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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32,15-24.30-34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올리베따노회 수도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태 13,31)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늘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으로 형제들 앞에 늘 작은 자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겨자씨를 뿌리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겨자씨는 하늘나라인데 어떤 사람이 그 씨를 자기 밭에 뿌린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요소는 ‘어떤 사람’과 ‘겨자씨’와 ‘자기 밭’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겨자씨 곧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주어지고 너에게도 주어지는 것으로서, 누가 심든 주어지는 대로 겨자씨를 심기만 하면 그 씨는 크게 자라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씨가 중요합니다.
사실 씨란 겨자씨뿐 아니라 모든 씨가 작고, 작지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겨자씨 곧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린다거나 악마의 씨를 뿌린다거나 욕망이라는 씨를 뿌릴 경우, 그때가 문제이고,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면 자기가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고,
악마의 씨를 뿌리면 악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며,
욕망이라는 씨를 뿌리면 욕망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밭’이 자기 마음일 수도 있지만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씨를 심으면 자기 교회는 하늘나라로 성장하지 않고, 자기 소유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고, 자기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개신교의 많은 대형 교회가 이런 식으로 커진 교회이고, 가톨릭의 경우엔 성당이 사제 개인의 소유는 아니지만 본당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는 사목이 아니라 자기가 왕인 양 자기 중심의 사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곧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목이 아닌 겁니다.
자기 사업이나 계획도 하느님 사업이나 계획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달아놓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사업이 번창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과 식당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항상 경계하고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형제회의 작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가 자기 수도회가 될까 봐 조심하였고, 작은형제회가 큰 수도회가 될까 봐 더 조심하고, 그래서 형제들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것도 걱정했습니다.
사실 수도회가 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제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프란치스칸다운 프란치스칸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끔 얘기하듯 저와 같은 사람 수만보다 프란치스코 성인 한 분이 세상을 진정 복음화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 안에, 다음으로 우리 공동체에 복음의 겨자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순리가 지배하는 곳>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 대가리와 뱀 꼬리라는 말로, 시작은 요란하고 그럴 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이 흐지부지 흐려지는 것을 빗대어 말합니다.
반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감한 사람은 시작은 잘 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아예 시작조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점점 거창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거창해지는 일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 속에서 부풀어 오릅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면에서 시작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 기쁨으로 말씀을 행하게 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가 아니라 순리를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큰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인간의 일일 뿐이고,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잘난 척하면 헐뜯는 사람이 생기고, 아는 척하면 무시하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리고 힘센 척하면 해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척하면 뺏으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법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모두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큰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반드시 큰일을 위한 준비가 되느니 만큼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큰 나무를 감추고 있고, 조그마한 누룩 덩어리는 위대한 능력을 이미 지녔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누룩은 때가 되면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있으면 성장합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를 얻기까지는 햇빛과 비, 그리고 거름도 필요합니다.
주변의 잡풀을 뽑아주어야 하고 땀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영양을 제대로 취할 수 있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나뭇가지에 깃들이듯 우리도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이의 휴식과 안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수고와 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열매를 주고 싶어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튼실한 열매를 수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하느님의 에너지가 있고 겨자나무가 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주간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란트를 찾고 가꾸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나에게 주어진 몫이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때가되면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강론에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저는 강론에 항상 비유를 하나 이상 찾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치실 수밖에 없으실까요?
모든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은 율법 학자가 꺼내는 옛 것과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유입니다.
옛 비유를 새 비유를 통해 가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왜 강론에 비유가 들어가야만 진정 비유를 이해한 제자가 되는 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오늘 비유 말씀을 이해해 봅시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비유 중 겨자 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하면 조금 해석이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 놓은 해석은 조금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 씨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면 이웃 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힘들고 쉴 곳이 없는 이웃들이 나에게 와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 서 말일까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처럼 교만한 사람과 돌밭처럼 육체적인 사람과 가시밭처럼 돈 걱정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속, 육신, 마귀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수록 그 성향들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밭이 됩니다.
그래서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60배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생존 욕구가 줄어들게 만들어 이웃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멍에를 주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기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모기는 이웃을 찔러 달아나게 만듭니다.
