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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은 1999년, 악질적 원균 옹호두둔세력인 이희근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함께 쓰면서 이희근의, '원균이 일등공신이 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공이 있었다'거나 '원균은 북인으로 간주되어 서인에게 폄훼당했다'는 인과역행형 말장난을 제외한 대부분의 말장난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이덕일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와, 자신이 시사저널에 연재 중인 <칼날 위의 역사>를 통해 선조와 권율을 끌어들여 칠천량 참패서 원균의 책임을 희석시켰다. 다음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200쪽의 일부다.
재미있는 것은 칠천량해전 때 토벌 불가를 외치는 원균을 윽박질러 전투에 나서게 한 원수가 바로 권율이라는 사실이다. 선조 32년(1599) 7월 19일 이조에서 도원수 권율의 추증을 건의하자 사관은 권율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정유년 주사의 전투[칠천량해전]에서 아무리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진실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왜적과 대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즉시 보고했어야 했다. …… 권율은 이런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경거망동하면서 통제사 원균을 형장하면서 급하게 독전하였다. 그리하여 6년 동안 어렵게 모은 주사를 하나도 남김 없이 없앴으며, 그 많은 산책 역시 한 곳도 보존하지 못함으로써 적군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호남·호서를 침입하게 만들었다.'
이 다음은 <칼날 위의 역사> 31회의 일부다.
요시라를 통해 이순신을 무력화시킨 고니시는 같은 전술을 원균에게도 사용했다. 원균 역시 "고니시와 요시라가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선조와 원수 권율의 압박에 못 이겨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30년(1597년) 7월 15일 원균은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절영도 전투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그는 거제도 칠천량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전사했고, 전라좌수사 이억기도 전사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본래 조정은 요시라의 첩보에 다음과 같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적의 말은 교활하여 믿기가 어렵고 청정이 이미 대마도에 나와 있으니, 비록 계책을 행하려 해도 미치지 못할까 싶습니다. 신들이 뒷탈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 기회가 이미 늦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원수로 하여금 적의 정세와 시기가 어떠한가를 보아 편의에 따라 수응(酬應)하여 그 일을 성취시키게 하고 불가하거든 그만두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 선조 30년 1월 21일자 선조실록 中 비변사 건의
그러나 '수군을 이끌고 무력시위만 해도 가토가 겁먹고 못 넘어올 것'이라 주장하면서 요시라가 던진 떡밥을 되살리고, 선조가 생떼를 부리며 이순신의 벼슬을 빼앗도록 부추긴 게 바로 원균이다. 이렇게 작전개념을 제시하고 여론도 뒤집은 원균에게 칠천량 참패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왜적의 말은 교활하여 믿기가 어렵고 청정이 이미 대마도에 나와 있으니, 비록 계책을 행하려 해도 미치지 못할까 싶습니다. 신들이 뒷탈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 기회가 이미 늦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원수로 하여금 적의 정세와 시기가 어떠한가를 보아 편의에 따라 수응(酬應)하여 그 일을 성취시키게 하고 불가하거든 그만두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 선조 30년 1월 21일자 선조실록 中 비변사 건의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00~200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 선조 30년 1월 22일자 선조실록 中 원균 서장(書狀)
더구나 위 서장을 올릴 당시 원균은 전라 좌도 병마 절도사를 지내고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군에 비유하면 륙군 군단장(★★★)이 해참총장(★★★★)의 작전 계획에 태클을 건 격이다. 하극상은 물론, 지휘계통 무시에도 해당되어 적전(敵前)에선 최고 사형 판결이 나온다. 그것도 왕에게 직접 징징거렸다는 점에서 그 발언이 다분히 정치적 발언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이렇게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발언을 한 원균이 칠천량 참패의 최종 책임자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안중홍)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고 하였다. - <은봉전서> 中
결정적으로 권율이 원균에게 매질을 한 것은 그의 무능함(부산포에서 성과 없이 약 30척의 판옥선만 잃음)을 문책한 것이지 재출전을 강요한 것이 아니다. 의외로 당시 조선 조정의 작전계획은 함대를 나누어 파상적으로 해상을 교란하라는 것이었지, 총공세를 통해 건곤일척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선조실록 내용들이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 선조 30년 6월 26일자 선조실록 中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 선조 30년 6월 28일자 선조실록 中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 선조 30년 7월 10일자 선조실록 中
그런데 매를 맞고 분을 이기지 못한 원균이 독단적으로 전군을 이끌고 출정해서는 술만 잔뜩 퍼마시다 달아났던 것이다. 이렇게 상부의 작전계획을 사사로이 변경하고 달아난 원균에게 칠천량 참패의 책임이 눈곱만큼도 없단 헛소리, 대화(大和)중심주의 패륜 사학자들의 기득권 사수를 위한 말장난과 무엇이 다른가?
