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5. 24 주일예배설교
팔복(2), 애통하는 자의 복(마태복음 5:4)
우리는 일반적으로 복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주로 기쁘고 즐거운 것과 관련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종종 좋은 일이 많은 사람을 향해 “그 사람 참 복도 많아”라고 이야기하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주님은 복의 개념을 즐거움과 관련하여 이야기하시지 않고 애통과 관련하여 말씀하신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 이같은 궤변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돈과 쾌락을 최고로 여기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애통하는 것이 복이란 말인가?) 슬픔 많은 세상 속에서 슬픔을 잊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은 시대 속에서 어떻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궤변같은 주님의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드려야 할까?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눌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셔서 이 말씀의 비밀을 깨닫고 애통하는 자의 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인가?
1. 자신의 고통과 실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 때문에 슬퍼하는 자이다.
* 월드컵 경기 시 패배한 팀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자신이 지은 죄악으로 인한 애통을 의미한다.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은 죄에 대한 애통을 상실한 것이다. 죄를 짓고도 그것을 회개할 줄 모르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ex) 범죄자, 정치가
그러나 애통을 상실한 이러한 패역한 시대 가운데서도 참으로 복된 자는 누구인가? 그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죄를 지었지만 그것에 대해 애통해 하고 참회하며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다.
예화) 다윗(시 51:3-5)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받은 다윗,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대한 간음죄와 그 남편 우리아에 대한 살인죄를 저지른 뒤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밤마다 자신의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애통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복 있는 자의 애통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그것에 대해 애통해 하는 참으로 복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화)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라는 찬송시를 지은 <존 뉴턴>의 이야기
18세기의 인물 존 튜턴은 어렸을 때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방탕한 삶을 산다. 그는 당시 가장 짭짤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사업인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다 유럽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하루는 그가 대서양을 건너다 큰 폭풍을 만나 죽게 되었다. 죽음이 임박하니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긴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회개하며 간구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며 회개한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가 타고 있던 배가 기적적으로 폭풍을 벗어나 안전하게 항구에 정박하게 된 것이다. 그때 뉴턴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감격하며 찬송시를 지어 불렀다. 그것이 바로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애창되는 그 유명한 ‘Amazing Grace’라는 찬송이다.
그렇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면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가 있다. 우리도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다른 사람의 죄악과 고통에 대해서 슬퍼하는 자이다.
1) 예레미야 - 이스라엘 민족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함
2)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면서 우신 예수님의 모습(누가복음 19:41-44)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마지막 한 주간의 사역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문 밖에 나와 길가에 자신들의 겉옷을 펴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환영했다(요 12:13, 막 11:9, 마 21:9). 겉으로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찬양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눅 19:41-4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백성을 보시고 애통해 하시며 우셨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몰랐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따르고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징계(예루살렘의 멸망)를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하며 우신 것이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애통이 있기 바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으므로 장차 그들이 당할 지옥형벌을 바라보면서 애통해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기 바란다.
3.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믿음의 정절을 지키다) 당하는 핍박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이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핍박)를 받으리라”
이 구절의 말씀처럼 애통하는 자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곤란함과 괴로움에 처하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억울함 경험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답답함과 억울함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오직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갈망하며 자신들의 답답함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자들이다.
예화)
➀ 갈멜산의 대승 후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에게 쫓기는 엘리야(열왕기상 19:9-18)
그가 호렙산 굴에 들어가 그곳에 유하게 됨.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19:13)라고 말씀하심.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한다.
열왕기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그 억울함에 대해 하나님께 토로하고 호소함.
그러자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로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열왕기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칠천을 남긴 것처럼 엘리야의 생명도 보존해주시겠다는 약속이요 위로의 말씀이다. 그렇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다.
➁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사도행전 4:23-31, 특히 29절)
* 그러면 애통하는 자가 누리게 되는 복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그것은 한 마디로 ‘주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애통해할 때 받는 위로는 세상 사람들이 주는 것처럼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위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위로이다. 왜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이 주는 위로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말뿐인 위로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 위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있다. 오히려 세상이 주는 위로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다.
예)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모를 위해 슬픈 시를 지어 읊음으로써 부모들을 통곡하게 만듬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위로요, 영원한 위로이다. 왜 그런가?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우리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다 체휼하심을 통해서 주시는 위로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15).
주님은 죄와 질병과 고통과 사망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 아무런 죄도 없으시지만 친히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풍요한 삶을 위해 부활하셨다. 그러기에 그분이야말로 죄 때문에 신음하고 애통해하는 자들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며,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죄악과 삶의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어떠한 눈물도 씻기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그분께 나아오시기 바란다. 그러면 주님의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사야 66:13-14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그래요. 여러분! 이 말씀처럼 진정한 위로는 오직 우리 주님만이 주실 수가 있다. 위로가 필요한 분이 계시는가? 오직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위로를 받기 바란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에 대한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즉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살아가고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그러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하며 애통하는 자가 참으로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당하는 핍박으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복인가?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이미 다 체휼하신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위로이다.
아무쪼록 참으로 애통하는 자가 되어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진정한 위로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