쉼을 가진 사람만이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꿀을 먹어본 이가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맛에 관해 설명할 때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꿀맛은 마치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설탕물처럼 달며, 꽃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다고 꿀이 연인들의 사랑의 맛은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며 꽃 향기와는 또 다릅니다.
만약 이것들을 각자 해석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꿀맛은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탕물이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꽃으로부터 왔으니 꽃 향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잊습니다.
먼저 그 사람이 말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꿀은 맛있습니다.”
꿀맛을 보지 못한 이들은 꿀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자신들을 무시하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꿀은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게 맛있구나! 설탕물처럼 달구나! 꽃 향기가 나는 맛있는 무엇이구나!’
하늘 나라의 비유도 상당히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도 하나의 개념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늘 나라는 결국 성령으로 누리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 나라 비유의 개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모의 희생으로 오는 선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말하려는 개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하려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때 비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꿀을 먹어본 사람이 그 꿀이 맛있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꿀을 먹어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이해함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비유, 곧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모기와 예수’라는 비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더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나라를 순종으로 체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비유를 모두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알려주는 율법교사가 됩니다.
율법교사가 되면 먼저,
1.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그 개념을 비유 말씀을 통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 다다르기 위해 비유의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를 이해했다면 용기를 내서 그분께 순종하고 자신도 그분이 이끄시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4. 자신을 이끌어준 비유를 설명하되 새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기 위해 희생합니다.
그들이 그 비유를 말하는 이를 신뢰하게 된다면 그들도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율법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교우들의 영성 생활 쇄신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영신 수련에 초석을 놓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의 기념일입니다.
만년에 도달한 이냐시오가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참으로 놀랍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운 결심을 단 한 번도 뒤로 미룬 적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냐시오는 개신교 출현으로 흔들리던 중세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는 데 가장 앞장 섰던 돌격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외쳤고, 그 표현은 오늘날 예수회 회원들의 모토처럼 되었습니다.
이냐시오의 전기를 모두 읽고 난 후 제 머릿속에 딱 남은 성경 구절이 있었는데, 루카 복음 12장 49절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냐시오의 생애는 그야말로 불꽃 같은 하루하루였습니다.
그의 이름 이냐시오가 지닌 의미 역시 ‘타는 불’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분열의 위기 앞에 목숨조차 내건 투쟁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너져가는 교회의 수호와 재건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에 걸맞은 수도단체인 예수회의 설립과 제자 양성에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친 열정적인 생애를 살았습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급격히 약화되어 가는 당시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불꽃을 일으키기 위한 헌신의 날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습니다.
이냐시오의 성소 여정의 동기가 된 사건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는 원래 사제나 수도자가 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 큰 공을 세우고,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야심으로 가득 찼던 청년이었습니다.
묘하신 주님께서는 이런 이냐시오를 눈여겨보시고, 총애하시고, 그를 당신의 애제자로 발탁하십니다.
이냐시오 개인에게 있어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속적 야심으로 가득 찬 그에게 깊은 바닥 체험을 시키시고, 그 바닥에서 그를 당신의 병사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이냐시오가 서른 살 되던 해,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에 참가하여 팜플로나라는 요새를 수비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이냐시오는 폭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워낙 큰 부상이었기에 치료도 어려웠고, 후유증이 상당했습니다.
꽤 긴 투병 기간이 필요했었는데, 그 시기 이냐시오는 워낙 심심한 나머지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게 되었는데, 그때 만난 책들이 여러 성인들의 성인전, 그리고 카르투시오 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애’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로 읽었는데, 조금씩 흥미를 느끼고, 마침내 온전히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회의감이 일기 시작했고, 현세의 허무함을 느끼는 동시에 드디어 영적인 눈을 서서히 뜨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냐시오의 삶은 180도 뒤 바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국왕의 용맹한 병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병사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제 양성 과정을 이수하느라 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꿈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 이냐시오는 선한 의지를 지닌 동료들을 규합하여 교회 쇄신 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1529년 두 제자가 생겼는데, 성 베드로 파브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냐시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이단자 취급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런 순간에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은 구경꾼이 아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함부로) 판단해서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시작 단계만 보고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포함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이라는 말씀은 “인간들은 어떤 일의 시작 단계에서 그 일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실망하고 포기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그 일들은 전체 인류에게 내리는 은총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겨자씨의 비유’의 한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창세 15,5)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창세 17,4-5)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세속의 눈으로 보면, 정말로 보잘것없는 떠돌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고(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작은 겨자씨를 심으셨고, 그 씨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마태 28,19-20)
그 당시에 사도들이 이스라엘 밖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을까?