원균은 개전 초기 삼도 수군 중 가장 우월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경상 우도 수군을 홀로 말아 처먹고 달아난 간신이다. 그럼에도 이덕일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부산진성 전투를 간보다 달아난 박홍이 이끄는 경상 좌도 수군과 한데 묶어 마치 경상 우도 수군 또한 왜군의 공격으로 전멸했고, 원균은 어쩔 수 없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고 우기고 있다.
임란 초기에 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경상좌우수영이 거의 궤멸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 이순신과 함께 옥포·당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만 해도 원균과 이순신은 서로 의기가 투합하는 명콤비였다. 『선조실록』 25년 6월 21일자는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와 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대체로 이순신을 주역으로 기술하였지만 원균에 대해서도 공동작전의 한 축으로 적어놓았지 폄하하지는 않았다.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01쪽 中
임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이끌고 있었다. 이 중 최초의 왜군의 상륙 지역이었던 경상좌·우수사 소속의 전선은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으로 출전해 옥포와 당포 등지에서 승전을 거둠으로써…… - <살아있는 한국사 3> 85쪽 中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추서된 것은 순전히 선조의 절대적 원균 사랑 덕분임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칠천량 참패를 계기로 또다시 망국 위기가 찾아왔기에 속으론 원균에 대한 관직 삭탈과 사형 집행을 요구하고 싶어했던 신하들은 선조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원균을 선무공신 2등에 추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조가 길길이 날뛴 탓에 1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 선조 36년 6월 26일자 선조실록 中
원균은 부정 행위 의혹으로 서력 1564년에 치른 무과서 떨어졌다가 15년 후인 1579년에야 붙은 반면, 이순신은 1572년에 치른 무과서 낙마 사고를 이유로 떨어졌다가 겨우 4년 후인 1576년에 붙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원균보다도 선배다. 무과 급제 후 처음 맡은 임무에 대한 평가도 천지 차이다. 종성부사 원균은 인사고과에서 꼴찌를 기록한 반면, 발포만호 이순신은 인사고과에서 으뜸을 받았다. 시전부락 전투서도 원균은 예비대인 계원장(繼援將)이었지만, 이순신은 포병대인 화열장(火烈將)으로 참전한데다 적장 우을기내까지 사로잡았다. 더구나 그 후 이순신은 부당한 이유로 픔계가 내려간 적은 있어도 결코 합당한 이유로 자리에서 쫓겨나가지 않았다. 반면, 원균은 평판을 이유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1591년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간원은 인사고과를 들어서 그를 경질시켰다. 원균이 딱히 어떤 공적이 있어서 승진했음이 아님은 당시 사간원 상소가 증명하고 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앞서 수령이 되어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선조 24년 2월 4일자 선조실록 中
게다가 원균 다음으로 임명된 유극량도 실력은 있지만 성품이 무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수군 절도사 임명 기준이 의외로 까다로웠음을 알 수 있다.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閫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 선조 24년 2월 8일자 선조실록 中
그 다음으로 온 이순신이 단지 한 번에 6품계를 건너 뛰는 말도 안 되는 승진이란 사실만을 지적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보여준다. 이마저도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임되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 선조 24년 2월 16일자 선조실록 中
