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자락의 폐사지 개선사터
답사를 다녀온 뒤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런 곳 중 한 곳이 무등산 자락의 개선사지다. 절은 사라지고 석등 하나 덜렁 남아 있는 개선사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있다. 이곳은 1914년에 담양에 편입된 창평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개선동과 의지곡, 학미동 일부를 병합하여 학선리라고 지었다. 이곳 학선리에 있는 폐사지가 개선사이고, 이곳에 보물로 지정된 잘생긴 석등 하나가 남아 있다.
석등은 불교 의식을 거행할 때 필요한 도구일 뿐 아니라 불법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인데, 대체적으로 대웅전 앞에 비치되어 불을 밝혔다.
부석사 무량수정 앞에 세워진 석등이나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그리고 임실의 폐사지 진구사지 석등을 생각나게 하는 석등이 개선사지 석등이다.
어느 때 세웠고, 어느 때 폐사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 개선사터에선 사라진 절에 대한 별다른 흔적이나 기록은 찾을 수가 없고 오로지 이 석등 한기만 남아 있을 쁀이다.
1089년부터 1991년까지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서 있는 개선사 터의 석등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높이는 3.5m이고 보물 제 11호이다. 이 석등의 아랫부분은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는데, 간주석 위로는 비교적 원형이 완전히 남아있고 간주석 중간 부분에 하대석, 하대하석 들은 복원 당시 손질을 거쳤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마다 안상이 새겨진 팔각 하대하석을 놓고, 그 위에 복엽 연꽃 여덟 장을 엎어 새기고 꽃잎 끝마다 여덟 개의 귀꽃을 세운 하대석이 있다. 여기까지는 복원할 때 보완된 모습으로 원래의 모습은 손상되어 명확히 밝힐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통일신라 후기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한 장구 몸통 모양의 간주석이 얹혀 있으며, 간주석 위에는 역시 여덟 장의 양련을 새긴 상대석이 놓였다. 다시 그 위에는 아래위에 도드라진 띠를 돌린 팔각형 화사석 괴임이 끼여있는데, 이 또한 통일신라 후기 석등의 특징이다.
화사석은 팔각형이며 각 면마다 모두 화창이 뚫려있다. 이렇게 화사석 전면에 화창이 있는 것은 모든 부재가 하나같이 팔각형을 이루는 전형 양식에서는 볼 수 없고 고복형 간주석을 가진 석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화사(火舍)의 팔각기둥에는 모두 136자의 해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체는 북위와 초당의 글씨가 융합된 것으로서 서풍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우리나라 서체의 변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것이다.
한 기둥에 각각 두 줄씩 10행에 걸쳐서 명문을 기록한 명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행에서 6행까지는 868년에 경문대왕과 문의왕후(文懿王后), 큰 공주가 주관하여 승려 영판(靈判)이 석등을 건립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7행에서 10행까지는 891년에 추가한 것으로 승려 입운(入雲)이 석등의 유지비를 위해서 곡식 100석으로 오호비소리(烏乎比所里)에 사는 공서(公書)와 준휴(俊休) 두 사람이 논을 매입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선사지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유일하게 명문이 있어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석등으로, 비슷한 다른 석등의 연대를 추정하고 비교하는 데 표준이 되는 귀중한 작품인데, 석등기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경문대왕(景文大王)님과 문의황후(文懿皇后)님, 그리고 큰 공주님께서는 등불을 밝힐 석등을 세우기를 바라셨다. 당(唐) 함통 9년 무자해 2월 저녁에 달빛을 잇게 하고자 전(前) 국자감경(國子監卿)인 사간(沙干) 김중용(金中庸)이 (등을 밝힐) 기름의 경비로 3백석을 날라 오니 승려 영판(靈判)이 석등을 건립하였다.
용기(龍紀) 3년 신해년 10월 어느 날 승려 입운(入雲)은 서울에서 보내준(또는 서울에 보내야 할) 조(租) 1백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 두 사람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石保坪) 대업(大業)에 있는 물가의 논 4결[논은 5뙈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영행(令行)의 토지이고 북쪽도 마찬가지다. 남쪽은 세택(洗宅)의 토지이고, 서쪽은 개울이다]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논은 8뙈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영행의 토지이고, 서쪽도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세택의 토지이다]을 영구히 샀다.“
개선사 석등 명문기의 7행에서 10행까지의 내용은 일종의 토지매매문서의 성격을 기록한 것인데 이와 비슷한 사례를 공주 무령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71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왕릉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무덤 입구의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명문 내용에 왕과 왕비가 묘지를 살 때 계약한 매지권에 실려 있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 무령왕 생전의 호칭)이 62세가 되는 계유년(523)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에 장사 지내고 다음과 같은 문서를 작성한다.
‘돈 1만 문(文)과 은 1건(件)을 주고 토왕(土王), 토백(土佰), 토부모(土父母)가 상하 지방관의 지신(地神)들에게 보고하여 왕궁 서 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
무령왕릉 묘지석을 통해 백제 시대에 죽은 자를 위한 토지 매매 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개선사 석등이 조성되던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토지매매의 관행과 토지의 종류, 그리고 토지의 소유관계 및 생산력 등 사회경제사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는 말로는 이 석등이 개선사 뜰의 연못 가운데에 있었으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이면 밤마다 붉이 밝혀져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불이 멈춰진 지 오래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면 오랜 세월 침묵한 채 세상을 바라보았던 석등이 문득 입을 열고 지난한 세월 속 이야기를 풀어낼 것 같은 문화유산이 개선사지 석등이다.
2025년 9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