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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죽었다고 역적 허리와 목을 그냥 붙여두겠는가”[박종인의 땅의 歷史]
337. 근대로 가는 길목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3.03.22. 03:00
충청남도 아산에 김옥균 무덤이 있다. 도로명 주소 또한 김옥균 호를 따서 고균길이다. 1912년 당시 아산군수였던 양자 김영진이 일본에 있던 김옥균 묘에서 머리카락을 가져와 이장한 묘다. 1894년 상해에서 암살된 뒤 조선으로 끌려온 김옥균 시신은 4월 14일 밤 온몸을 토막내고 칼집을 내는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을 받고 팔도에 뿌려졌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10년째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 김병태는 아들 시신이 추가형을 받은 다음날 천안 감옥서에서 처형됐다. 역적이 죽은 뒤 그 시신에 처벌을 가하는 ‘역률 추시’는 영조 때, 가족을 연좌해 처벌하는 ‘노륙형’은 정조 때 법으로 금지된 형벌이었다. 법을 무시하고 복수를 완성한 고종은 “10년 동안이나 형벌을 적용하지 못한 것이 통분스럽다”고 말했다. 아버지 묘 동쪽에 아들 김영진 묘가 있다. 비석이나 석물은 없다. 식민시대 여러 군데 군수를 지낸 아들 김영진은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QyaH9e2sokY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근대로 가던 길목, 그 끔찍한 경로
1896년 2월 11일 조선 국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날 아침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바로 그 국왕이 보낸 경찰들에게 노천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내린 명령은 ‘급히 가서 두 사람 목을 베라[急往斬之·급왕참지]’(정교, ‘대한계년사’(한국사료총서 제5집) 上, 1896년 2월 11일)였다. 경찰이 종로에 팽개친 두 시신을 행인들이 처참하게 훼손한 뒤 고종이 한 말은 이러했다. “귀신과 사람 울분을 시원히 풀었다.” 고종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즉시 석방해주라고 명했다. 죄 경중 여부는 따지지 않았다.(1896년 2월 11일 ‘고종실록’) 2년 전인 1894년 봄날에도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풍경 속 주인공은 갑신정변(1884) 주역 김옥균이다. 그해 봄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나라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 시신에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이 집행됐다. 이를 기념하는 대사면령도 내렸다. 그리고 고종이 말했다. “요망한 역적 허리와 목을 그대로 붙여 둬서야 되겠는가.”(1894년 음력 4월 27일 ‘고종실록’)
명쾌하고 일관됐던 김옥균의 삶
김옥균은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894년 3월 27일 청나라 상하이에서 죽었다. 마흔세 살이었다. 1884년 부패한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을 일신하며 대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김옥균은 다섯 살 때 안동 김씨 권세가인 당숙 김병기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에 살았다. 1872년 2월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탁월한 봉건적 인재였다. 사람이 영민하고 집안 배경도 좋으니 세도정치 프레임에 안주하면 편히 살다 죽을 인생이었다.
그런데 북촌 고개 아래에 사는 개화파 관료 박규수를 만나며 근대를 알게 됐고 나라가 부패했음을 알게 됐고 청나라 바깥에 일본이 있고 그 바깥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천하(天下) 대신 어느 나라든 힘만 있으면 중심이 될 수 있는 ‘세계(世界)’가 있음을 알게 됐다. 더 이상 봉건질서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김옥균처럼 북촌에서 박규수로부터 개화를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개화와 근대의 결과를 목격한 청년들이 만들려 했던 개혁의 비상구였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자객 위협에 ‘될 수 있는 한 바보 흉내를 내라’는 친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조언에 방탕한 생활도 했다.(구스 겐타쿠, ‘김옥균’, 윤상현 역, 인문사, 2014, p77)
그 방탕했던 김옥균이 1894년 3월 ‘민씨 잔당 세력을 타도하고 개화당의 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청나라 실세 이홍장을 만나러 상하이로 갔고, 죽었다.(김흥수, ‘김옥균의 최후’, 한국학연구68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23) 죽을 때까지 김옥균에게는 근대와 개화가 화두였다.
