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는 젊음의 상징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정의감이나 거룩한 분노는 사라지고 안일과 편안을 쫓는 타협과 몸사림만 남게 된다. 젊은이들에게는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고 늙은이들에게는 거룩한 분노를 유지할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젊은이의 분노가 과격한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분노에 머무른다면 건강한 젊은 시절을 보내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정의감은 사라지고 세상의 눈치만 살피게 된다. 안락과 편리만 쫓게 되고 세상의 불의에는 눈을 감는다. 하지만 늙어서도 여전히 거룩한 분노를 유지한다면 그 사람은 경건한 두려움과 정의감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사울도 한때는 거룩한 분노가 있었다.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용기와 파이팅 넘치는 결기가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주목을 받고 난 다음에 그를 비웃고 비난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간의 비난과 염려를 한순간에 걷어낸 사건이 있었는데 암몬의 이스라엘 침입이었다.
(삼상 11:1)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삼상 11: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국가적 조직체가 아니라 지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처지인지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야베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전령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전역에 알렸다. 그리고 그 소식은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도 전해졌다.
(삼상 11:4)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어려운 소식이 전해지고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하면 불평하고 울면서 한숨만 짓거나 어쩔 줄 몰라서 넋을 놓고 있는 사람이 있고 팔을 걷어붙이고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다윗은 골리앗이 날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전쟁터에 나가서 그 치욕스러운 말을 듣고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다. 그에게는 거룩한 의분이 있었다. 그런 치욕을 듣느니 싸우다가 죽더라도 그의 주둥이를 찢어 놓고 말겠다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끽소리도 못 하고 자신들의 몸만 사리고 있었다. 어쩌면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장형 엘리압의 말처럼 전쟁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윗은 전쟁을 우습게 여기거나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다윗은 나아가 거룩한 분노로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사울도 이와 같은 거룩한 분노가 젊었을 때는 있었다.
(삼상 11:5)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삼상 11: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사울은 한 마리 소를 잡아서 각을 뜨고 이스라엘 온 지방으로 보내어 군대를 소집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한 암몬 군대를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력을 확실히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열정, 그런 거룩한 분노가 늙어서도 식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몸이 늙어 가더라도 우리 마음만큼은 약해지지 않는 날마다 새로운 마음이라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식지 않을 열정을 주십시오. 세상의 불의 앞에 주눅 들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거룩한 분노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젊은 마음 우리에게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지역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내는 거룩한 파수꾼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