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치제(順治帝)와 그의 후궁들
순치제의 시절은 청나라 역사에서 가장 말많은 몇가지 의안(疑案, 진상이 의심스러운 사건)을 남겼다. 태후하가(太后下嫁), 순치출가(順治出家)의 두가지 의안은 전 청나라 역사에 가장 많이 얘기되는 사건이다.
순치제는 <<청사고. 후비전>>에 따르면, 2명의 황후와 15명의 비(妃)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사후에 추증된 황후를 합하면 4명의 황후이다). 많은 황후를 두었으나, 그의 혼인생활은 결코 행복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첫째 황후는 몽고 커얼친(Horqin)부의 보얼지지터씨이다. 즉, 청태종의 장비이자 순치제의 생모이고 효장태후로 불리는 보얼지지터씨의 오빠인 쭤리커투친왕 우커샨(吳克善)의 딸이고, 효장태후와는 고모, 조카의 관계이다. 그녀는 뚜얼곤에 의하여 황후로 낙점되었으며 순치8년(1651년) 8월에 황후에 책봉되고 대혼을 거행한다.
이 황후는 순치제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하며, 매우 사치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청사고. 후비전>>에 따르면 "황제는 검박한 것을 좋아하는데, 황후는 사치를 좋아하고, 질투심이 많았다. 오랫동안 황제의 뜻에 거슬려왔다"고 한다. 순치제가 직접 쓴 글에서도 첫번째 황후는 "용모와 행동거지가 아름답다고 할 수 있고, 아주 총명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단정하지 못하였고, 질투심이 매우 컸다. 용모가 약간 뛰어난 여자가 보이면 미워하고 죽이고자 하였다. 짐이 약간의 행동만 보이면 의심하고 못하게 하였다. 결국 별거하여 다시 보지 않았다". 결국 순치제가 친정을 한 후인 순치10년 8월 황후의 자리에서 폐출시키고 정비(靜妃)로 격이 낮추어진다.
둘째 황후도 역시 몽고 커얼친부의 보얼지지터씨이다. 그녀는 커얼친부 패륵인 뚸얼지의 딸이고, 쭤얼지는 차이상의 손자인데, 효장태후가 차이상의 딸이므로, 배분으로 따지면 두번째 황후는 효장태후의 질손녀에 해당한다. 두번째 황후는 순치 11년(1654년)에 황후에 오른다.
이 황후는 첫째 황후와는 달리 마음이 바르고 검박하였다. 그러나, 순치제는 그녀가 재주가 없다고 싫어하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순치제는 둘째 황후도 폐출시키고자 하나, 효장태후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둘째 황후는 아주 장수하여 강희 56년에 죽는데, 그녀의 나이 77세였다. 그녀는 청나라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태후가 된 여인이고(21세), 태후의 지위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56년) 여인이기도 한다.
순치제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동악씨(董鄂氏)이다. 동악씨는 만주의 귀족출신으로 3대에 걸쳐 무관직을 지냈고 부친은 어슈어(鄂碩)로 정백기 출신이다. <<청사고 어슈어전>>에 따르면 원래 전공이 뛰어나 순치9년(1652년)에 바야라 가라장경의 직을 받았다. 순치13년에는 내대신으로 승격되고, 14년에 딸이 황귀비에 오를 때 3등백(三等伯)에 오른다. 이후 순치 17년(1660년)에 사망한다.
동악씨가 순치황제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로 알 수 있다.
하나는 그녀의 승급이 파격적으로 빨랐으며, 전례가 매우 융성하였다는 것이다. 동악씨는 순치13년(1656년)에 입궁하여 "현비(賢妃)"에 책봉되며, 1달 정도가 지난 9월 28일에 다시 "황귀비(皇貴妃, 황후 바로 다음의 지위)"에 오른다. 이 정도로 빠른 승급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12월 6일에는 동악비를 위하여 융중한 책봉의식을 해주고 대사면령을 내린다. 이것은 청나라 300년의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둘째는 일체의 기존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그녀 하나만 가까이 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전도사 아담샬에 의하면 소년 순치제는 다른 만주사람들과 같이 육욕이 매우 발달하였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사람들은 순치제의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여러가지 잘못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순치제는 만주귀족자제의 호색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악비가 나타난 이후로는 완전히 바뀌어 동악비 한 사람에게 모든 총애를 베풀었다.
셋째는 이렇게 아꼈으나 동악비는 3년후에 세상을 떠난다. 동악비는 원래 몸이 약했으나 아들을 하나 낳고 100일이 안되어 요절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동악비가 아들을 낳자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봉하고, 동악비가 죽자 그녀를 황후에 추증하고 황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며, 스스로 그녀를 위하여 "동악비 행장" 수천자를 지어 동악비의 생전의 아름다운 덕행과 고결함을 기렸다. 뿐만 아니라 동악비가 죽은 지 4개월 후 순치제도 동악비를 따라 세상을 뜬다.
동악비에 대하여는 몇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녀가 바로 강남 진회하(秦會河)의 명기(名妓)인 동소완(董小宛)이라는 설이다. 동소완은 강남의 유명인사 모벽강(冒僻疆)의 첩이 된다. 그녀의 성이 동악비의 동과 같다는 것에서 착안한 후세인들이 청나나 군대가 남하하였을 때 그녀를 포로로 잡아 북경으로 데려와 왕부에 머물다가 태후에 의하여 궁중으로 들어가고, 순치제가 한번 보고 반하여 만주성인 동악씨를 주고, 황귀비로 삼았다는 설이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난 동소완의 나이(동소완과 순치제는 14살의 차이가 난다)나 동소완에 대하여는 비교적 완벽하게 그녀의 일생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그저 말만들기 좋아하는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동악비는 원래 순치제의 동생인 상친왕 보모보궐(博穆博果爾)의 처였다는 것이다. 이 설은 아담 샬의 기록에서 비록되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순치황제는 한 만주족 군인의 부인에 대하여 열렬한 애정을 느꼈다. 이 군인이 그 부인을 질책하였다. 순치는 그 군이 질책한 것을 알고 친히 그 군인의 뺨을 때렸다. 이 군인은 원한을 품고 죽었거나 자살하였다. 황제는 이 죽은 군인의 부인을 궁중에 들였고, 귀비에 봉하였다"
이 내용은 최근에 청나라 황실기록을 연구한 결과에서도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1) 상친왕은 순치13년 6월 초8일(1660년 7월 29일)에 사망한다. (2) 청세조실록의 권102에는 "순치 13년 7월 초9일(1660년 8월 28일), 상친왕의 27기일이 지난 날, 예부에서 순치제에게 동악씨를 현비로 책립하는 길일이 8월 19일이라고 보고하는데, 순치제는 상친왕이 금방 죽었으니 8월이후로 다시 날짜를 잡으라고 말한다. (3) 청세조실록 권103 8월 25일자 기록에는 "순치제가 예부에 명을 내려 22일에 이미 성모황태후의 영이 있었으니, 내대신 어슈어의 딸인 동악씨를 현비에 봉하는 동시에, 내대신 아오바이를 보내어 상친왕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이외에 동악비가 입궁할 때의 나이가 19세인데, 청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18세이전의 여자들이 입궁하고 그 나이 이후에 입궁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등을 들어 순치제가 동생인 상친왕의 부인을 빼앗은 것은 사실일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최근의 TV연속극으로 중국에서 인기를 끈 <<소년천자>>와 <<효장비사>>에서도 이런 관점에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