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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To Understanding Each Other)
-폴 트루니에-
역자 서문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인격적인 대화와 더불어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필수 요인이다. 20c의 기독교가 가장 사랑한 상담가라 불리는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는 의학과 심리학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스위스 내과 의사이다. 또한 전 인격적인 인간 이해에 근거해 수많은 인격을 치료한 심리치료사(psychotherapist)이며, 성경과 과학이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기독교 심리학을 보급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 책을 마음을 열고 읽는다면, ‘대화 상담(dialogue counseling)의 창시자’ 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변화된 모습의 당신은 함께 하는 이성 친구, 남편 또는 아내와 전혀 다른 차원Viewer의 관계를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1.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 이해를 추구하는 마음, 이해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이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부부간의 대화는 물론이고, 국가간의 대화를 포함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것은 대개가 귀머거리들의 대화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생각을 제시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하여 말한다. 상대방을 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서로의 관점을 주고받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결혼 상담’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부부나, 손찌검까지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싸움에 휘말리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밖에도 얼마든지 다른 사례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부가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해서 어느 정도나 이해를 하는 지에 따라 차이는 크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깨닫지 못한 채 심지어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여러 해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신혼부부들은 대부분 높은 이상을 품고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십수년이 지난 후에 그들의 가정생활이 자기들이 기대하던 것처럼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부가 몇이나 되겠는가? 거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며,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탓하고 비난하는 본능적인 성향이 있다. 상대방이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적인 결함을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전혀 무익하다. 이것은 결혼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악의와 원한 감정, 내적인 반감, 그리고 판에 박은 상호 비방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인격이나, 좋지 못한 건강, 성격적 결함, 가정교육, 또는 상대방이 자라난 전혀 다른 환경의 영향들을 탓하는 경향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와 같은 문제는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배우자를 제대로 선택하도록 잘 지도해야 한다. 어느 정도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결혼의 성공과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 가능성이 피차의 성장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 하는 Viewer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결혼은 우리가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Lucien Bovet) 따라서 정말로 좋은 것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얻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애써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많은 부부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의 배후에는 서로에게 완전히 솔직해지지 못하는, 상호 개방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서로에게 성실하고 완전하게 개방성이 없는 한, 서로를 향한 진정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언제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가 있는 부부는 틀림없이 수많은 갈등을 경험하겠지만, 그들은 더욱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 진정한 감정의 일부와, 그들의 생각과 확신 그리고 개인적인 반응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부부들이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진정한 상호 이해에 이르는데 가장 중요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 문제들을 옆으로 제쳐 놓는다. 이렇게 해서 언제나 투명한 유리알 같아야 할 부부 관계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결혼을 위해 예비하신 온전한 하나됨의 법칙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결혼 제도를 만드시면서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을 이룰 찌로다”(창2:24, 엡5:31) 라고 선언하셨다. 한 몸이 된다는 것Viewer은, 분명 서로에게 비밀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다. 부부가 서로에게 문제를 숨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결혼 생활의 기본이 되는 하나됨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실패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설사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 해도, 아니면 그 비밀이 아주 좋은 내용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새로 시작하려 할 수도 있으며 화해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재생(rebirth)의 길은 언제나 좀 더 깊고 어려운 상호 정직성을 전제로 열리게 되는 것이다.
연애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많은 부부에게 고통에 가까운 일이다. 그 당시에도 거의 모든 부부가, 서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가 마음을 활짝 열고 대화를 했고, 여자는 남자 친구로부터 이해 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서로간에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한 지 오래다. 부차적인 문제들, 사소하고 외적인 문제들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만, 참으로 본질적이며 친밀하고 개인적인 문제들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대화는 단절되어 버렸고, 피상적으로 정보만 교환할 뿐이다.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심각한 고민거리를 하소연하러 왔던 여인이 있었다. 면담이 끝날 무렵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당신의 남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 제 남편은 신비에 싸인 섬이에요” 그녀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저는 끊임없이 그 주위를 맴돌고 있지만, 상륙할 수 있는 해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비스러운 섬과 같은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떠한 접근에도 몸을 사리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들은 더 이상 마음을 터놓지 않으며, 어떠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도 않는다. 아내가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하면 신문 뒤로 숨어 버린다. 그들은 깊이 몰두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위를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비인격적이고 무관심하며 모호한 어조로 대답하여 논쟁의 여지를 없앤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농담거리로 삼아 버림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피해간다.