주변 상황이 이런 마당에 원균은 착실히 전공을 인정받아 경상우수사가 된 인물이고,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이 앉힌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웃긴 평가인지는 자명하다. 실상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의 공동 저자인 이희근은 이덕일의 묵인 하에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원균을 북인의 일원으로 둔갑시키기에 이르렀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은 책으로서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의 전거가 된다. …… 인조반정 직후 남인 이원익이 영상이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정 정권은 형식상으로 서·남인 연합정권이었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된 반면,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은 후하게, 원균은 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01 ~ 202쪽 中
정작 북인이 간여한 선조실록과 북인의 일원인 윤계선이 쓴 <달천몽유록>이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 보자.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 선조 31년 4월 2일자 선조실록 中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쭉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 <달천몽유록> 中
이쯤 되니, 이게 무슨 짓거리냔 호통이 내 입에서 나오려 한다. 게다가 선조 생전에 이순신에 대한 모함과 원균에 대한 비호의 선봉에는 서인 영수 윤두수와 북인 영수 이산해가 다투어 나섰고, 정유년에는 남인 영수 류성룡까지 소극적으로 편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두수가 북인이었다거나 윤계선이 서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파간 이해를 뛰어넘는 인식(선조에게 밉보이지 말자)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두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배제하고 원균과 이순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03 ~ 206쪽 中
이덕일은 원균에 대해선 어떻게든 자신이 중립인 척을 하려 들고 있지만, 내용물을 뜯어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엉망진창이다.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개념 있는 장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덕일은 대답해 보라. 지 전공을 드높인답시고 백성들의 목을 잘라다 내놓으면서 왜군의 목이라고 거짓 보고를 한 것이 사람의 도리인가?
그리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익을 훼손시킨데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술수를 동원했다가 정작 싸움에서는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달아난, 민폐 개초딩이다. 이 똥별을 전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추앙하는 건 옛 왜군의 '천황 폐하 만세' 돌격을 조장하는 짓이다.
이덕일의 원균 관련 5대 말장난으로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덕일은 원균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주장하는데,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사람이 함선과 무기를 불태우고 달아나고, 칠천량 참패를 당할 당시엔 출정해놓고 술만 퍼마시다 적이 다가오자 육지로 튀어 사라졌단 기록이 안 보이나? 운봉전서에 나오는 활 쏘고 칼 쓰는 열심히 싸우는 것조차 했는지 의심스럽다. 이렇듯 원균은 게으름뱅이였다. 이덕일은 '졸장'이라는 단어를 써 가며 자꾸 원균을 칭찬하고 이희근의 말장난을 묵인함으로써, 열심히 싸우며 목숨을 버려간 충신들을 폄하하지 말라.
둘째, 이덕일은 후배인 이순신에게 반발했고 주장하는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이는 원균이 5년 연상이지만, 무과 급제는 이순신이 3년 더 빨랐다. 그리고 5년 나이차도 이이의 <격몽요결>대로 당시엔 충분히 친구 관계 나이차였다. 원균의 진급이 빨랐던 것은 그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이순신의 진급이 눈물겹게 굴곡졌기 때문이다. 이일이나 서익 같은 놈들이 이순신을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되려 이순신이 훨씬 진급이 빨랐다. 더군다나 원균의 진급의 진실은 그의 성씨부터 봐야 한다. 당장 원주 원씨는 조선 역사상 첫 후궁인 성비 원씨를 낸 가문이다. 이 정도 명문가이니 원균의 진급은 되려 느린 게 이상하다. 임진왜란 중 원균의 뇌물과 전공 조작을 보면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이 되지만 말이다.
셋째, 이덕일은 이순신이 투옥되자 통제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순신을 투옥'시키고'가 더 적절하다. 지휘 계통까지 무시하면서 말도 안 되는 빌미로 요시라가 던진 떡밥에 다시 불을 지피고 이순신을 파직시킬 빌미를 선조에게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원균임을 이덕일은 애써 부정하려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인가?
