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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란 물건이 처음 나왔을 때 화승(火繩)에 있는 불을 심지에 붙여 격발하는 방식이었다.
평상시에는 총에 화승을 한 50센티 쯤 길다랗게 늘어 뜨려 갖고 다니다가 쓸 일이 생기면
화승에 불을 붙이고 이 화승의 불을 심지에 옮겨 붙여 격발하는 식이다.
나중엔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이 점화구 쪽으로 쓰러져서 발화하는 방식으로 개량된다.
화승총이 발명된 것은 유럽이지만 그것이 실제 전투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이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수입하여 썼지만 왜놈들답게
곧 모방 생산하여 총포 제조기술이 오히려 유럽을 능가할 정도였다.
화승총을 다른 이름으로 조총(鳥銃)이라고도 하는데 전국시대 말 일본의 조총 보유량은
200년 후인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군의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화승총 (火繩銃 = 조총)
임진왜란 전 이 조총이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위력을 보기위해 어전에서 사격을 해 보는
어전 방포(御前放砲) 행사까지 가졌지만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유성룡이 이를 보고 신립 장군에게 경고를 하지만 신립은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조총이란 게 위력은 있지만 어찌 매양 쏘는 대로 다 맞추겠습니까?”
조총을 무시한 결과는 다 아는대로다. 신립은 문경새재(=鳥嶺)를 놔 두고 자신의 장기인
기병전으로 탁 트인 충주 탄금대에서 싸우다 장병들과 함께 전사한다. 아니, 자결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카 (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 병력이 18,000 명, 이에 맞선
신립은 고작 8,000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상대하려면 요새에서 진지전을 해야 하는 게 상식이었지만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경력이 있고 여진족과 수많은 소규모 전투를 해 온 신립이 상상할
수 있었던 전쟁 양상은 당연히 궁기병(弓騎兵)에 의한 사격전이었고 왜군의 교리, 무장,
전술에 전혀 무지했다.
조선군은 전통적으로 궁시에 의한 기사(騎射)를 중시했고 활쏘기는 무반 뿐 아니라 선비들도
즐겨하는 점잖은 기예로 인식되었다. 반면 검술이나 창술 등 단병접전의 기예는 천한 것으로
여겨져 무반도 이를 수련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순신 장군은 칼을 가지고 다녔지만 그가 검술을 수련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칼은 호신용, 지휘용일 뿐이다.
조선도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을 익히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전까지 일본 왜구의 칼부림은
멀리서 활로 쉽게 격퇴할 수 있었고 산병(散兵) 전투 – 대오를 짓지 않고 흩어져 일대 일로
싸우는 것 – 에 능한 왜구의 전술은 밀집대형에 의한 화살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은 달랐다. 조선군의 밀집 진형을 조총 일제 사격으로 붕괴시킨
후 흩어진 조선군에게 달려들어 그들의 장기인 칼부림으로 무참히 참살했다.
결국 직사화기(直射火器)의 장점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으로 스스로를 내 던져 궤멸적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어쨌든 조선도 곧 이를 모방 생산하고 숙종조에는 조총 보유량이 5천 정을 넘었다.
이 시기의 화약은 흑색화약(black powder)이란 건데 질산칼륨(=칠레초석)과 유황과 숯을
75:15:10의 비율로 혼합한 것이다. 칠레 초석에 열을 가하면 대량의 산소가 발생하고 이 산소가
유황과 숯을 급격히 연소시켜 주위 공기가 팽창되는 폭발력을 얻게 되는 원리다.
숯 때문에 색깔이 검게 보였으므로 이런 이름을 쓴 것이다. 신대륙 발견으로 칠레초석이 대량으로
수입되었지만 그 전만하더라도 오래된 먼지에서 추출한 염초를 칠레초석 대신 썼다.
대량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화승총은 이후 수석식 총으로 발전한다. 원리는 부싯돌 같은 것을 용수철로 고여 놨다가 방아쇠를
당기면 격발로 생기는 불씨로 화약을 발화 시키는 방식이다.