2.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상대방을 위한 첫째 조건이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라면, 둘째 조건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병이 날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결혼 생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친구, 형제와 자매, 친척들과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을 표현할 필요성이 가장 큰 영역은 바로 배우자와의 관계이다. 남편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아내가 병이 들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Viewer 그저 아내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남편들이 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지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따뜻하고, 친절하게 받아주고, 주의 깊게 경청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인격적인 관계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을 열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짧은 시간 동안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만남과 행복한 결혼은 여러 시간 공을 들여 함께 다가감으로써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쾌활하고 사교성이 있는 일부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피상적인 개방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깊은 생각과 감정이 숨어 있는데, 이는 수줍음을 타는 내성적인 사람들이 침묵으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진정으로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밀한 생각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데,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남편들과 아내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자존심이 더 강하기 때문에,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가 어렵다. 이 점이 남자와 여자 차이 가운데 하나다. 여자는 두려움을 탁 터놓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들은 두려운 마음을 숨긴다. 예컨대, 남자는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두려움을 숨기려 할 것이다. 그는 거칠고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아내의 말을 중단시키고, 자기가 두려워하는 대화를 끝낸다. 그렇지 않으면, 거창하고, 지적이며, 과학적인 설명을 늘어놓아 자신의 책임을 피해간다. 그는 항상 자기가 이야기를 끝맺기를 원하며,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면서 반박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숨긴다. 아니면 화를 내거나 집요하게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첫째는, 판단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즉,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내나, 가장 절친한 친구,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판적 판단이다. 이는 그들의 칭찬과 사랑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은 결국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며, 설득력 있는 이유로 우리를 책망할 수 있는 이들도 그들이 아닌가? 그토록 많은 부부들이 숨바꼭질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대화가 더욱 진실해지면, 가장 민감한 상처, 곧 가장 가까운 배우자로부터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지는 상처가 드러날 까봐 두려운 것이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판단하는 데는 빠르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종의 잔인한 악순환으로, 하나의 판단은 또 다른 판단에 반응한다. 자기의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아니면, 큰 소리로 상대방의 약점을 비난하는 것이다. 자신의 배우자가 자기와 매우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은 “나는 내 남편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이 나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남편은 판단 받고, 정죄 당하고, 비판 받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스스로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단점에 대한 비난에 대해 민감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칠 수 없었던 결점일 때, 우리는 그런 지적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두 번째 두려움은, 충고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민감하다. 흔히 남자들은 이를 숨기지만, 그들은 여자 못지않게 쉽게 상처를 받는다. Viewer남자들은 비판 받는 것 못지않게 충고로 인해 마음에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비판 받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조언과 충고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어떤 문제든, 모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내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남편에게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여자는 자기가 남편을 무능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이를 참아내는 남편은 없다. 아내는 그저 남편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해주고,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다.
거꾸로, 자기의 비밀스러운 문제를 터놓았을 때 너무 쉽게 대답해 주는 남편을 둔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 남편의 충고는, 아내가 그로부터 오해 받았다는 느낌과, 심지어는 남편이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일상적인 보복에 대해 더욱 더 민감해지고, 아내는 더 이상 남편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함으로 마음의 부담을 덜 수가 없게 된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답하는 대신 귀를 가져야 한다. 오래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들어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도록 도와주려면, 그는 자기의 경험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도록 가급적 몇 가지만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그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특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보다 우리가 더 잘 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를 움츠러들게 하는 일이다. 너무 지나치게 비판해도 같은 결과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내적인 감수성이 참으로 여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가 그 사실을 보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말하는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은 이미 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이미지는 언제나 어느 정도 거짓된 것이며, 또 어느 정도는 그가 말하는 내용의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다. 그래서 어떤 환자를 장기 치료할 경우에는, 그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속마음을 나누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말라붙게 만들어 버리는 때가 온다. 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오해에 대한 두려움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마치 우리를 처음 만나는 것처럼 안심하고, 다시 마음을 열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에게 품어 온 이미Viewer지를 떨쳐 버려야 한다.
