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아가는 이야기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지 5년째다. 고등학교 때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소도데의 "별"같은 단편을 읽으시는 낭랑한 국어 선생님 때문에 문학의 묘미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상 정도는 있었지만, 내가 글을 쓰리라고는 일찍이 상상조차 못 했다. 2017년 어느 더운 날 삼식이를 모면하려고 범어사 계곡을 찾아 두어 시간 방황하면서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세상 사는 이야기 형식으로 글로 남겨야겠다고 한 게 시발점이 되었다. 그 전에도 말하는 것보다는 글의 형식을 빌리는 게 쉽긴 했지만 일기 따위의 강제성이 가미된 글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건 순전히 나의 천성이 게으런 탓이라고 치부했다.
삼식이 글을 쓴 후 일주일에 한 번은 써야겠다고 다짐을 하니 어떤 의무감 같은 것도 생기고 동기부여가 되어 그런지 지금까지 190편을 써왔다. 글감이 있을 때는 매일 쓰기도 하고 적당한 글감이 없을 때나 나태해지면 한 달 보름도 건너뛰기도 했다.
저장해둔 초창기 글을 다시 읽어보면 유치하고 이런 글도 글인가 싶을 정도로 부족한 글이 대부분이지만 글 쓰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글이 좋아지는 듯했다.
글 소재가 역사나 정치시사 쪽인 것도 있지만 거의가 신변수필 형식으로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라 읽는 사람들이 대리만족하거나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회수가 거듭되고 짬이 쌓이자 동창들의 단톡방이나 페이스북에 내가 쓴 글을 올리게 되니 애독하는 독자도 생겨나게 됐다. 그냥 재미 삼아 쓴 글이라도 읽는 독자를 의식해야 하니 이 참에 제대로 된 글 쓰기를 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문득 평생교육원 같은 곳에 강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서 교육원을 서핑해 보니 부경대학교에 있었으나 50명 모집이 끝났다고 하여 부산대 시창작과정을 등록하게 되었다. 잡문 나부랭이의 글줄은 써봤지만 시는 내 영역 밖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5주 만에 시를 습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학기에는 시에 대한 미련은 과감하게 버려버리고 유튜브 크리에이터 과정을 이수했다. 유튜브 채널도 개설하고 열심히 했다. 60여 개의 영상을 올리고 간신히 구독자가 300명을 넘었다. 조회수가 2만을 넘는 영상도 생겼지만 선정한 콘텐츠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6개월 만에 한계를 느꼈다. 처음에는 욕심이 생겼으나 과욕을 버리고 내가 좋은 것만 하는 브이로그 형태로 운용하기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70이 넘은 나이에 유튜브를 할 수 있고 시대에 처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자부심은 소득이었다.
올해 첫 개강한 고대하던 효원수필 아카데미에 선착순으로 등록했다. 단톡방 명단을 보니 내가 최 연장자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유튜브 과정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고 시창작교실도 내가 최연장자여서 부담스러웠다. 배우는데 나이가 뭐 중요한가 하지만 늙어서 대접받는 것은 호박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처신하기가 여간 짐스러운 게 아니다. 나는 아직 흰머리 칼 하나 없는 자연산이지만 대머리를 컴프러치 하려고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내 친구들을 보면 연민의 정이 절로 난다. 특히나 문학을 한다는 분 중에는 모자를 쓰는 분이 많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기는 한다. 개강 1.2주 차에 오미크론이 5.60만 명씩이나 폭증하여 옆지기의 협박으로 본의 아니게 결석하고 3주 차부터 늦깎이로 수강하고 있다. 자기 글 발표시간의 글들을 들어 보니 쟁쟁한 분들이 많은 듯하다. 효원수필 14호에 게재된 작품을 완독 해보니 우수한 작가선배들이 부지기수였다.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인데, "적과의 동침"이라는 글을 감동 깊게 읽었다. 잘은 모르긴 해도 모름지기 수필도 이런 식으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화하듯이 유머와 위트를 첨가하여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읽어 내릴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 아니겠는가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님과 시골의사 박경철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의 글쓰기의 최종 목표인 팔순 기념 수필집 출간을 위하여 이제부터 본격 시작이다. 성공한 사람은 방법을 찾고 실패한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 하는데 효원아카데미는 내 인생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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