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동백을 보러갈까하다가 날씨가 우중충하여 집에 쳐박혀서 책만 뒤적이다가
몸에서 기름끼가 쏙 빠질만큼 낮잠을 사뭇 길게 자고 났더니 뭔가 슬슬 쓰고 싶어진다.
그래서 카페에 들어와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언젠가 여기에 글을 좀 길게 써서 올리려는데 휙~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한참 글을 쓰다말고 저장을 일단 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러다보니 읽는 분의 입장에서는 “뭔 글이 이런디여?” 하고 생각할 법도 하다.
그렇다고 글을 써서 붙이는 것은 또 문제가 있다. 무슨?
정제된 언어로 글을 쓰려다보면 글 진도가 나가지 않는 다는 거.
(쓰다 보니 서론이 길었다^^)
<오늘의 교육> 특집 텃밭과 정치의 가능성을 읽었다. 김도연 기자가 전하는 제 1회 교육농축제 현장 중계 "우리 학교에 논밭이 있어요."를 읽으면서도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동공이 커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이 대목.
'첫날 축제의 문은 조한혜정이 열었다. (중략) 이어 그는 "적대적 경쟁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협동적인 아이들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핵심 과제"라며 "서로 만나서 작당하기"를 권했다.‘
이게 그럴 만한 대목인가? 그런데도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내가 아직 미숙아라서(영혼이 아직 어린나무라서, 라고 쓰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물리쳤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협동적인 아이들을 만들지 못하고 경쟁에만 길들이는’ 우리 교육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우려가 일순 나를 엄습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김도연 기자의 현장 중계가 신선하게 읽혔다. <오늘의 교육>에 오늘의 교육 현장을 중계하는 이런 글이 왜 그동안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사무국이나 편집국 식구가 아닌 ‘김도연 기자’의 글을 자주 접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용주의 ‘정치적 실천으로서 텃밭 농사’는 짧은 글이 아닌데도 두 번 읽었다. 연거푸 읽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글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함께한 텃밭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이론을 나열하면서 어렵게 써야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이틀 후에 글을 다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 글을 어렵게 읽은 것이 전적으로 독자인 내 탓임이 여실히 깨달아지면서 집중해서 재밌게 글을 읽었다. 이 글의 제목이 단순한 텃밭 가꾸기 이야기가 아니라 ‘텃밭과 정치의 가능성’인 것을 감안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 글이 탁상머리에서 그냥 쓴 것이라면 내가 글쓴이에 대한 미안함을 가질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몇 구절만 소개하면서 꼭 일독을 권한다.
‘어떤 것은 계획 단계에서 부결되었고 어떤 것은 추진하다가 염려한 대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활동한 자리에 주권자라는 흔적이 남았다. 학생들이 주권자로서 거듭난 계기가 된 것이다. 스스로를 통치하고 누구에 의해서도 대의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미시 코뮌이 텃밭을 통해 창출되었다.’
‘이러한 갈등상황은 사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문제인데 그로서 우리는 타자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급식실 창문 쪽으로 난 토마토의 가지를 쳐주었고, 오이 넝쿨의 유인줄을 정리한 후 어떤 피해가 있는지 찾아가 원인을 찾고 대화하려 애썼다. 설득이 아닌 연대, 합류적 관계를 형성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기초가 되어 학생들은 2학기에 급식실 분들이 파업을 할 때 찾아가서 “불편하지만 우리도 참을 게요. 파업을 지지합니다.’라는 말을 했고..’
‘공리주의 국가는 인간을 상업적 관점으로만 보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제의 인간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공리주의적 관점이 학생들과 교사인 나에게 덧씌워져 있다. 공적 유용성으로 인간의 발달이 구조화되며, 이윤이 남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으로 인간이 사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은 늘 가치와 산출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생산물과 인간을 분류한다. 이러한 우월성에 의한 위계화는 인권 쪽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으로 텃밭에서는 농작물, 잡초, 해충으로 분류되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정치적 장에서 인정투쟁을 통해 다시 통합될 수 있다고 본다.’
‘장애와 함께 자라는 꿈농사, 교육농사’라는 부제가 달린 최문철의 글은 작고하신 권정생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그가 인용한 글을 다시 인용한다.
‘아이들은 시인이라는데 그 아이들이 있어야할 곳에 있지 못하는 슬픈 현실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생겨나는가. 아이들이 시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아이들을 시인이 되게 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이다. 엄니의 젖을 먹으면서 새소리를 듣고 흰 구름을 보고 별을 바라보며, 그리고 짐승들과 벌레들과 어울려 땀 흘리는 고통을 배우고 따듯한 생명들과 살을 비비는 삶이 있어야 한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도 알아야 하고, 여름날의 소낙비의 무지개와 지루한 장맛비도 알아야한다.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도 배우고,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 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대로 체험해야 한다. 시인은 절대로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똑같은 것을 흉내만 내는 인간이 되어 일생을 시체로 살게 버려두는 건 죄악이다. 조금 가난하고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아이들을 시인으로 키우고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이어지는 이동철의 ‘텃밭이 힘들면 텃밭정원 어때요?’는 이 한 구절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었다.
‘학교에서의 노작교육은 상품성 있는 작물을 많이 생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작물을 기르는 과정에서 그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을 경험하는 것! 교육에서 이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혀봐!!
신소희의 특집 기획 마지막 꼭지는 2015년 교육협동조합과 각 지역 농사학림을 소개하는 짧은 글이지만 언젠가 한 번 읽은 기억이 있는 교육농협동조합 제안문을 다시 읽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중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하늘이 변함을 새삼스럽게 만나며 철이 들어 갑니다. 함께 땀 흘려 땅을 일구면서 제 몸과 이웃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씨앗을 심으며 기다림을 배우고, 스스로 먹을거리를 기르며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생명을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부러운 것이 없는 내가 오로지 부러운 것이 있다면 농사학림에 참여한 분들의 경험이다. 그 경험이 현기증을 느껴가며 땀 흘려(왜 이상대샘이 생각나는 걸까?) 몸으로 해낸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내년에 학교를 그만 두면 나도 참여해볼까? 일단 아내에게 결재를 올려볼 생각이다.
첫댓글 스스로 기획하는 학교축제를 통해 학생들을 주권자로서 거듭나게 하시고 있잖아요?^^ 농사학림 참여 대환영이에요~!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하고 있네요^^
올 해 우리학교에서 텃밭정원을 꼭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단순한 텃밭이 아닌 텃밭정원 멋있을 것 같아요.
시골학교에서 비담임이라는 행운을 얻었으니 4H동아리 만들어서 맘껏 농사지어야죠. 사실 담임신청했는데 잘렸어요.
텃밭을 중심으로 통합교과 수업까지 밀고 나가볼 생각도 있지만 다른 교과와 잘 얘기가 될런지 모르겠어요.
자연의 씩씩한 힘이 느껴지네요^^ 잘 되시길 바래요 제가 부러워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ㅡ자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