이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똑같이 적용된다. 각자는 상대방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부분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그것은 너무나 경직되고 가상적인 시각이요, 상대방으로부터 강요받은 생각이며, 일종의 첨삭된 진단이라 할 수 있다. 오진의 가장 흔한 사실이 의사의 과신(過信)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환자에게 내린 진단에 얽매여서 그 증상에 대한 모든 다른 해석에 아주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아내가 자기에게 바뀔 수 없는 도덕적 진단을 내렸다고 느끼는 순간, 남편의 모든 참된 솔직성, 모든 깊은 표현은 말라붙어 버린다. 그럴 때 이 남편은 사무실이나 스포츠클럽에서 만나는 아가씨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남자는 이제 아내에게는 더 이상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아가씨에게 쉽게 터놓을 수 있다. 그러다가 그는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놀라운 감정, 곧 이해 받는 느낌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아가씨 없이는 못 살겠어요, 내 아내는 이해를 못하는 데 그 여자는 나를 이해해준단 말입니다”. 비극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4.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사랑과 이해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둘은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 한 쪽이 시작되고 어디서 다른 한 쪽이 끝나는지, 또는 둘 중에 어느 쪽이 원인이며 결과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해하며, 이해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이해 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 받는다고 느끼며,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확실히 이해 받는다고 느낀다.
감정이 서려있는 내면의 비밀을 나누기 위해서는 아주 깊이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사랑 받는 것이 확실한 분위기에서는 언젠가 일어났던 경험을 나눌 수도 있고, 자기 삶에 하나님이 신비스럽게 개입하셨던 것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또한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꿈같은 이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아니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완수해야 할 사명, 즉 내면의 소명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우리를 압도하는 경험으로 아주 드문 일이다. 수만 가지의 두려움이 우리를 견제한다. 우선 마음의 균형을 잃게 되지나 않을 까, 울음이 와락 터지면 어쩌나, 또 특히 이 기억이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대방이 못 느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힘들게 이야기를 했는데, 선입견을 가진 귀나 조롱하는 귀, 우리의 말의 중요성을 지각하지 못하는 귀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Viewer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부부가 서로 돕는 법을 실천할 때, 이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고, 얼마나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경험인지 모른다.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진지하게 대우받으며, 이해 받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 심리학이 이 사실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모든 심리 치료의 핵심에는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친화 관계가 있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듯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관계이다. 적어도 한 사람에게서도 이해 받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발전할 수 없고 충만한 삶을 발견할 수도 없다. 오해를 받으면, 자신감을 상실하고 삶에 대한 믿음,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상실할 수가 있다. 장애물에 봉착해 방해를 받고 퇴보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층 더 신비가 존재한다. 내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서나 일기를 쓰는, 홀로 있는 시간에 자신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대화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함으로써만 참으로 자기의 확신을 인식하게 된다. 자신을 명확하게 보고자 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편안하게 느끼는 의사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배우자일 수도 있다. Viewer
그런 점에서 결혼은 모험이다. 자신과 배우자를 지속적으로 발견해 가는 모험 말이다. 결혼은 매일 새로운 지평을 넓혀 가는 과정이 되며, 인생에 대하여, 인간 실존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배워 가는 기회가 된다. 성경 첫 부분에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은 사귐을 필요로 한다. 즉 짝을 필요로 하며, 다른 사람과의 진실된 만남을 필요로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결혼 제도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자기의 방식 속에 고착되어 버린다. 사람은 결혼 생활이 요구하는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늘 자신을 초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여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혼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감춘 두 사람이 단지 함께 사는 것으로 축소된다면, 그와 같은 생활은 때로 평화로울 수 있어도 완전히 목표를 빗나간 것이다. 이때는 결혼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남편도 아내도 실패한 것이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의 부르심에 실패한 것이다. 배우자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또한 성숙하는 일에, 그리고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것이기도 하다.
