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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2 / [산상설교;마5:1-7:29] 어느 날 예수께서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다. 2)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 [참된 행복 ; 눅 6:20-2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ㄱ)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ㄱ. 시37:11) 6)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만족할 것이다. 7)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10)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12) 그럴 때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에 대한 새로운 선포입니다.
천국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1-2)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제자들은 그 앞으로 나아옵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불러 올리셔서 율법을 선포하신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출 19:20). 그러기에 본문으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장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 예수님은 이제 누가 천국 백성인가에 대해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성장하는 천국 백성(3-12) 팔복의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가난한 심령으로 출발합니다. 그 가난한 심령 자체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막 2:17).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만지시기 시작하십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천국입니다. 이들도 천국 백성입니다. 말씀이 심령을 만지기 시작할 때, 애통함이 일어납니다. 이 애통함은 특히 죄에 대한 애통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죄에 대한 애통함이 일어납니다. 생명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는 징계나 정죄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애통을 경험한 자는 그의 삶을 온유한 자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온유의 어원적 의미는 잘 길들여진 말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민 12:3). 이는 모세가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잘 길들여진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성도가 죄로 인해 애통하는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잘 길들여진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돌보는 단계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세로 성장해 갑니다.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김을 경험한 자들은 그 긍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깁니다. 이것은 청결함의 복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게합니다. 이제 천국백성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복이 됨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적 용 : 내 신앙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멈추어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복과 천국백성이 누릴 복에는 차이가 없습니까?
예수를 믿으며 산다는 것은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이 바쁘기 때문에 주일성수, 말씀과 기도가 뒷전일 때가 많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약속의 말씀대로 살때에 축복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되는 것은 구하게 하셨고, 네 믿음대로 되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축복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축복의 통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 나의 형편이 어떠한지 돌아보며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깨달음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 설 교 >
팔복(八福)
1. 질 문 - 여러분의 삶의 법은 무엇입니까 ?
I. 서 론
오늘날의 특징은
① 여러 종류의 교회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잘못된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첫번째로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교회)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5)
② 교회도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색이 오래 되면 변합니다.
그와 같이 교회도 시간이 가면서 그 본래의 모습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상적인가 늘 시험해봐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서 확실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신앙과 우리 교회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하여 산상수훈을 앞으로 강해설교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구원한 자들과 교회들이 지켜야할 법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과 교회의 법은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으로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시험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II. 본 문
우리는 (마5-7)을 일반적으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가면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팔복산에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곳에 ‘팔복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수훈(垂訓)이란 말을 씁니다.
이 수훈(垂訓)은 뒷세상에 전하는 교훈이란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교인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지만, 우리에게까지 전하시는 교훈이란 말씀입니다.
아니 영원히 교회의 법은 산상수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우리의 신앙의 기준과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둘 다 예수님의 치료에 대한 종합 후에(마 4:24-25; 눅 6:17-19) 나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과 불치의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수리아,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강 건너편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러자 모든 앓는 자 즉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자들의 신앙이 정체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인의 모습, 즉 천국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의 신앙이 여기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어 교인이 된 자들은 천국 백성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을 천국백성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교인이 된 자들은 이제는 산상수훈의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천국 가는 자들을 양육하는 곳이라면 이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교회는 천국백성을 양육하는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는 것은 새로운 법이 생기면 바뀝니다.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은 법이 바뀌면 됩니다.
내가 변화되기 원하면 나의 법이 바뀌면 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천국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백성의 법을 주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세상 사람들을 천국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산상수훈 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이 법을 주셨습니다.(v.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이 새로운 법을 주시는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벡성들을 위하여 십계명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울 나라의 법을 하나님께 받아서 전달해 주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의 법을 시내산에 올라가서 받은 것과 같이, 예수님도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교인들을 위한 법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산에 올라가서 이 법을 주신 것은 이 법은 사람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법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아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교인들을 팔복산에 불려 올려서 직접 그들이 지켜야 할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법은 바로 이 예수님이 주신 법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머리에 팔복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첫번째는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이 헌법과 같이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주시는 법의 처음도 팔복입니다.
