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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9월 8일 오전 예배 설교)
마가복음 7:24-37(신약 66)
오늘 본문에는 두로와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두 가지 치유 사건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이 두 사건을 기록하면서 두 번째 치유 사건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그가 하는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라고 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지역 사람들이 본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사역을 보면서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놀라운 치유 사역은 마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같은 기적이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로와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사건은 의사들이 의술로 질병을 고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창조의 능력과 같은 것으로 망가진 육체와 영혼을 새롭게 재 창조해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한 것과 같은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치유와 기적의 이름이고 치유와 기적은 창조의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래 된 건물이나 낡아서 망가진 부분이 많은 건물을 리모델링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가 병들고 지쳐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리모델링을 하셔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의지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재 창조 즉 리모델링의 역사를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앞에 1-23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의 전통과 관련된 논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을 중요시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전통을 철저하게 따르고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쌓이게 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전통을 마치 성경의 말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유대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 전통을 지키는 것이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통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전통이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지켜온 전통을 신앙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에서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말씀을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여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논쟁이 끝나고 제자들에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속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로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이방인 지역인데 예수님은 그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방인 지역인 두로로 가셨을까요?
마가는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님께서 유대인 지역이 아닌 이방인 지역으로 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하셨다는 것은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계속해서 사역을 하시던 예수님은 이제는 잠깐 쉼을 얻으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잠깐 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셨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논쟁을 하고, 가르치고, 선포하고 쉴 틈도 없이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쉴 시간이 필요했고 예수님도 쉴 시간이 필요하셨기에 이방인 지역으로 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면서 잠시라고 쉬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적절히 쉬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탈진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일벌레 라는 표현을 하고 일 중독자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쉴 틈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영적 사역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때론 적당한 휴식과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가 있으셨고 쉼이 필요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쉬시려고 하셨지만 두로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많이 났기 때문에 뜻대로 하시지 못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여인 중에 딸이 귀신 들려 고통 당하고 있어서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25-26절을 보면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던 여인이 자신이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통 당하는 상황인지라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귀신이 사람들에게 들어오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든지 간질을 한다든지 그런데 귀신이 사람들 속에 들어오면 일반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상한 증세를 보이고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한 것은 정신이상 증세와 함께 일반인 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엄마로서 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아팠을까요?
귀신 들린 것은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고통 속에서 지내던 중에 예수님이 두로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엎드려 간절하게 간구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딸이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셨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먼저 내 식구들인 유대인들부터 돌봐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음식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개라는 단어는 애완견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은 유대인으로 시작해서 온 세상을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개와 같이 취급하는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려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 말씀이 때론 나에게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멘으로 받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 나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좋으니 그 작은 은혜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크고 놀라운 것만을 바라보기 보다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크고 놀라운 것을 주시지만 우리는 주님 앞에 작은 것이라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옵소서라는 믿음이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인의 간절한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29-30절을 보면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부스러기 은혜라도 간구한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말씀하셨고 여인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서 정상인이 되어서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음을 힘들게 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모든 어둠의 영들이 떠나감으로 마음이 평안함을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에바다
두로에서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31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두로를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를 지나 갈릴리 호수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를 거쳐서 갈릴리 호수도 돌아오셨다고 기록했는데 이 지역들은 이방인들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셨다가 다시 많은 사역을 하신 갈릴리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오시자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32절을 보면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일반적으로 말을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분들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데리고 온 사람은 귀먹어서 듣질 못하고 그러므로 말을 더듬는 즉 어눌하게 말하는 사람이고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안수하셔서 고쳐주시길 바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람은 장애를 가진 분이지만 사람들에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주길 간구했다는 것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거나 그의 가족들이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중요하고 사람들이 데리고 가서 고쳐 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고침 받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할 만큼 좋은 평가를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에바다 하셨습니다. 33-34절을 보면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은 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 에바다 하셨을까요? 사람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애정의 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보며 탄식하신 것은 단순히 당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만이 아니라 탄식으로 간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탄식은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지극한 애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눌한 사람을 보면서 탄식하신 예수님은 에바다 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이라고 마가는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귀가 열려서 듣게 되기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하심에 귀가 열리고 말하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35절을 보면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님께서 양손을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에바다 하시매 그의 귀가 열리고 말하는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귀가 열리면 말을 듣기 때문에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가 열려도 말을 분명하려면 언어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귀가 열리고 말도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결과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영적인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고, 기도의 말이 어눌하고, 전도와 찬양을 위해 입을 열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에바다 하시매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기도와 찬송과 전도의 말을 분명하게 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에바다 하시매 고치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
3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그러면서 사람들이 심히 놀라워했습니다. 37절을 보면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심히 놀라워 라는 말은 곧 ‘극도로’, ‘측량할 수 없이’ 란 뜻입니다. 이것은 그 지역의 주민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느꼈고 또 그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 심히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심히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37절을 다시 보면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놀라고 경이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모든 것을 잘하였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성령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 다 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 일 중에 나쁜 것이나 필요 없는 것이나 하지 않으셔야 하실 일을 하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잘하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좋은 일을 하시고, 필요한 일을 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매 이방 여인임에도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그의 딸은 치유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또한 에바다 하시매 귀가 열리고 말이 분명해 짐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잘하셨다고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잘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삶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은혜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 나라가 오늘 우리의 삶에 임함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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