충남 공주 정안에 있는 김옥균 생가터. 1990년 공주 사람들이 이 들판에 기념비를 세웠다. 공주가 아니라 천안이라는 주장도 있다./박종인 기자
복수의 불꽃, 반(反)근대 ‘역률 추시’
1894년 4월 13일 김옥균 시신을 태운 청나라 군함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자객 홍종우는 김옥균 관을 작은 배에 싣고 한성 남쪽 양화진에 도착했다. 시신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내각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고종실록’은 이 시신을 살점을 도려내는 ‘능지형’ 방식으로 부관참시하자고 내각이 연명상소했다고 기록했다.(1894년 음3월 9일 ‘고종실록’) 이 가운데는 훗날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김홍집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주재 외교관들 정보에 따르면 ‘민씨 일파는 강력하게 부관참시를 요구했고’ ‘이에 김홍집 등 개화파는 극구 반대했다’.(’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 보고서)’, 서울대 독일학연구소 역, 신원문화사, 1992, p152)
이 소식을 접한 각국 외교관들이 14일 일본공사관에서 회합했다. 이들은 고종 정부에 시신 훼손 불가 조언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들 의견을 취합한 때는 이미 조선 정부가 시신 훼손을 결정한 뒤였다. 조선 정부는 시신 도착 하루 만인 그날 밤 오후 9시 양화진으로 형 집행인들을 보내 김옥균 시신을 조각 내 버렸다.(국사편찬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 3-1-(10) 김옥균의 유해와 홍종우의 한국 도착 및 김옥균의 유해 처분의 건)
시신은 ‘지루한 톱질 끝에 머리가 잘려나갔고, 오른손은 관절이, 왼손은 관절과 팔꿈치 중간에서 절단됐다. 발은 도끼로 잘려나갔다. 등은 7인치 길이에 1인치 깊이로 세 군데 칼집이 났다. 손과 발과 머리는 삼발이에 내걸렸고 나머지 몸과 팔 다리는 땅바닥에 그냥 버려졌다. 집행 완료까지 이틀 걸렸다.’(앞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 보고서’, pp.152~153)
김옥균 시신 처리 방식은 1759년 영조가 ‘역적이 죽고 나서 반역죄를 소급 적용한 처벌은 금지’라고 한 ‘역률 추시 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파괴한 형 집행이었다.(1759년 음8월 19일 ‘영조실록’) 영조가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리라”고 경고한 뒤 법전에 명시한 금지 원칙이다.
영조가 세운 원칙을 135년 만에 처음으로 어긴 지도자가 이 고종이다. 1884년 거리에서 죽은 갑신정변 주역 홍영식 시신을 훼손하고 두 번째 위반 사례였다.“(1884년 음11월 26일 ‘승정원일기’) 김옥균 시신을 토막 내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894년 5월 31일 고종이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했다. 그리고 김옥균 처형 소감을 만방에 밝혔다. “반역죄는 절차를 따지지 않고 바로 처단하는 법이다. 죽었다고 하여 그 요망한 허리와 머리를 그냥 놔둬서는 아니되느니라.”(1894년 음4월 27일 ‘고종실록’) 근대로 향하는 절체절명의 갈림길에서 고종은 왕국 법치(法治)를 택하는 대신 스스로 통쾌한 반(反)근대적 복수를 택하고야 말았다.
또 다른 반근대 형벌, 연좌 처형
김옥균 시신이 산산조각 나고 한 달 나흘이 지난 5월 19일, 전형적이되 잔혹한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의금부에서 김옥균 친아버지 김병태를 처형하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천안에 살면서 권력과 무관하게 지냈던 김병태는 갑신정변 한 달 뒤인 1885년 1월 6일 체포돼 10년째 천안옥사에 수감 중이었다. 김옥균이 암살된 1894년 김병태 나이는 73세였다. 의금부는 “규례대로 의금부 도사를 파견해 연좌하여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알았다”고 전교했다.(1894년 음4월 15일 ‘승정원일기’) 혁명가 아들을 둔 탓에, 일흔을 넘긴 노인은 그렇게 목이 매달려 죽었다.
연좌 처벌. 이 또한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선포한 ‘노적(孥籍) 추시 금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 처분이었다. 고종보다 100년 이상 앞선 봉건군주들이 세운 원칙을 근대를 코앞에 둔 지도자가 깨뜨리는, 이 기이하고 허망한 역류(逆流).
