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나의 「마스크」 평설, 감상 / 박성현, 이승하
마스크
서안나
얼굴은 실행하는 것이다
나의 세상은 눈동자만 남았지
턱을 지우고 코와 입술과 뺨을 지우면
마스크
내가 확장돼
마스크를 쓰면
세상의 상처가 다 보여
마스크는 나의 의지
모두 아픈데 모두 웃었어
의사가 말했지
실패가 가장 완벽한 치료법이라고
실패한 웃음을
마스크 속에 숨겨둘게
외부를 번역하면 바이러스 맛이 나
마스크 속에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어
미소가 부딪쳐
당신이 버린 얼굴이 부딪쳐
마스크는
나에게 집중하는
표정의 기술
나는 표정이 많아
나는 출구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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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서안나 시인의 문장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의 온전한 열림이라면, 그가 두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얼굴은 존재의 집약이자 초월이며 타자로의 건너감이라는 불가항력적 관계의 최초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고백을 통해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여는 것은 다름 아닌 ‘얼굴’이다. 존재자로서 모든 가능성에 대한 이해라는 것. 이것이 “얼굴은 실행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함의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시인은 얼굴을 지운다. 눈동자만 남기고 얼굴-기관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그리고는 끝내 “나의 세상은 눈동자만 남았”다고 고백한다.
"얼굴은 실행하는 것"이라는 문장에는 주체가 세계로 드러나는 방식이 압축되어 있다. 그의 얼굴은 그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면서도 자신을 세계로 밀어내는 표정-이미지들의 산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고백'의 발화점이자 이 의미들의 공통-영역이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 교감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처럼. "얼굴은 존재의 동일성 그 자체다. 얼굴은 거기에서 개념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이 같은 얼굴의 실존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의 얼굴에서 ‘눈동자’만 남기고 다른 부분들을 지워버린다. “턱을 지우고 코와 입술과 뺨을 지우”는 것.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얼굴을 지운다는 행위로부터 ‘내가 확장’된다는 기묘한 역설에 도출한다. ‘마스크’라는 자기 안의 육화된 타자-얼굴 때문인데,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마스크를 내가 나를 지우는 원인이자 의지로 삼는다(“마스크는 나의 의지”).
다시 얼굴이 있다. 얼굴에는 육체의 온갖 표정들을 나타나고 사라진다.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이 내게로 오는 과정은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나고, ‘나’의 내부에서 출현하는 ‘의미’들도 얼굴에 나타난다. 얼굴은 주체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이자 언어의 분할선이다. 입구이자 동시에 출구라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얼굴’이 눈동자만 남겨진 채 모조리 지워지고 기관 없는 빈자리에는 유사-기관인 ‘마스크’로 채워지는 것이다. ‘얼굴’이라는 고유한 실존을 마스크가 대체하는 것. 그런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마스크는 얼굴-기관의 대체로써 무리없이 작동한다. 오히려 새 부품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생래적인 기관-얼굴들이 망가지거나 없어져도 걱정할 것 없다. 자동차 부품처럼 새것으로 교체해버리면 되니까. 적어도 시인에게 마스크는 우리 얼굴의 확장-기계이자 가장 효율적이고 유용한 ‘유사-얼굴’이다.
우리가 마스크를 쓰는 까닭은 그것만큼 얼굴을 잘 이해하고 조절하는 얼굴-기계가 없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면/ 세상의 상처가 다 보”일 정도로 그 힘은 투명하고 단호하다. 마스크를 쓰면 아픔도 고통도 상처와 통증도 멀리 날려버리고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웃음은 본래의 얼굴이 아닌 마스크의, 유사-얼굴이 유발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 마법 같은 ‘마스크’의 광휘는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시의 ‘분열’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주치의는 그에게 “실패가 가장 완벽한 치료법”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의 통일성을 뿌리 채 흔들 수 있는 진실-담론인 바, ‘그’는 의사의 등장으로 인해 ‘분열자’로 재배치된다. 마스크라는 유사-얼굴은 반드시 자신을 연기하는 ‘무대’(혹은 ‘얼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스크가 지워지면 다른 마스크를 집어 들면 그만이지만, 무대는 마스크라는 존재의 펼쳐짐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선결 조건이다. 마스크는 얼굴에 포용되고, 얼굴은 또한 무대에 감싸인다. 하지만 관객과 마주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스크’일 뿐이다. 이것이 그가 ‘실패한 웃음’을 마스크 속에 숨겨 두어야 하는 까닭이다.
한편, 얼굴에 남은 유일한 기관인 눈동자는 ‘마스크’와 ‘얼굴’을 관통하며 주체로서의 통일성을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끈이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마스크와 얼굴의 자리바꿈을 가능하게 만든다. 때문에 “마스크 속에/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다는 문장은 착란이다. 그가 마스크를 쓰면 쓸수록 내 얼굴과 당신이 버린 얼굴을 분별할 수 없다. 이미 마스크는 유사-얼굴에서 본래적 얼굴로 완전히 변이된 후다.
이러한 까닭으로 ‘마스크’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재현의 불가항력적 나타남을 입증한다. 얼굴과 유사-얼굴의 분별없음, 혹은 원본의 부재 속에서 서둘러 나타나는 재현mimesis의 특히 ‘얼굴’의 부재라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마스크가 “나에게 집중하는/ 표정의 기술”로 정의되는 이유다. 그의 얼굴은 마스크에 잠식당한 채 표정을 연기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본래의 얼굴을 기억해야 할 필요는 없다. 까마득히 먼, 시원의 존재를 우리는 지금 여기로 환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박성현 (시인)
마스크 확보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해 필요한 생활용품이 인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 상황에 돈을 벌겠다고 빼돌리거나 매점매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내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뺨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턱, 코, 입굴, 뺨을 지우고 눈동자만 남아서 상대방을 살피는 외계인 같은 우리. 당신 확진자요? 음성이요 양성이요? 신천지요 그냥 교회요? 대구에 갔었나요, 청도에 갔었나요? 한국에서 왔소? 당신 코리언이오? 뭐 이런 세상이 되었나.
대구사람이 말했다. “길에서 마스크 안 한 사람들 보면 짜증부터 치민다”(<중앙일보 3월 5일자 6면)고. 사람은 타인의 표정을 보고 심리상태를 파악하는데 이젠 그럼 안 되는 것이다. 모두 아픈데 모두 웃는 이 모순된 상황이, 의사가 “실패가 가장 완벽한 치료법”이라고 말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도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는 표정이 많은데, 그 어떤 표정도 보여줄 수 없다. 나는 출구가 많은데, 지금은 그 모든 출구가 막혀 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타인에게 자신을 ‘실행’하는 것이거늘 그것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비극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승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