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5. 08
2016년 미 공군이 차세대 전략폭격기 B-21의 별칭을 공모했다. 2000건이 넘는 제안 중 최종 선택된 명칭은 ‘레이더(Raider·침입자)’. 진주만 피습 직후 기습적 도쿄 공습을 수행한 폭격기 부대 ‘두리틀 레이더’에서 따온 것이다. 미 공군장관은 이 별칭을 직접 발표하면서 “'레이더'는 용맹한 미 공군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러자 일본 누리꾼들 사이에선 “우리 전투기 별칭은 (진주만을 공습한) ‘제로센’으로 하자”는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 세계 각국 군대의 항공기나 무기에는 대부분 별칭이 붙어 있다. 현존 세계 최강 전투기인 F-22는 '랩터(육식 공룡)', F-16은 '파이팅 팰컨(매)'이다. F-2 '밴시(여자 유령)'는 적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한 작명이다. 창처럼 날카롭게 생긴 B-1B 폭격기는 '랜서(창기병)'다. 미군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수중 발사라는 특징을 살려 포세이돈의 삼지창인 '트라이던트'가 애칭으로 붙었다.
▶ 지금 우리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F-15K는 '슬램 이글(Slam Eagle)'로 불린다. '전승(全勝)의 독수리'라는 설명도 덧붙었다. 공군은 2005년 F-15K를 도입하면서 각계 인사 1200여 명을 초청해 대대적인 명명식 행사를 열었다. 국방 장관이 슬램이글에 탑승해 '엄지 척'을 하며 "국군 장병과 국민 모두의 자랑이자 기쁨"이라고 했다.
▶ 그런데 군이 작년에 도입한 스텔스 전투기 F-35A는 대접이 딴판이다. 공군은 지난해 12월 F-35A에 '프리덤 나이트(Freedom Knight·자유의 기사)'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이를 반년 가까이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엊그제 언론 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군 간부가 이 별칭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을 기자들이 우연히 발견해 문의하자 군이 그제서야 시인했다고 한다. F-35A는 별칭뿐만이 아니라 도입부터 전력화까지 모든 행사가 비공개나 축소돼 진행되고 있다.
▶ F-35A는 북의 레이더망을 피해 평양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다. 대북(對北)만이 아니라 정글과 같은 동북아에서 우리를 지킬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부가 김정은의 눈치를 보다 보니 군도 북을 자극할까 F-35를 감추기에 급급해 한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담은 좋은 이름을 지어놓고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한다. 이 정부에선 ‘프리덤(자유)’이라는 말 자체가 기피 대상이기도 하다. 공군이 ‘누가 그렇게 눈치 없게 작명했냐’는 타박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임민혁 논설위원 lmhcool@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