1912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김옥균 양자인 아산군수 김영진이 일본 도교 아오야마 공동묘지에서 아버지 묘를 발견한 경위, 12월 3일 그 머리카락을 가져와 아산에 이장할 때 풍경이 기록돼 있다./국립중앙박물관
1912년, 돌아온 김옥균과 딸을 얻은 고종
1894년 12월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치르던 일본 장교가 충북 옥천에서 김옥균 아내와 딸을 발견했다. 갑오개혁정부가 출범한 이후라 이들은 연좌 처형이나 노비 전락을 면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5, 6-(14) 박영효 복작과 갑신죄범사면 및 김옥균의 처·딸 발견의 건)
그리고 나라가 사라지고 1912년 11월 당시 아산군수였던 김옥균 양자 김영진이 일본 도쿄에서 부친 시신 일부가 매장된 김옥균 묘를 발견했다. 양화진 참사를 지켜보던 일본인 친구들이 유해 일부를 빼돌려 일본에 묻은 것이다. 김영진은 그 일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3일 충남 아산에서 성대한 이장식이 열렸다. 살아 있는 정변 동지들과 일본 편으로 돌아선 고관대작들이 모두 참석했다.(1912년 12월 6일 ‘매일신보’)
‘덕수궁 찬시실일기’에 따르면 하늘이 맑던 12월 3일 화요일 덕수궁에 있던 고종은 새벽 2시 아들 순종이 사는 창덕궁에 전화를 건 뒤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10시 25분 기상한 고종은 차를 마시고 주치의로부터 건강을 체크받았다. 이어 왕실 위패를 모신 각 전각 담당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오후 1시 5분 점심을 먹었다. 각종 보고를 받은 고종은 오후 7시 10분 저녁을 먹었다. 그해 5월 25일 고종에게는 막내딸이 태어났다. 한 해 전인 1911년 7월 20일 엄비가 죽고 고종이 가까이 했던 궁녀 양씨가 임신한 딸이었다. 다른 때도 아닌 엄비 상중에 잉태된 딸이다. 아이가 잉태됐을 때 고종은 쉰아홉, 훗날 복녕당 당호를 받은 양씨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름은 아직 짓기 전이라 그저 ‘아기씨’라 불렸던 이 여자아이는 훗날 덕혜라는 이름을 얻었다.(이상 ‘덕수궁 찬시실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너무나도 끔찍한 방식으로 근대를 팽개친 망국의 군주 일상 같은가. 시중을 받으며 제사를 챙기고 식사를 하고 자식을 챙기는 평이한 일상 아닌가.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에게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편안한 일상’(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331)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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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삭
2023.03.22 06:33:51
고종의 무능함은 문가놈과 막상막하 // 정적의 제거에도 비슷한면 보여주네 // 문가놈 전직대통령 두명이나 감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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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07:57:05
고종이 무능하면 조선백성이 몰아내고 // 이성계의 개국정신 이어받아 새조선을 // 건국하면 그뿐인데 일본놈이 침략하여 // 내선일체 황국신민 주인행세 웬말인가?
돈조반니
2023.03.22 06:48:35
제국 시대에 저런 쓰레기 같은 조선을 청나라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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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08:00:01
청나라가 조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일본이 청나라를 몰아낸 것이다. 즉 강도가 먼저 들어온 강도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그집을 차지한 것이다.
尙德
2023.03.22 06:31:55
기사에 나온 김옥균선생 유허지(생가터)의 주소는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입니다. 천안-논산 고속도로 정안ic에서 나오면 바로입니다. 인근에 유명한 "한일고등학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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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kred
2023.03.22 07:02:41
이래놓고 일본을 욕하다니. 조선이 그대로 였으면 지금 딱 북한이라고 보면된다. 망해야될 나라가 망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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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08:03:07
당신같이 생각하라고 박종인이 쓴 글이다.
사실과자유
2023.03.22 07:17:05
역사는 1884년 개화파 김옥균의 생각과 행동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젠 역사에서 고종과 민비 그리고 대원군을 파묘해서 부관참시할 때이다. 이씨조선이 흥망성쇠를 무조건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사실에 의해 역사를 바로 쓰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나라와 백성을 돈 받고 팔아 먹은 매국노 몸퉁은 고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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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자유
2023.03.22 08:34:28
김옥균은 일본에서 근대문명과 개화를 배워 조선에 심으려 했던 친일개화파. 친중이나 친러 개화파란 말은 없었다. 이웃 일본이 먼저 서구 문명을 받아 들여 개화를 했다. 개화에 실패한 고종도 이리 저리 눈치만 보다가 결국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 혁명가 김옥균은 조선말기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던 선각자였다.