이 팔복은 율법의 십계명과 같이 산상수훈의 헌법과 같은 근간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근간입니다.
우리는 오복(五福)을 이야기 합니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며, 덕을 행하는 것.), 고종명(考終命)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팔복입니다.
원래는 이 복은 구복입니다.
그런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팔복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는 구복(九福)을 같은 것으로 봐서 즉 구복(九福)은 팔복의 설명으로 봐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팔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고, 구복(九福)은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다른 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신 복, 즉 천국 백성의 법의 원칙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 천국과 이세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1. 세상의 복은 고난 없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복은 고난을 통하여 얻는 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천국의 원리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오복과 팔복의 차이 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천국의 원리는 복은 고난을 통하여 얻는 것입니다.
곧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그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세상의 복은 현재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복은 미래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시제는 다 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복과 팔복만 현재로 되어 있고, 나머지 여섯 개의 복은 다 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이렇게 얻게 되는 복은 다 현재의 고난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에 천국을 위하여 오늘을 고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부자는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간 이유는 다른 것이 없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고,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복은 미래에 얻는 것인데, 이땅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롬 8:1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
미래에 천국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에 고난도 함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의 법은 지금 여기에서는 고난을 통하여 미래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 어떤 유명한 부흥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 친구 중에 경제 불황 때 직장을 잃고, 꽤 많은 재산을 잃고, 아름다운 집을 잃은 친구가 있다. 불행하게도 그는 귀한 아내까지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어느 날 직장을 찾기 위하여 걸어가고 있을 때 큰 교회에서 석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멈춰 서서 지켜봤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삼각형의 바위 덩어리에 끌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어디에 얹으려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석수는 “저 첨탑 옆에 있는 작은 빈공간이 보입니까? 나는 이 돌을 저 위에 있는 곳에 맞게 하기 위하여 여기 아래에서 그 모양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를 떠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석수가 하는 말을 통하여 그의 고난의 상황에 새로운 의미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지금 이땅에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장차 천국 백성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3. 이 복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 됩니다.
이 복들은 이땅에서 성취되는 복들이 아니라, 천국에서 성취되는 복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면
① 천국이 저의 것이 된다.
② 위로를 받는다.
③ 땅(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④ 만족을 얻는다.
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⑥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장 복있는 성도와 교회와 가정은 천국이 이루어진 교회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과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을 이 땅에서도 받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나 자신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세운 교회와 교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왕으로 주님으로 오시는 자들입니다.
4. 천국백성의 특징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
예수님이 원하는 천국백성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
① 이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붙쫓는다.
즉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②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③ 세상이 박해를 해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들이다.
④ 어디를 가든지 화평케 하는 자들이다.
천국백성은 모든 자들과 화평해야 합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귀 사단의 백성들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천국 백성의 법을 여러분의 법으로 삼으셔서, 천국백성으로 날마다 성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질 문 – 팔복에 대하여
I. 서 론
지난 시간에 이어서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산상수훈의 서론적인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팔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II. 본 론
제1복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v. 3)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눅6:20)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 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부자가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부요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떻게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희랍어로 프토코이(πτωχοι)라는 말인인데, 이것은 원래 가난한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변호해 주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① 자기 자신에도 의지할 것이 없으면 ② 세상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의지할 곳이 하나님 한분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Goodspeed는 이것을 이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이들은 ① 육적으로 비참할 뿐더러 ②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사61:1) ③ 그리고 영적으로 궁핍함을 느끼고 있다. 즉 이 가난한 자는 영과 혼과 육의 모든 면에 있어서 궁핍함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즉 영과 혼과 육이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 즉 영과 혼과 육을 다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한 분 밖에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영과 혼과 육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어떻게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실까요 ?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요한 자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탕자가 돈이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가난하게 되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가난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오고, 하나님의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천국의 소유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저희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나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살기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하나님 없으면 못산다고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품을 떠나가지 말고 하나님 품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을 받아 부요하게 되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제2복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v. 4)
이 복도 세상의 상식하고는 반대가 됩니다.