혹시 있었더라도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령강림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모든 민족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긴장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두려워하고, 또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이라는 밭에 사도들이라는 작은 겨자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씨만 심으신 것이 아니라, 그 씨가 잘 자라도록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고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의 겨자씨로 심어진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성장하려고, 또 성숙해지려고 노력해야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게만 보이는구나.” 라고 감탄하기만 하고,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구경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일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집’이고, ‘나의 집’입니다.
‘밖에서’ 구경만 하는 구경꾼은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누룩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뜻은 같은데,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누룩의 비유’는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신앙인은 모두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누룩입니다.
우선 먼저 할 일은 자기 자신이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세상을 복음화 하려면 ‘나의 복음화’가 먼저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복음화’의 반대말은 ‘세속화’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또는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 하기는커녕 세속화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패를 발효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 나라의 삶 -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관상적 삶입니다.
너무 시끄럽고 분주한 세상입니다.
자기를 잃고, 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가 하늘 나라의 관상적 삶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평생 관심사는 하늘 나라였고 활동가 이전에 사랑의 관상가였음이 드러납니다.
사랑의 관상가에 이어지는 사랑의 활동가 이것이 답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예수님의 관상적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고요중에 놀랍게 새롭게 펼쳐지는 삶의 기적은 얼마나 많은지요.
매사 침묵중에 깨어 잘 살펴보며 기다려야 함을, 하느님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고 잘 도와 드려야 함을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요히 바라보며 잘 협조해드리는 일뿐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이 필요할 뿐입니다.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제때에 맞춰 가꾸고 돌보는 일만하면 됩니다.
아무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막을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잘 협조하면 됩니다.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 누룩의 비유도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밀가루를 부풀리는 누룩의 효소처럼 하늘 나라도 그렇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침묵중에 깨어 기다리며 섬세히 살펴봐야 하는 그대로 관상적 활동의 삶입니다.
말씀도 개인도 공동체도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겨자씨처럼 고요한 변화중에 놀랍게 성장하는 말씀의 겨자씨, 개인의 겨자씨, 공동체의 겨자씨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누룩처럼 주변을 사랑으로 기쁨으로 희망으로 평화로 부풀리는 말씀의 누룩, 개인의 누룩, 공동체의 누룩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적절한 예가 여기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이제 잘 성장하여 많은 이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었고, 세상을 부풀리는 희망과 기쁨, 사랑의 누룩이 되었습니다.
정말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때를 기다리며 순리대로 살 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겸손한 인내의 기다림이, 고요히 깨어 살펴보며 하느님 하시는 일에 경탄하며 겸손히 협력해 드리는 관상적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온힘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절대적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하느님의 일에 잘 협력해 드릴 때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관상과 활동이 통합된 하늘 나라를 사셨던 두 분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이요, 이런 세상에 대한 놀라움, 새로움의 관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입니다.
결국은 기도와 말씀 공부로 이어집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의 삶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잘 자란 사랑의 겨자나무와 같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를 위한 사랑의 누룩같은 모세의 존재입니다.
다시 상황이 어려워지자 하느님의 은혜를 잊고 현실의 우상을 택하는 구제불능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시는 하느님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기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하느님과 대담히 담판하는 듯한 모세의 모습에서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더불어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배웁니다.
다음 모세의 기도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주십시오.”
진정성 가득한 배수진을 친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의 분노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모세만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사랑의 겨자나무와 같고 사랑의 누룩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성인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었던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그대로 하늘 나라를 사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에도 참 잘 어울리는 성인입니다.
성인의 작은 겨자씨는 지금도 거대한 나무로 자라고 있는 나무가 되었고, 성인의 복음의 누룩, 사랑의 누룩 역시 지금도 예수회는 물론 교회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생생한 증거가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깃들이는 큰 복음의 겨자나무가 되었고, 교회를 세상을 부풀리는 복음의 누룩이 되어 살고 계신지요!