처용
2023.03.22 07:59:52
반일을 외치는 류들이 할소리는 아닌듯 김 옥균은 뼈속까지 친일을찬양 하려던 속물
사실과자유
2023.03.22 07:22:35
대한민국에서 김옥균을 명예회복 시키고 원혼을 풀어 주자.
비비남
2023.03.22 07:28:11
훗날 문가는 역사의 평가를 어떻게 받를지 궁금하다. 무능하고 자기편 지지율에만 신경쓴 고종보다 더 못한 자로 평가가 이루질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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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잎사랑
2023.03.22 07:08:05
저런 뻘 짓을 해댔으니 나라를 일본에 뺐기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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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블루
2023.03.22 08:10:52
이씨조선 오백년을 통털어 무능과 머저리의 끝판왕 고종이다..제 한몸 살자고,제 손아귀 권력을 지키자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상징이 그가 아닌가?군주라는 자의 정신상태가 저정도 일진대 그밑에 빌붙어있는 신하라는 자들이야 말해무엇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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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wal
2023.03.22 08:04:38
고종의 입장에서 일본에 국권을 넘기는 것은 조공국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바뀌는 것 말고는 변화가 없었다. 일본이 자신과 왕실의 안위를 보장한다면 이빨빠진 호랑이 청나라보다 일본이 더 믿음직 스러웠겠지. 세계사의 흐름에도 관심 없었고 그저 등따숩고 배부르면 그만 이었던 선조, 인조, 고종 셋은 한민족 역사의 치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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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1992
2023.03.22 09:06:21
일본당이라는 개화당의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당연히?? 친일파는 무참하게 척살된다.. 한마디로 일본을 잘알고 일본을 공부했던 이들은 도륙이 난거다..이들은 일본이 개화를 통해 발전하는 모습을보고 방향을 개화로 잡은거다.. 그러나 무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몸에 굳어진 봉건제에 결국 일본식민지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지금의 반일 혐오 ..친일은 매국노라는 논리와 하나 틀리지않다.. 역사는 돌고돈다는 말이 무섭도록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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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2198
2023.03.22 10:23:13
극 공감합니다.
Jose jjang
2023.03.22 08:00:10
조선 놈들이 착한 민족? 역사를 봐라! 지구 최고의 잔인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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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거리
2023.03.22 08:41:07
나라는 팔아 먹었지만 발기력은 못 팔아 먹었나보다. 스트레스가 많으면 안된다던데 나라 팔아 먹고도 힘찬 국왕의 발기력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보통 개들이 시도때도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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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회
2023.03.22 08:35:29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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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1992
2023.03.22 08:48:59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한국판 메이지유신이다.. 갑신정변은 봉건제 타파와 개화를 통해 나라의 근간을 뒤바꾸자는 혁명이었으나 애석하게 3알천하로 끝난다.. 실패이유는 당시 여론의 반발이다.. 개화당은 일본당이라 부를 정도로 국민들의 반감은 심했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건 역적이라해서 실패했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국민들은 일제 식민지가 되어 핍박과 자유를 뺏기게 된다.. 과거를 잊지 말자면서 구한말의 구태를 반복하는게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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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2198
2023.03.22 10:25:01
공감합니다.
Robert Lee
2023.03.22 09:13:31
이성계 반란세력에 의해 세워진 조선이라는 국가는 폐쇄적이고 비현실적인 유교로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며 전쟁나면 왕만 살겠다고 도망하는 오직 이씨 조선 정권만을 위해 존재했던 조선왕조 500년은 북한의 김정은 정권과 다를바가 없는 왕조였습니다. 그에 반해 고려는 상공업과 국제무역을 장려하고 여성의 인권도 발전하였으며, 고리대금 사채업의 법정 최고 이자도 10%이하였으며 국가가 개인에게 걷을 수 있는 최대 세금도 10% 이하였기 때문에 국가 경제와 국제 무역이 발전하였습니다. 한국도 고려의 정부처럼 개인과 회사에 부과하는 세금의 전체 최대 한도를 10%이하로 해야 자유로운 시장 경제가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몰락한 조선왕조의 경제처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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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련
2023.03.22 09:48:07
세금이 낮으면 잉여자금으로 투자가 민간을 통해 만들어지고 그만큼 경제가 성장해서 세금이더 많이 들어오죠. 공산당처럼 모든 돈을 정부가 걷어 투자를 독점하면 관료주의적 비효율에 사회적생산성이 낙후되고 퇴보하죠.
