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지하철 입구에서」 감상 / 김유태
지하철 입구에서
허수경
오늘도 영락없이 나는 이곳에 있다 나는 이제 이 안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긴 통로를 걸을 때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입구를 지나 새로 열리는 세계가 아니라 다시 반복되는 영원의 길들이었다 나는 오래된 바다나 산맥이 표시된 지도를 잃어버렸고 새로 구입한 기계 지도 안으로 익명이 되어 숨죽이네 먼 곳에서 구급차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종이처럼 구겨지며 하늘을 날아가던 새 떼 얼어붙은 길을 갈아서 빙수를 만드는 모퉁이의 작은 카페도 문을 닫았네 오, 익숙한 이여 애인처럼 나를 떠나지 마라 슬며시 누르는 슬픔이 영혼 속의 물곰치 한 마리로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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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과 퇴근길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서늘한 기분이 드는 날들이 있다. 침잠하는 골방, 슬픔은 발신인 없는 익명으로 들이닥친다. 영원히 나의 침대로 귀가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삶은 때로 가늠할 수 없다. 길을 걷지만 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엔 이 시를 기억해보자. '영락없이' 이곳에 있어도 애인 같은 물곰치 한 마리가 있지 않던가. 녀석의 못난 표정을 가만히 살피면서 오늘도 이 길을 함께 걸어가보는 것이다.
김유태 / 1984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8년 상반기 〈현대시〉 등단. |
첫댓글 허수경시인
출생 1964년, 경남 진주시
사망 2018년 10월 3일 (향년 54세)
학력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고대근동고고학 박사
데뷔 1987년 실천문학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등단
수상 2018. 제15회 이육사 시문학상
모두가 심오한 싯귀지만 °종이처럼 구겨지며 하늘을 날으는 새떼° 구겨졌다가 펴지고 늘어났다가 오므라들고 찢어졌다가 붙고 ...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