결혼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심리학자들은 결혼 생활의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 한다. 첫 번째는, 밀월단계이다Viewer. 이때 부부는 상대방을 쉽게,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잘 이해한다고 느낀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아직 밀월 단계에 있으며, 이때에는 자발적으로 서로 이해하고 완전한 일심동체라고 느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사춘기 개별화 시기에 자신 속에 억압했던 것을 배우자에게서 발견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완전해졌다는 신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결혼 한지 5-10년 사이에 두 번째 단계가 찾아온다. 이 단계에서 각자는 상대방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결점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되어서 의견 충돌을 빚는다. 그러다가 의견 충돌의 위험,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줄이기 위해 자기 속으로 움츠러들고자 하는 유혹이 찾아온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의 시작이다. 이 단계는 이전 단계가 어느 방향으로 나갔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첫 번째 할 수 있는 방법은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하거나, 해결의 실마리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끝없는 싸움을 지속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본디 개성은 죽이고 한 쪽 배우자가 상대방에게 항복함으로써 형식적인 합의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도끼 자루를 휘둘러서 저열한 합의를 끌어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상대방으로부터 멀어지고, 자기만의 삶을 꾸리며 점점 더 비밀스러운 삶을 추구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두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용기 있게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는 것이며, 배우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진실한 노력이다.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장점보다는 서로의 문제점을 수용하고, 사랑함으로써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저 서로를 이해해줌으로써, 서로가 이린 시절에 상실했고, 지금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해해줌으로써, 그리고 그 부족을 채워주려고 노력함으로써 도와줄 수 있다. 그 문제들을 함께 붙들고 씨름하여 자신과 배우자를 좀 더 통찰력 있게 이해함으로써 공동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다. 즉, 결혼을 성공으로 이끈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함께 붙들고 씨름해서 극복해 낸 사람들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성격과 취미, 습관, 편견, 그리고 확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우리 두 사람을 더 성장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인격이 완전히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직면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일 때는 더욱 그렇다. 배우자가 다른 취미, 다른 감정, 다른 희망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도전이나, 반항이며, 공격이요, 거절이라고 반응한다. 우리는 부모들이 사춘기 자녀들에게서 그들이 매우 경멸하는 성향이나 버릇을 Viewer발견할 때 이와 똑같이 반응하는 것을 본다. 자기 배우자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이것은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아주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5.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차이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둘은 상대방의 필요를 무시하고, 특히 그것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남편의 우표 수집이나, 아내의 유화 그리기 같은 취미를 하찮게 취급하면서 이러한 필요들을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를 가벼이 여기면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된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을 보완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혹은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서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의 여러 가지 목적 중 하나이다.
6.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녀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격 유형의 차이점 외에 우리는 남녀의 차이점도 생각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성장하기 위해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남자는 여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여자도 남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는 상대방의 관심사에 관심을 가지며, 왜 그것이 배우자의 흥미를 끄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남자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관심사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게 하려면 그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두 사람 모두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넓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언제나 자아를 뛰어 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를 초월할 때, 가정은 자기 일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일은 가정의 영적 생활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많은 부부들이 겪는 갈등은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구별 짓는 심각한 차이점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바로 그 것, 즉, 사랑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
7.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 자체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 번은 어느 심리학자가 결혼 생활을 연극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여자에게 사랑은 연극 그 자체이지만, 남자에게 사랑은 막간이다”. 나는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남자에게 사랑은 성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속도와 욕망을 지닌 그리고 빨리 끝내 버리는 강한 충동이다. 여자에게는 사랑이 생활 전부를 이루고 있지만, 남자는 일을 위해 자신의 관심을 갖는다. 해결해야 할 기술적인 문제를 위해서, 직업상의 경쟁을 위해서 그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사랑?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사랑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차이가 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흔히 인식하지 못하는 정서적인 욕구가 있다. 애정 어린 부드러운 말을 듣고 싶고, 남편과 함께 외출하고 싶고, 무엇엔가 감탄할 때는 함께 흥분을 나누고 싶고, 절정의 순간에 정적 속에서 깊은 하나됨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영구적이며, 수준 높은 애정을 의미한다. 그녀가 남편이 항상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8. 서로를 돕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자기의 죄를 더 의식하는 편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음욕, 아내나 경쟁자에게 한 거짓 말, 소득세를 속여서 신고한 일,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아내보다 교회 가는 것을 더 내켜 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는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기의 신앙심을 과시하는 데서 약간 바리새적인 위선을 느낀다.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무엇이 옳지 않으며, 그가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남자들처럼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죄를 덜 의식하며 산다. 그리므로 남편은 실제적인 죄의식이라는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아Viewer내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이유는, 아내가 도덕적으로 더 고결해 보이기 때문인데, 아내 자신도 그렇게 여긴다. 