세상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데 하나님은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는 불쌍한 자인데, 어떻게 그런 자가 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자를 불상하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이 있다고 하실까요 ?
이 말씀의 핵심은 “애통한다”는 말에 있습니다.
“왜 이들은 애통하는가?”에 핵심이 있습니다.
이들이 애통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① 자기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죄를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회개하는 것입니다.
② 세상의 악이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악이 있습니다.
세상의 악한 모습을 볼 때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
이들은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위로를 받기 때문일까요 ?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왜 복일까요?
(사 61:2; 눅 2:25)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는 최고의 복(bliss)의 해가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우리에게 최고의 복의 해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베데스다 연못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요 5:1-9).
그는 그곳에 38년을 있었으나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고침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화가 났으나 시간이 가면서 자기 처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환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럴 때 위로의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일생에 최고의 복된 해가 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자기의 죄와 세상의 죄를 보고 회개하는 자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십니다.
또한 세상의 악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자를 찾아가서 위로하십니다.
제3복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① 어떤 사본에서는 제2복의 (v. 4)과 제3복의 (v. 5)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첫 번째 복인 가난한 자와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가 나란히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를 같은 자로 만들려고 한 것 같습니다.
② 제3복인 (v. 5)을 (시37:11)에 기초한 제1복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시37: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에 대해 이 (시 37:11)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석한 것이 제3복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자들은 결국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8복이 7복이 되거나 아니면 (vs. 11-12)에 나오는 것을 하나의 복으로 해서 8복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 제3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는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
온유하다는 말은 프라에이스(Πραεις)라는 말인데, 이것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온유라는 말은 부드럽다 혹은 신사적이라는 말과 연관을 짖는데, 원래는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러한 온유한 자의 대표는 모세입니다(민 12:3).
하나님은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어떤 면을 보고 최고로 온유한 자라고 하셨을까요?
모세가 구스(오늘날 에디오피아)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러자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모세를 비방했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대적한 이유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① 구스 여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니다.
② 모세만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보자냐는 것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첫번째는 그냥 삽입된 것으로 보고 두번째가 진짜 문제인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통치권과 주권에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에 대하여 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지도자이고, 하나님이 자기와는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셔도 그것을 갖고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그 미리암 누님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어떻게 자기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
모세는 형님과 누님 위에서 교만한 눈으로 누님과 형님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자기를 나일 강에 버렸을 때에 자기를 지켜보았던 누님, 바로 왕의 공주에게 엄마를 소개해줘서 자기로 엄마 품에서 젖을 먹게해준 누님으로 지금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고 누님과 형님을 높이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 때문에 모세는 자기를 욕하고 도전하는 형님과 누님에게 대항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자세가 온유한 자세 입니다.
온유한 자는 이렇게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갖고 삽니다.
시각도 겸손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됩니다.”
이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즉 메시야가 오심으로 회복되는 땅입니다.
이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이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주십니다.
제4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의에”라는 말은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눅 6:21)에서는 “이에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의에 주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어서 그들의 결백함을 증명해 줄 의를 갈망하고 있다.(눅18:7; 사62:2)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속상해서 매일 재판관에게 가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의 의가 인정되고 증명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의에 주린 자들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② 올바르게 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잠21:21)
의롭게 되기 위하여 애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의롭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③ 의를 성취하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 하려고 하고 있다.
즉 자기들의 힘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의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들은 겸손해 집니다.
이것과 가장 가까운 공관복음의 말씀은 (눅18:9-1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바로 이 세리와 같은 자 입니다.
이런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배부르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배부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만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기도에 응답을 받고 만족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힘과 공로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이세상의 삶이 만족이 있는 천국의 삶이 될 것입니다.
3. 질 문 - 예수님 때움에 욕을 먹어봤습니까 ?
