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여자, 자유를 입다
여자는 가끔 자신이 몇 살인지 잊는다. 아니, 잊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이를 헤아리는 일보다 오늘 어떤 바람을 만났는지가 더 중요해진 까닭이다. 세월은 자꾸만 숫자를 더하지만 마음은 때때로 그 숫자를 지우며 살아간다.
오래된 나무 아래에 섰다. 굵은 가지가 하늘을 받치고 그늘 아래에는 개 한 마리가 느긋하게 앉아 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린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낯선 옷을 입고 서 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편안하다. 어쩌면 사람에게도 돌아가야 할 본래의 모습이 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 속의 한 사람.
초원에 앉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멀리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작은 마을은 초록빛 언덕에 기대어 있다. 들꽃 몇 송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턱을 괴어 본다. 문득 어린 날의 내가 찾아온다. 꽃 한 송이에도 웃고 구름 한 점에도 이야기를 만들던 소녀다. 세월이 그 소녀를 데려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바쁜 삶의 뒤편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놓친 것이 어디 한둘이랴. 꿈을 접어야 했던 날도 있었고, 웃음보다 한숨이 먼저 나오던 저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 소녀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지쳐 주저앉을 때마다 작은 손을 내밀며 다시 걸어 보자고 속삭였다.
산맥을 넘어온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흰 말 한 마리가 곁에 서 있다. 손에 쥔 작은 피리에서 아직 불지 않은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세상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가슴에 묻어 둔 그리움도, 끝내 이루지 못한 소망도 바람에게 들려주면 한 곡의 노래가 될 것 같다. 나는 오래도록 길을 걸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뒤를 따랐고 때로는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돌아보니 길이 나를 이끈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자리에 길이 생겨 있었다.
어느 마을에 이르자 북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모여 웃고 노래한다. 나도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화려한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발끝에서 오래 잊었던 흥이 깨어난다. 젊은 날에는 남의 시선이 두려워 마음껏 춤추지 못했다. 웃고 싶어도 웃음을 삼켰고 울고 싶어도 눈물을 감추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인생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 있음을 기뻐하는 한바탕 춤이라는 것을.
나무 아래의 여자도, 들꽃을 품은 소녀도, 흰 말 곁에서 노래하는 여자도,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여자도 모두 나다. 서로 다른 옷을 입었지만 가슴에는 같은 바람이 분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평생 수많은 옷을 갈아입으며 살아간다. 딸의 옷을 입고, 어머니의 옷을 입고,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동안 정작 자신의 옷은 옷장 깊숙이 넣어 두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나를 입혀도 괜찮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일에 다시 마음을 내고, 낯선 풍경 앞에서도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꽃이 피면 잠시 걸음을 멈춘다. 때로는 노래하고 때로는 춤춘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늘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쁜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 햇살이 산등성이에 걸린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옷자락을 흔든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오래 걸어온 길들이 마음속에서 하나둘 환해진다. 아팠던 날도, 눈부셨던 날도 모두 내 삶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안다.
세월이 내게서 젊음을 조금씩 가져갔을지라도 빼앗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다시 꿈꾸는 마음이다. 나는 오늘도 길 위에 선다. 들꽃처럼 웃고, 바람처럼 노래하며, 때로는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내일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두렵지는 않다.이제 나는 길을 찾아 헤매는 여자가 아니다. 내가 걸어가는 곳마다 길이 되고, 내가 머무는 곳마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꽃은 아직 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