국민
2023.03.22 09:41:07
세금이 낮으면 사회 인프라는 누가 무슨 돈으로 만들까...??? 생각 좀 하고 살자~~~!!!
sona
2023.03.22 09:02:44
북에 핵개발 자금을 퍼준 놈도 부관참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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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2198
2023.03.22 10:31:12
할 거예요. 내가 집권하면..우선 산 놈부터..박지원 문재인 이재명을 처단하고 그 다음 다이조 무현이 파묘.북에 돈 준놈들.
사상마련
2023.03.22 09:44:20
고종같은 쓰레기들이 집권하면 나라는 반드시 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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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N.Y
2023.03.22 10:16:46
저런 뭉가넘 버금가는 무능한 고종이란 넘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고 망하게 했으니 이넘을 부관참시하는게 타당한가? 꼴에 남자라고 민비시해되고 아관파천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궁녀하고 그짓해서 새끼를 낳지 않나 꼭 JM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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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련
2023.03.22 09:50:48
고종 그놈이 나라를 팔았는데 왜 을사오적을 만들어 죄를 뒤집어 씌우나? ㅋㅋㅋ 그들이 조선의 왕인가? 조선은 왕조국가 아니였는가? 이게 왕의 죄를 신하가 대신 받는 유교학인가? 강아지가 웃을 일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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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2023.03.22 09:39:48
조선의 역사 중 가장 무능함이 차고 넘치는 조선 패망의 원흉이 고종 임금 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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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1992
2023.03.22 08:57:52
민들레님??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1884년..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은 1895년 입니다..아무리 100자평이라지만 기본적 역사는 모르시면 확인이라도 하시고 올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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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overse
2023.03.22 10:04:09
영조의 저주대로 결국 나라가 망했군. 아무리 남의 말을 안 듣는 자라 해도 선조(先祖)의 말은 들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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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2023.03.22 09:49:30
나라를 망하게 만든 군주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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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랑
2023.03.22 10:00:04
무능하고 부해한 조선의 권력자들을 욕해야지 왜 일본을 욕합니까? 그때는 제국주의 시대라 일본이 아니었으면 다른 나라가 조선을 먹었겠죠. 조선은 그당시 국가도 아니니까요. 차라리 일본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만들어 준것이죠. 그 조선이 좋다고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고 3대까지 세습하면서 지금도 무지막지하게 백성을 탄압하고 정적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을 죽이고 그런나라를 좋아하는 종북좌파들이 있는한 대한민국의 앞날은 암담할 뿐입니다. 제발 정신 차리고 앞으로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다함께 나가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 정신 차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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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ball
2023.03.22 10:51:39
생각이 없는 지도자 하니 문 모씨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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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07:48:28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조선을 개혁하려다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구한말의 역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종의 입장에서는 역적에 불과했다. 또한 고종이 무능하여 망국의 군주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매국노는 아니다. 을사조약과 합방이라고 표현한 자가 매국노다. 일본의 병탄후 고종이 안온한 일상을 즐겼다며 비난하지만 고종만 일본에 의해 대접받고 이용당한 것이 아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는 일본에게 대접받는 정도가 아니라 만주국황제로 추대되어 괴뢰정부를 이끄는 친일까지 하였다. 동양의 왕조말기에 각종 개혁이 우리만 실패한 것도 아니며 중국도 양무운동, 일본을 모델로 한 변법자강운동도 다 실패했다. 중국은 나라가 워낙 커서 망국은 면한 것이고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식민지배를 당한 것이다. 박종인기자를 포함한 뉴라이트계열은 줄기차게 고종을 매국노로 격상시켜 일본 식민지배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려고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고종은 일본에 의해 망한 나라의 최대피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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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10:54:20
우리의 적은 북괴와 독재자.
tx2198
2023.03.22 10:41:26
가짜우파씨가 오늘은 웬 일로 늬들의 적 봉건왕조 고종을 비호하나? 진보이념이라면 개화파 김옥균을 비호해야 하는 것 아니냐?