늦은 나이 46세에 사제품을 받은 성 이냐시오의 삶도 감동적입니다.
성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으며 수면 시간은 3시 간에 불과했고, 많이 기도하고 고신극기했으며 소박한 음식에 만족했다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며 온순했고 매우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습니다.
성인의 개인 생활 원칙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는 예수회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인처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살 때 관상과 활동의 통합된 삶과 더불어 계속 성장하는 복음의 겨자나무로, 계속 공동체를, 세상을 부풀리는 복음의 누룩이 되어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장하는 희망과 기쁨, 사랑의 겨자 나무가, 성숙시키는 누룩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크루즈 여행 중에 ‘직원 장기자랑’을 보았습니다.
직원들 중에 장기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공연하였습니다.
노래, 악기연주, 춤, 봉체조, 코미디를 선보였습니다.
전문가들이 보여 주었던 화려한 조명과 의상은 아니었지만 직원들의 ‘끼와 재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팬데믹 때 저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위해 ‘피아노’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20년 겨울 동북부 엠이 송년모임에서 ‘모두가 사랑이예요.’를 녹화해서 들려드렸습니다.
부족한 연주와 노래였지만 제게도 그런 재능이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23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탄 전야 미사 전에 본당 장기자랑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과 ‘하얀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하얀 성탄을 불러서인지 2000년 성탄 밤 미사가 끝나니 눈이 무릎까지 왔습니다.
성당버스도 운행할 수 없었고 우리는 모두 성당에 남아 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예수님의 성탄을 밤을 새워 축하했습니다.
신부님들 중에는 전문가 수준의 ‘끼와 재능’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명구조 요원’ 자격증이 있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크로아티아 드브로닉으로 여행 갔을 때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들었고, 즉시 바다로 뛰어들어 한국 여성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인명구조 요원이 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벽돌을 손에 들고 바다 위에서 한 시간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근력과 힘이 있어야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경침과 수지침’을 전문가 이상으로 배운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맥시코로 가서 원주민들을 도와주기도 했고, 매년 미국에 와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건강한 몸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끼와 재능은 아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공존의 그늘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동창도 있습니다.
10년을 교정사목을 위해서 일하였고, 출소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출소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고시촌에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그의 기도와 영성으로 교회에 큰 선물을 남겨 주었습니다.
‘영신수련’이라는 기도방법입니다.
영신수련의 내용은 잘 모를지라도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는 알 수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영신수련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절대반지’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두개의 탑’은 그리스도의 깃발과 사탄의 깃발의 대결입니다.
‘왕의 귀환’은 종말이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영신수련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길잡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복음 선포,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여정을 영신수련의 안내에 따라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두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겸손의 3단계’를 통해서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영신수련은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며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잘못을 했음에도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2000년부터 영신수련을 통한 30일 피정을 함께 했으니 어느덧 23년이 되었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왕복 200킬로를 달려서 기도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화려한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 속 어두운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가 있어야 하듯이 영신수련은 제 삶의 뿌리와 같았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무익하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장기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7월 31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여러분의 ‘장기’가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요?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999년 가족 여행으로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에 나간 것이지요.
더군다나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자리여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음식까지도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그때 정말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쌀국수입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저였기에 아주 맛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국물에서 심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 쌀국수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고수’라는 풀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 나는 풀을 넣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거의 25년 전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신부들과 종종 베트남 식당에 가서 쌀국수를 먹습니다.
그런데 “고수 빼고요~~~”라고 말하지 않고, “고수 많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고수와 쌀국수가 입에 함께 들어왔을 때의 맛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고수가 있기에 쌀국수의 맛이 배가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99년의 저는 고수를 즐겨 먹는 지금의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맛의 취향이 이렇게 바뀝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단정 지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일 리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어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당시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설명해주시지요.
즉,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지금 삶에서 하늘 나라를 매번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습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씨앗이 이렇게 작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라면 그 작은 씨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로 변합니다.
누룩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적은 양으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밀가루 서 말 속에 아주 적은 양만을 넣어도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겨자씨만 가지고 큰 나무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누룩만을 가지고도 부풀어 오르는 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지혜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었을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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