견제를 반복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사료에는 이들의 속마음이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래 설명에는 사료와 당시 정세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추론이 포함됩니다.
1. 나주는 견훤의 직할지가 아니라 강력한 호족들의 연합 지역이었습니다
신라 말 나주·영산강 하구에는 하나의 통일된 호족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주 목포 일대의 오다련 세력
압해도와 서남해를 장악한 능창의 해상 세력
영산강 연안의 여러 성주·촌주 세력
곡창과 포구를 각각 지배한 토착 세력
이들은 자체적으로 성과 군사·선박·곡창을 보유했습니다. 중앙정부의 관리라기보다 작은 나라의 지배자에 가까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도 나주 지방 세력이 “견훤과 왕건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견제하면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유지했다”고 설명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따라서 관계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견훤의 중앙집권 요구
↕ 충돌
나주 호족의 독자적 지배권 유지
견훤이 나주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호족들에게 군량·병력·세금·선박을 요구하고 지휘권을 빼앗아야 했습니다. 나주 호족들에게 견훤의 세력 확대는 보호인 동시에 자율권을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2. 견훤은 나주에 ‘협력자’보다 ‘정복자’로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신라의 서남해 방수군 장교였습니다.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면서 서남부의 지배자로 등장했습니다.
즉, 나주 호족들의 관점에서 견훤은 자신들과 같은 토착 호족이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외부의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견훤이 옛 백제의 부흥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나주 세력에게는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백제를 다시 세운다지만, 실제로는 무진주와 완산주의 군사 세력이 나주를 지배하려는 것 아닌가?”
견훤은 900년 완산주, 곧 전주에 도읍하고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이로써 국가 운영의 중심도 전주와 그 주변 세력으로 옮겨 갔습니다.
나주는 경제력과 해상력이 컸지만 정치적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따라서 나주 호족들이 견훤 정권을 ‘우리의 국가’보다 ‘전주 중심의 군사정권’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직접 기록된 사실이라기보다 당시 세력 구조에 따른 추론입니다.
3. 무진주 세력과 나주 세력 사이에 지역적 경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광주와 나주가 가까운 지역이지만, 신라 말에는 각각 독자적인 지방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무진주: 내륙 군사·행정 중심
나주: 영산강 곡창과 서남해 해상 교역 중심
압해도·무안·영암 일대: 섬과 포구를 기반으로 한 해상 세력
견훤은 먼저 무진주를 장악했고, 무진주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나주와 서남해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이에 나주 세력은 견훤을 자신들의 경제권을 침범하는 무진주 세력의 대표자로 보았을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옛 백제인 대 외부 세력’이라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었습니다.
무진주·전주 중심의 후백제
대
나주·영산강 중심의 토착 해상 세력
같은 옛 백제 지역 안에서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랐던 것입니다.
4. 견훤은 호족을 포섭하는 방식이 왕건보다 강압적이었습니다
견훤도 호족과 혼인하고 관직을 주었으며 외교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따라서 견훤이 오직 무력으로만 지방을 지배했다고 말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왕건은 호족들의 기존 권한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연합체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더 능숙했습니다.
견훤왕건
| 군사적 정복을 우선함 | 귀부와 연합을 적극적으로 활용함 |
| 왕권 중심의 지휘체계를 요구함 | 호족의 기존 지배권을 상당 부분 인정함 |
| 반항 세력을 직접 공격함 | 관직·성씨·혼인으로 관계를 맺음 |
| 전주 중심의 국가 건설 | 여러 지역 호족의 연합체 구축 |
왕건의 정책은 호족들의 자율권을 당장 빼앗기보다 고려의 관직과 왕실 혼인을 통해 보장해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호족의 처지에서는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견훤보다 자신들의 지위가 인정되는 왕건이 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5. 왕건은 나주 호족과 혼인동맹을 맺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오다련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목포 지역의 유력자인 다련군 오다련의 딸이었습니다. 왕건은 나주에 출정했을 때 오씨와 혼인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훗날 고려 제2대 왕이 되는 혜종 무가 태어났습니다. 우리역사넷 ‘장화왕후와 왕건’
이 혼인은 단순한 개인적 사랑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왕건과 나주 호족 사이의 정치적·군사적 동맹이라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오다련 세력의 곡물·선박·수군 제공
↕
왕건의 지위 인정·왕실 혼인·정치적 보호
더욱이 오다련의 외손자인 혜종이 고려의 왕이 되었습니다. 나주 오씨 집안은 단순한 지방 호족이 아니라 고려 국왕의 외가가 된 것입니다.
견훤이 나주 호족에게 제시할 수 없었던 강력한 보상이었습니다.
다만 오다련이 나주 전체를 대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나주의 여러 유력 세력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6. 왕건은 나주 호족과 경제적 성격이 비슷했습니다
왕건의 집안은 예성강과 송악을 기반으로 성장한 해상·상업 호족이었습니다. 왕건 자신도 수군 지휘와 해상 교통에 매우 능숙했습니다.