아내의 눈에는 자신의 삶이 남편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이는데, 어떻게 남편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경멸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에게는 아내가 도덕법으로 똘똘 뭉친 경찰관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자는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여자에게로 마음을 열게 된다. 그녀는 아내보다도 훨씬 덜 존경스럽지만 함께 있으면 좀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함을 느끼는 여자다. 그녀는 그를 존경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며, 심지어 그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행동까지도 너그럽게 받아준다. 이것이 많은 간통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이때 남편이 스스로 정죄하는 길을 가도록 자신을 오랫동안 방임한 것은, 아내에게서 이해심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그의 죄책감과 퇴행적 반사 행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저 보편적인 질병, 곧 비밀의 짐을 지고, 두려움과 고통, 슬픔, 실망과 죄책감으로 두려워하는 저 무수히 많은 남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도 있고,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고, 운동권 선수 대회에서 우승할 수도 있고,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좀먹고 있는 것은, 마음을 털어 놓을 만큼 신뢰하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여러 해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9.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외모로 판단 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나 현재의 겉모습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속적인 사건이 누적된 결과이다. 분명 모든 사람은 범죄자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이다. 그들은 심리 치료사나 상담자를 찾을 수도 있다. 심리 치료사들은 그들을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왜 그들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거라고 그들은 확신한다. 물론 진짜로 아픈 사람에게는 정신 치료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치료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데, 그 이유는 비극적인 경험일수록 자기 발견을 저해하는 강력한 저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치료사가 인간의 모든 정서적 고통과 질병을 치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리 치료사가 지금보다 열 배나 더 늘어난다 하더라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목사와 신부가 이 필요를 다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심리 치료사가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정신 치료의 본질적인 요소는 경청이다. 그것Viewer은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넘어 감추어진 또는 멀리 있는 원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이 매일 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이 처음에는 조급하게, 단순화시켜서, 이력서를 쓰듯 자기의 내력을 말하는 것을 듣는다. 아직까지는 아주 도식화된 양식으로 내담자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말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에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모두 말하고 난 뒤에야 좀더 감정이 개입된 다른 기억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흔히 이런 것들은 겉으로 보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주의를 기울여 경청함으로 그를 격려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이야기를 털어 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조금씩 이러한 사건들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인상들이라든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는 부모와의 최초의 관계, 그리고 점차 그의 세계에 들어 온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회상한다. 현대 심리학은 우리가 최초로 한 경험들이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러한 경험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대부분 잊어 버렸다. 그런 사건들을 이야기함으로써 기억이 떠오르거나, 베일에 싸인 상징으로 그 기억들이 나타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큰 관심을 기울여 배우자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를 이해하겠다고 하Viewer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탐색이 이루어질 때, 결혼 생활에서 자신과 배우자에 대해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모험인가! 그 때에야 비로소 모든 젊은 부부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무슨 소망인가? 그들이 진정으로 도울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다. 그것은 각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 생활을 빛내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친밀함이기도 하다. 이는 더 크고 창조적인 행복을 쌓는 것이다. 나는 생후 석 달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내 생애에 얼마나 크니 큰 좌절로 남았는지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나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가운데 아내가 오랫동안 내 말을 경청했을 때, 내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고 흐느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날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감정의 짐을 제거해 버렸다. 아내가 그 날 나에게 심리 치료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아내도 나도 깨닫지 못했었다. 그것이 나에게 이와 같은 진로를 열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러한 모험 속에서 부부는 성장하고 발전한다. 각자는 자기의 성격 유형과 성에 따른 자연적인 반응을 초월하게 된다. 완전한 교환이 이루어진다. 각자는 상대방에게 자기 인격의 가장 소중한 차원을 내어 주고, 상대방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을 공급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남성적인 또는 여성적인 사랑이 문제가 아니다. 각자의 사랑의 특별한 측면이 통합된, 훨씬 더 깊은 인간적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감추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할 때 비로소 느끼는 그러한 일체감을 누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없다거나 서로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한 단계가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하고 계속 발전시켜야 할 하나의 움직임인 것이다. 한번 상호 이해의 값진 경험을 하게 되면,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자라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반려자에게서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보다 우리 마음을 더 잘 터놓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부부는 젊은 시절에 있었던 사건을 함께 되돌아 볼 것이다. 그들은 어린 소녀가 매일 자기의 소중한 비밀을 나누기 위해 찾아 갔던, 친근한 친구와도 같은 한 그Viewer루의 나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린 소년이 올라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기의 꿈의 세계와 성공을 그려보던 그 절벽 위에 함께 설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가해진 고통에 대한 기억, 오해나 다른 사람의 악의에 대한 기억 등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부끄러워하는 기억들, 우리가 지워버리고 싶은 지난날의 모든 것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부간의 대화가 일종의 고백으로 변한다. 이는 부부간의 고백이 천주교의 고해성사나 개신교의 공적 예배를 대신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 가치는 덜할지 모르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큰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경험은 상호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 한 사람이 용감하게 고백하고 나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배우자의 고백이 따라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공유하는 엄청난 기쁨은 교회 생활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반영된 것이다.