I. 서 론
계속해서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제5복부터 제8복까지 살펴보겠습니다.
II. 본 론
제5복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긍휼히 여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행한 것과 같은 것 입니다.(눅 10:37)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을까요 ?
선한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 것은 남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의 불행을 남의 불행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불행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남의 아픔을 내 아픔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② 아버지가 간질하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17:15)
아들이 간질하는 것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간질하는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더 마음 아프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천국백성의 마음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의 마음의 자세는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 자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건 안믿건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형제자매의 아픔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자들이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받는 복은 무엇일까요 ?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긴다는 긍휼, 엘레오스(ἔλεος)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뜻은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그 정도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과 같이 여기고 긍휼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여기고 긍휼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들을 남으로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남으로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같이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제6복 :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랍비 문학에서는 없었던 말입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셈족의 언어에서 마음은 감정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셈족의 언어에서는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감정까지도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복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우리가 마음대로 못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순결한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는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자들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합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②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입니다.(골 3:22; 약 4:8)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깨끗한 마음이 아닙니다.
더러운 마음은 두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가룟 유다는 두 마음을 품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어떤 복을 받게 될까요 ?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신비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이 보인다 보인다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①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뵙게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입니다(시 42:2).
이것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족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2)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살아서 성전에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② 이것은 종말에 그들이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계 22:4)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
제7복 :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어떤 자를 말할까요 ?
①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할려고 하는 자입니다.(시34:14)
어떤 사황에 있던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던지 평화하려고 하는 자를 말합니다.
②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사람들과 평화하는 자는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자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③ 원수하고도 평화하는 자입니다.(마5:44-45)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과 같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원수하고도 평화할 수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적극적인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싸움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적극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화평케 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이나 신적인 존재들을 이야기 합니다(욥 38:7).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런 신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신 32:6).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의 대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곳이 또한 천국입니다.
제8복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임이요.
① 이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라 했고, ② 이어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그런데 (눅 6:22)에서는 “인자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④ 칼빈의 제자인 베자(Bezae)가 게임브리지대학에 기증한 5c~6c의 사본이 있는데, 그것을 베자 사본(Codex Bezae)라고 하는데, 그 사본과 옛 라틴어(O.L.) 사본들 중에 어떤 사본에는 (v. 11)에도 “나를 인하여”를 “의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8복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왜 “나를 인하여”라는 말을 넣었을까요 ?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저들이 저렇게 핍박을 받는 것은 혹시 저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잘못된 예수에게 속아서 저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자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라는 말과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라는 말을 같이 함으로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이 잘못해서 그렇거나, 예수님이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의로운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것은 우리가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
① (마 10:32-33)에 나오는 것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욕을 먹는 것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②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다가 보면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의로운 말씀대로 살다가 보면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풀무불 속에 던져넣겠다고 하고, 사자굴에 던져넣겠다고 해도 그들의 신앙을 굳게 지킨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떤 박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젊은 지도자를 양육하는 Lieghton Ford Ministries의 총재이며, 미국 World Vision 이사인 리톤 포드(Lieghton Ford)가 그의 책 Good News is for Sharing이란 책에 이런 글을 썼다.
로마에 있는 황실 급사들을 양성하는 학교의 유적지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3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발견했다. 그림에는 한 소년이 서서 그의 손을 들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쓴 사람 같이 보이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경배하고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휘갈겨 쓰여져 있다. “알렉사메노스(Alexamenos)는 그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번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Alexamenos는 신실하다.” 분명히 기독교인인 한 젊은이가 그의 열심있는 전도 때문에 그의 급우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신실했다.
이것이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받는 상급은 무엇일까요 ?
(v. 10)에서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v. 12)에서는 “하늘에서 저희 상이 큼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은 제1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도 받는 복입니다.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게만 살아도 천국을 상급으로 받는데, 굳이 힘들고 어렵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복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그것이 가장 큰 상이 있는 삶인 것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그런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