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가납(嘉納)하실 단식과 재
내가 어렸을 때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들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양식이 귀해 굶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농사법을 활용한다 해도 그 당시 한마지기(200평)에서 양석(兩淅 : 쌀 두가마니)이 나오면 아주 농사를 잘 지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잣집의 농지를 빌려서 한해 정성껏 농사를 지어주고 가을에 타작해서 반은 농지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반을 양식으로 가져옵니다. 소작인들은 그래도 부잣집의 일을 해주고 먹고 살만 하였으며 소작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소작도 못하였으니 정말 먹고 사는 일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죽지 못해서 산다.’라는 말도 나오고, ‘사람이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먹기 위해서 산다.’라고 답변하고, ‘잘 먹은 귀신 때깔도 좋다.’, ‘먹는 게 남는 것이라.’거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말이 아마 그래서 생겨난 것 같습니다.
충청도에서 아침 인사를 ‘진지 잡수셨슈?’라고 하는데 이는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라는 말입니다. 하루 세끼 중 굶지 않아야 하는 끼니는 아침인데 그 아침 식사를 어떻게 하셨는지 묻는 인사여서 우리가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표준말을 배우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안녕하십니까?’로 바꾸어 인사를 하는데 요즘은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데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안녕하세요?’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사처럼 느껴져서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이 너무 각박하고 변화무쌍해서 그렇게 인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서로 만나서 나누는 인사가 식사 여부를 묻는 것처럼 어려서 밥을 굶는 것은 예삿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친구들의 엄마가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리면 게임에서 이기고 있고 재미있어도 쏜살같이 뛰어갑니다. 어느 날에는 엄마가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자기 집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으면 그날 저녁은 없는 것입니다. 몇몇 아이들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놀다가 시름없이 발길을 돌리며 돌아가는 발걸음이 축 쳐지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도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점심시간은 밖에서 빙빙 돌아야 했을 만큼 하루에 세끼 밥을 찾아서 먹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식사 중에 밥상 앞에서 수저를 놓았다가는 천벌을 받을 짓이며, 지옥에 떨어질 빌미가 되는 일이고, 조상의 은덕을 영영 받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잘못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날은 밥을 굶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을 같이 듣는 일이기에 가장 심한 욕은 ‘밥 빌어먹을 놈’이라는 말로 어려서 최고의 벌은 밥을 굶기는 것이었습니다. “넌 오늘 할일도 하지 않았으니 밥 먹을 생각도 하지마라!”하고 말씀하시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자주 그렇게 화를 내고 밥상 앞에서 수저를 내동댕이치는 행동은 정말 식사의 소중함이나 밥을 굶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밥상 앞에서는 절대로 꾸짖지 말라고 옛 어른들은 가르쳤습니다. ‘개도 밥 먹을 때는 나무라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꾸중을 듣고 울면서도 밥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던 어리고 젊은 시절을 생각해서 나는 배고픔과 단식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고 있답니다.
우리가 어떤 뜻이나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밥을 굶고 항의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단식농성은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시위행위입니다. 간디는 영국정부와 대항하면서 또 동족의 화합을 위해서 단식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단식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뚜렷한 명분이 없는 단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얼굴을 내기 위한 단식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의미 없는 단식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단순한 율법에 의한 가식적인 단식은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재(齋)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재를 지키는 때는 하느님을 빼앗겼을 때 하느님을 되찾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원하기 위해서 단식한다면 명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내 탓으로 잃었을 때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 헤매며 단식한다면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것이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단식하며 달음질쳐가며 가야 하기 때문에 단식이 합당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청할 때, 단식과 같은 재를 지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은 하느님께서 가납(嘉納)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랑으로 오시어 혼인잔치를 벌리고 있는데, 그 잔치에 제자들과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단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단식의 재를 받으실 분이 단식이 소용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이를 반증할 근거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단식하거나 재를 지킬 뚜렷한 이유가 있을 때는 철저하게 단식하고, 재를 지키면서 재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가납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일 년에 두 번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대재를 지키도록 권장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잘 지키지 못하고 소재도 잘 지키지 못하는데 바리사이들처럼 형식적인 재를 지키는 데에 내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끼를 굶는 단식보다는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일을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