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편지] 다시 걸음마 / 이경애
발행일2019-06-23
[제3150호, 22면]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마 전부터 ‘파일 첨부’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누르다 보면 될 때도 있지만, 마우스를 누르는 대로 땡땡 소리가 나다가 어느 순간 화면이 멈추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 며칠 전에도 짧은 글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아 파일 첨부 대신 이메일(e-mail) 내용을 쓰는 본문 자리에 ‘붙여넣기’해 보냈다. 양해를 미리 구하긴 했지만, 부끄럽고 속상했다.
오래전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전문가가 다녀갔는데 바탕화면에 있던 자료 하나가 사라졌다. 전화로 물어보니 전문가는 “다른 건 아무것도 건드린 게 없다”며 내 실수일 거라고 했다. 나도 별달리 실행한 게 없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아는 게 없으니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잘 쓰던 휴대폰이나 노트북 문서 작성 화면에 낯선 문자가 뜨면, 머뭇거리다 그냥 전원을 끈다. 다행스럽게도 한참 후에 다시 전원을 켜면 원래대로 돌아와 있곤 했다. 해결 방법을 몰라 난처할 때마다 “이것 좀 봐 줄래?” 하면 언제든지 도와주던 두 아들이 그립다.
큰아들은 하늘나라로, 해외선교에 뜻을 둔 작은아들은 사제가 돼 이 나라를 떠났다. 빈소에서, 서품식에서 수없이 되뇌었다. ‘하느님, 왜요?’ 전래동화 「짚신장수와 나막신장수」의 어머니처럼 위로의 말도 축하의 말도 귓가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은 채 하느님만 원망했다. 아주 오랫동안….
“자매님은 죽음을 잘못 생각하고 계시다”라는 신부님의 고해소에서의 말씀과 “레지나씨는 지금 신앙인의 얼굴이 아니에요”라는 수녀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날과 달, 해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느님은 이미 나를 일으키셨고, 성모님은 묵주 잡은 내 손을 이끌어 함께 걷고 계심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네 살에 아빠를 잃은 손녀와 서른 초반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의 아픔을 돌아보고, 부제품을 앞두고 형을 잃어 진로결정으로 고심했을 아들의 번민도 헤아려 보게 됐다. 나만의 기도로는 결코 안 될 일이었음을 알았고, 많은 분의 기도가 하느님께 닿았음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신앙 안에서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신앙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휴대폰과 노트북은 물론 일상에서 나를 주저앉히는 일은 어떤 모양으로든 매번 나타나게 마련이라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밝고 활기찬 손녀가 “아빠 없는 애 같지 않다”는 말을, 며느리가 “남편도 없는데 직장에 안 다녀도 잘 산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을 때 가슴이 쓰라렸다. 사는 동안 얼마나 더 이 말을 들어야 할까. 생각만 해도 나는 번번이 휘청거린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 왜요?’라면서 따지니, 여전히 믿음이 깊지 못하다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다시 걸음마를 시작할 것이다. 내게 맞는 컴퓨터 교육을 위해 강사와 의논하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더 정성껏 할 것이다.
복사단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손녀와 ‘쉬는 교우’에서 ‘초등부 교리교사’가 된 며느리, 하느님께 받은 음악적 재능으로 캄보디아에서 미사곡을 작곡, 보급하는 데에 힘쓰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굳게 믿나이다. 진심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을 늘 읊조린다.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는 없지만, 순순히 믿고 따르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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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애(레지나)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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