나주 호족들도 다음과 같은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산강 수운
서남해 해상 교통
중국·일본·탐라와의 교역
선박과 수군
포구와 섬의 지배
나주평야의 곡물 운송
따라서 왕건과 나주 호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경제 활동의 방식과 이해관계가 유사했습니다.
왕건은 바다를 이용하여 세력을 넓힌 호족이고, 나주 호족은 바다를 통해 부와 권력을 유지한 세력이었습니다.
왕건은 이들의 해상 활동을 활용할 수 있었고, 나주 호족 역시 왕건과 연결되면 서해를 따라 송악·황해도·중국으로 이어지는 더 넓은 교역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견훤은 육군과 내륙 거점을 중심으로 국가를 확장했습니다. 견훤에게도 수군은 있었지만 해상 호족과 대등하게 연합하기보다 국가의 수군으로 편입하려는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7. 나주 호족은 견훤과 왕건을 경쟁시켜 자신의 이익을 지켰습니다
나주 호족들이 처음부터 왕건에게 충성했다고 보는 것도 지나친 해석입니다.
일부 나주 세력은 견훤에게 협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견훤이 909년 덕진포 해전에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고, 929년 무렵 나주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세력의 일정한 협력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압해도의 능창도 견훤과 연결된 해상 세력이었다는 견해와 독립 세력이었다는 견해가 함께 존재합니다. 왕건은 능창을 붙잡아 궁예에게 보냈고, 능창은 처형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능창’
따라서 나주의 실제 정치 구도는 다음과 같이 복잡했습니다.
나주 지역 세력가능한 선택
| 오다련 계열 | 왕건과 혼인·연합 |
| 능창 계열 | 견훤과 협력하거나 독자적 해상권 유지 |
| 성주·촌주 세력 | 전세에 따라 견훤·왕건 사이에서 선택 |
| 일반 주민 | 생존과 지역 안정을 제공하는 세력에 협조 |
즉, “나주 사람 모두가 왕건을 지지했다”기보다 나주 호족들의 분열 속에서 왕건이 중요한 일부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8. ‘백제 부흥’이라는 명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면서 의자왕의 원한을 갚고 옛 백제를 부흥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한 660년부터 후백제가 건국된 900년까지 약 240년이 흘렀습니다. 나주 주민들이 자신을 옛 백제인으로 기억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정체성이 실제 정치적 선택을 모두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호족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누가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하는가?
누가 교역로를 보호하는가?
누가 군사적 안전을 보장하는가?
어느 세력과 연합해야 더 높은 관직을 얻는가?
전쟁에서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이 큰가?
따라서 견훤의 ‘백제 부흥’과 왕건의 ‘고구려 계승’은 중요한 명분이었지만, 호족들은 혈연적·지역적 감정보다 정치적 생존과 경제적 이익을 우선했습니다.
원인별 중요도
제가 판단하는 비중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주 호족의 강한 독립성과 견훤의 중앙집권 요구가 충돌했습니다.
왕건이 혼인·관직·지위 보장을 통해 나주 유력 세력을 포섭했습니다.
왕건과 나주 해상 호족의 경제·교역 이해관계가 잘 맞았습니다.
무진주·전주 중심의 후백제와 나주 중심 토착 세력 사이에 경쟁이 있었습니다.
견훤은 군사적 복종을 요구한 반면 왕건은 연합과 타협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240년 전 멸망한 백제의 부흥이라는 명분만으로는 나주 호족을 묶기 어려웠습니다.
결론
나주 호족들이 견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근본 이유는 민족적·지역적 배신이 아니라 권력과 경제의 문제였습니다.
견훤은 나주를 후백제의 영토로 편입하려 했고, 나주 호족은 후백제 안에서도 자신들의 독자적 지배권과 해상 교역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왕건은 바로 그 틈을 이용했습니다. 그는 나주 호족을 정복 대상이 아니라 혼인하고 관직을 나누며 함께 갈 연합 세력으로 대했습니다. 그 결과 왕건은 후백제의 배후에 군사 거점뿐 아니라 정치적 동맹망까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요점 정리
나주에는 독립성이 강한 여러 호족과 해상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견훤과 왕건 사이에서 자신들의 지배권과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 했습니다.
견훤의 중앙집권과 군사적 편입은 나주 호족의 자율권을 위협했습니다.
왕건은 오다련의 딸과 혼인하여 나주 세력을 고려 왕실과 연결했습니다.
왕건과 나주 호족은 해상 교역과 수군이라는 공통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주 호족 전체가 왕건을 지지한 것은 아니며, 견훤 지지 세력과 독자 세력도 존재했습니다.
결국 왕건이 견훤보다 나주 호족의 정치적 욕구를 더 잘 이해하고 포섭한 것이 승패를 갈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