넷쨰, 이덕일은 권율의 명령으로 싸우다 디졌다고 주장하는데, 역시 앞서 이야기했듯이 당시 조선 조정은 오히려 원균이 한산도에 머무르면서 소규모의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보급선 자체를 교란시키길 바랐다. 또한, 권율의 매질은 원균이 이러한 역할은 수행하지 않고 직접 부산까지 갔다가 전력만 까먹고 돌아온 데 대한 문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원균은 자포자기 모드로 들어갔고, 그렇게 200척이 넘는 전선과 그 위에 타고 있던 병력을 몽땅 다 빠뜨려 죽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원균에 대한 권율의 매질은 충분히 너그러운 처사라 할 수 있다.
'신이 해진(海鎭)에 부임한 이후, 가덕도(加德島)·안골포(安骨浦)·죽도(竹島)·부산(釜山)을 드나드는 적들이 서로 거리가 가까와서 성세(聲勢)는 서로 기대고 있는 것 같으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하니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가덕도 두 곳의 적은 3∼4천도 차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날마다 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부산포(釜山浦)에서 병위를 드날려 보인다면 회복의 계책이 거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버티며 날짜만 보낸다면 한 해를 넘어서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년에 더욱 심하고, 그 다음해는 더더욱 심할 것인데 군사가 쇠잔하고 군량이 고갈된 뒤에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병력을 움직이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 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물며 가을이 다 지나고 난 뒤에는 바람이 점점 세지고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질 것이니 배를 부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때는 수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또한 행장(行長)·요시라(要時羅) 등은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 선조 30년 4월 19일자 선조실록 中 원균 서장
원균은 위 서장을 올려서 진주성 주둔 병력을 얻어다가 탕진하는 바람에 제2차 진주성 전투가 한양조선군의 패배로 끝나게 유도했는데, 군법대로라면 권율은 원균을 참수했어야 한다. 이덕일은 전시에 탈영한 배설이 수배령이 떨어진 끝에 고향인 경상도 선산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당한 사실을 명심하라.
마지막으로 이덕일은 선조의 호의로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말 그대로 선조의 호의가 맞다. 선조는 위 말장난을 그대로 구사하면서 원균을 감싸 줬고, 그런 떼쟁이 선조의 의중이 반영되어 원균은 팔자에도 없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결코 원균 자신이 잘나서 일등공신이 아니란 말이다.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난 책임을 피하고자 원균에게 호의를 베풀었음은 이후 한양조선 왕들의 행적이 분명히 증명한다. 이후 역대 한양조선 왕들은 원균에 대해선 언급을 않는 반면 이순신은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정조가 칭찬했다. 심지어 사관들은 선조실록을 통해 대놓고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것을 비판했으며, 이원익은 인조 앞에서 대놓고 '원균이 일을 그르쳤다'고 분개를 표했다. 이덕일은 자신의 원균 옹호두둔 행태를 비난받는 것에 억울해하지 말고, 실록부터 다시 똑바로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 원균 관련 말장난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길 바란다.
첫댓글 역사연구가 개인차가 있네요....
이순신 장군이 너무 뛰어난 것도 있고 무능해서 삼도수군 말아 먹은 원균이 비교 대상 욕받이가 된것이죠 왕부터 사대부 까지 도망만 한심하게 다녔고 천한 백성들이 나라 지켰지요 멀쩡한 배 자침 시키고 힘들게 키운 수군 칠전량에서 몰살 당하게 말아 먹은것 보면 실력은 없고 높은 자리만 원하고 권위만 누리면서 음주가무에 엽색행각에 몰두 했던 무능,무식 원균 정도면 도망 다닌 조선군 장수들 평균 수준이죠
사대부들이 정신 못 차리고 기득권만 누리고 의무는 외면 하고 백성 등골 만 빼먹었으니 결국 일본에 나라를 가져다 바쳤지요
현재 부동산 투기나 국방의 의무 외면한 국회의원들 반드시 낙선 시켜야 합니다.
부패한 야당 의원들 하는 짓이 도망만 다닌 조선 사대부들 판박이 입니다.
문제는 예나지금이나
논쟁이 정반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