10. 완전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부부가 그들의 경험에서 현실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부부의 기쁨은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개개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교제해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친구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외로움과 혼란을 느끼는 인간들을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 항상 인간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 한 명은, 자기는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생명을 구하며, 연구를 하고, 의학 학술지에 글을 쓰면서 흥미진진한 생활을 하고 있었Viewer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에서 정서적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눈이 멀어 있었다. 그는 그의 아내를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고, 정신과 의사는 이러한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의사의 조언을 그대로 실천했지만, 아내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에게는 내적인 조명이 필요했는데, 이와 같은 내적인 깨달음은 단순히 지적 문제만이 아닌 영적인 경험인 것이다.
그 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를 그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는 전혀 다른 태도로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진정하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의 눈을 여시고 그의 마음속에 아내를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열정을 심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아내의 이런 저런 욕구가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그 친구는 아내의 신경증 상태에 책임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내를 정신과 의사에게 보낸다고 해서 자신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과 의사의 조언도 아주 적절하고 좋은 것이었기에 그것을 받아들여 실천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조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심리학은 문제를 드러내고, 현명한 조치를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진정한 해답은 좀 더 심오한 영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성경이 ‘메타노이아’(metanoia) 곧 ‘회개’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심령의 변화다. 회개란 심령의 변화와, 또한 자기반성, 진정한 겸손, 그리고 지금까지 무시했던 책임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도덕적인 감화력, 곧 심층적인 태도의 변화를 촉발하는 그런 감화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마실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영의 숨결이 필요하다. 세상의 어떤 힘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마침내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자신을 맹목적인 이기심에 빠뜨렸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한 남편이 아내의 잘못을 비난하고 그녀와 결혼한 자신의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다. 남편은 뒤늦게나마, 아내가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자신의 도움으로 아내의 개인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내가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타고난 방어적 반응으로 굳어졌던 것은 남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부부의 경험은 단순히 관념과 감상의 종교가 아닌 살아있는 믿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오 주여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게 도와주소서”(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기도)
결혼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부부의 마음속에 일깨우시는 이 새로운 소망이다. 남자가 아내에게 이해 받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 연민과 바라기만 하는 마음, 쓰라린 움츠림에 압도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려 애쓰며,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아내를 이해하는데 마음을 쓰게 되면, 부부 관계의 방향은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은 이해 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방어 기제를 낮추기 때문에 자신을 더 잘 이해시킬 수 있게 된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단순해 보인다. 그런데 왜 이러한 행동을 찾아보기 어려운가? 그 이유는 생명력을 불어 넣는 불꽃이, 내적인 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화 장치는 어떠한 처방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비결인 이 이해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 이것은 하나의 내적 경험이며, 발견이요, 회심이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낙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그가 보통 상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많은 설교를 들었으며,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어떤 하찮은 사건, 즉 한 마디 말Viewer, 우연한 만남, 죽음, 병의 회복, 한 번의 눈 맞춤이나 자연적인 사건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모든 좋은 사건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외로움과 두려움, 고통 또는 후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어린 자비의 결과인 것이다. 그들의 행복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부부는 행복한 부부이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속에 주신 사랑, 그들에게 주신 자녀들, 모든 삶의 기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상호 이해라는 그 힘든 학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혼 생활의 진보에 대해서도 함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할 수 있는 부부는 복된 부부가 아닐 수 없다.
믿음이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려면, 삶이 변화되게 하려면, 신앙과 생활을 조화시켜야 한다. 신앙과 결혼 생활의 조화가 필요한 이유는, 신앙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변화의 능력을 발휘하고, 상호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나아가 결혼이 그 풍성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기보다는,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의 문제라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달라고, 주님이 친히 이 완전한 연합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두 사람이 인격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결혼의 경험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 경험이 어떻든지 간에, 새로운 먹구Viewer름은 언제나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민감한 감정이 상처를 받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본능적인 최초의 반응은 언제나 벽을 쌓고, 움츠러들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감추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순간에, 진리와 사랑과 서로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한 고요한 순간에, 영혼의 두 번째 반응은, 순간적으로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들어 다시 부부의 하나됨을 무너뜨리려 했던 방어적인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순간들 덕택에, 우리는 놀라운 결혼, 그 이상의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 하나님 바로 그 분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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