진정한 우파
2023.03.22 09:52:33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보다 더 처참했다.영국의 추악한 아편무역으로 인해 청의백성들은 아편중독으로 쓰러졌으며 태평천국운동으로 또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죽음으로 내몰렸고, 아편전쟁, 2차아편전쟁, 청일전쟁, 청불전쟁 등등으로 얼마나 많은 청의 백성들이 학살되었겠는가? 그러니 청은 푸이를 마지막황제로 신해혁명으로 망했다. 그위에 중화민국이 건립되었다. 우리 조선도 이런 과정으로 전개되었어야 정상적인 역사였으나 자체적인 혁명이 아닌 일본에 의해 망했다. 즉 조선말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조는 새로운 공화제로 대체되어야 마땅함에도 일본의 침략으로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종은 무능하고 부패하였다하나 매국노가 아니라 망국의 군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마치 마지막황제 푸이를 매국노라 하지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신우파로 자칭하는 자들은 고종을 매국노로 격상하여 일본의 식민지배가 불가피했다는 매국적인 이론을 설파하며 그 결과 독립운동은 폄하하고 일본의 근대적 공헌만 강조하게 될 것이다.
박종인
2023.03.22 08:22:25
허 참. 고종이?
전복10
2023.03.22 10:49:05
역사의 아이러니? 망할만한 조선이 망했다해도 좌파은 개거품을 문다. 그럼 뭐냐?? 일본이 없었더라면 조선이 식민지가 안되고 부국 강병해 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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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11:01:38
일본만 아니었으면 자주적인 근대화가 되었고 분단도 되지 않았다. 일본의 해악은 이루 열거할 수조차 없다.
강력통치
2023.03.22 10:42:06
김옥균이는 운이 안 좋아 수구파 자객 홍종우한테 피살당해 시신이 능지처참 당했고 이완용은 조선 왕실 말 잘 들어 지금에 와서 매국노라는 오명을 대신 뒤집어쓰고 있다. 고종, 순종, 민비 그 누구도 욕하거나 비난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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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파
2023.03.22 10:59:13
누구나 비난해, 다만 매국노는 아니다. 일본을 등에 엎어다고 김옥균을 매국노라고 하지않는 것처럼.
메깨비
2023.03.22 10:31:06
당시에야 두루세상을살펴볼줄 암이 너무도 부족했기네 그리고 기득권구세력들의 쩔은구습에 지들밥그릇이라도 날라갈까 개혁파 저니들에 생각을 알수가없었던 지금에보면 참으로 무식하기 짝이없던일이였던 그때만하였어두늦었다할판에 .. 후의 모든 결과는 당연지사라 아니할수없었던겄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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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2023.03.22 10:25:23
고종과 민비가 나라를 일본에 판 실재 주인공이다 뭐 이런것들을 명성황후, 고종황제라 부르는 얼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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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나라
2023.03.22 09:57:25
고종 재위기간 45년, 박정희 18년 통치 똑같은 모습 당시 세계 최빈국 조선과 대한민국. . 그러나 역사는 달라졌다! 지도자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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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ng1
2023.03.22 09:46:27
고종의 정적제거의 집요함이 윤석열이 이재명을 특수검사 70명으로 322회압수수색하는것을 배?m나봅니다// 나라꼴이 100년전 무능한통치자를 따라망하다니 이게 나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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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2198
2023.03.22 10:44:13
에그..언제 철 들까.ㅉ
민들레
2023.03.22 08:47:42
고종 입장에서도 이해를 해야지,, 마누라는 자객에 베여 화형에 처해지고, 자신은 여기저기 도망치면서 근대를 맞이했는데, 제정신이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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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2198
2023.03.22 10:45:35
뭘 이해 해. 그 거 다 무능해서 자초한건데..
처용
2023.03.22 07:57:28
김 옥균을 찬양 하는 게냐? 왜놈에게 빌붙어 왜놈의 모델로 개혁하여 갔다면 왜놈의; 속국이 되었겠지 바로 친일 왜국이 아닌가?군주가 무능하면 군주를 개혁의 주동자로 만드는 것도 신하의 도리가 아니더냐? 고종을 무능으로 내몬자가 누구였나? 친일파라고 욕하던 놈들이 찬양 하던 천하의 패륜민비가 아니더냐?문재인의 무능을 등에 엎고 친북 친중을찬양 하던 세력과 무엇이 다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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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2198
2023.03.22 10:52:00
김옥균의 사상이야말로 진보다. 지금 사이비 진보하고는 동기 부터가 다르다.진정한 보수는 돌덩이처럼 딱딱한 보수가 아니라 기름처럼 유연하게 사고하는 보수가 합리적보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