이 수석식 총은 1 분에 4 발 발사가 가능했다고한다.
효종임금이 북벌을 계획할 때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에게 자기 판공비로 월급 줘가며
채용해서 이 수석식 총을 제작케 하기도 했지만 효종이 죽자 흐지부지 됐다.
19세기에 후장식 총이 등장한다. 그 전엔 총구로 화약을 긴 막대기 같은 걸로 다져 넣고 다시 탄환을
밀어 넣는 방식인데 탄피에 화약을 채워넣고 탄두를 결합하여 뒤에서 장탄하는 방식이다.
어떤 신부(神父)가 화약이란 게 불을 붙이지 않더라도 충격에 의해 발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응용하여 공이로 뇌관에 충격을 줘서 격발했다.
19세기에 정밀 기계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총강 내면에 선조(線條=라이플)를 새겨 넣 을 수
있게 되었다. 강선이라고 하는 건에 총강내면에 비틀린 홈을 새겨 넣어 발사된 탄자(彈子)가 회전하며
날아가도록 한 것이다.
이런 총을 라이플 (rifle) 총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모두 이게 일반화되어 라이플이라 함은 총을 뜻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실용화된 라이플 총 윈체스터 M1873. 레버를 젖혀 장전한다.
영화 놈놈놈에서 정우성이가 말타고 총질하는 장면에 쓰인 그것이다.
탄자에 회전을 주는 이유는 총탄이 회전하면 자세가 안정 (Stabilized) 되어 명중 정밀도가 대폭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총탄은 구슬처럼 구형으로 되어있어서 굳이 회전을 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뾰족한 총탄은 탄두부분보다 탄저부분이 무겁기 때문에 날아 가는 동안 뒷부분이 가라앉아
일직선으로 날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회전한다면? 팽이의 촉은 뾰족하지만 회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똑바로 서있게 된다.
이런 성질을 <각운동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이 원리로 회전하는 총탄은 총구를 떠날 때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군대에서 회전하는 총탄은 파괴력이 강하다는 상식이 유포되고 있는데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회전은 총탄의 파괴력과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총탄이 강선을 따라 돌 때 발생하는
고열로 상당량의 운동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변환되어 탄속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확히 얘기하면 회전하는 총탄은 위력이 떨어진다.
(이걸 설명하는, 눈 뜨고 못보는 구라가 있다. 총알이 회전하므로 총알이 들어간 구멍은
작은데 뚫고 나온 구멍은 크다는 둥, 모두가 훈련소 조교놈들이 지어낸 뻥이다.
회전하지 않더라도 원래 그렇다)
007 영화의 오프닝 신. 상대의 총구를 통해서 보이는 007의 모습으로 총강 내면의
나선형 홈이 라이플이다. 약실쪽에서 봤을 때 오른쪽으로 비틀리면 우선(右線), 왼 쪽으로
비틀리면 좌선(左線)이라 부른다.
그림이 정확하다면 사진은 8개의 라이플이 왼쪽으로 비틀린 8조 좌선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우선이 압도적으로 많은 추세이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고 강선을 새기는
공작기계의 가공성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높은 탄속이 요구되는 전차포는 최근 라이플이 없는 활강포로 회귀하고 있다.
활강포는 포탄이 회전하지 않으므로 포탄에 화살처럼 날개 (Fin)를 달아 탄도를 안정시킨다.
전차포의 운동에너지 탄 (APFSDS 등)은 작약도 장입되지 않은 그냥 맨 쇳덩어리 (실제로는
텅스텐이나 열화우라늄)가 엄청난 고속으로 날아가서 그 운동에너지로 적 전차를 파괴하기
때문에 높은 탄속이 요구된다. 강선포로는 절대로 이런 탄속을 얻지 못한다.
총으로 돌아와서…… 19세기 중엽 미국의 새뮤얼 콜트가 드디어 리볼버를 개발한다.
한꺼번에 여섯 발의 총탄을 장탄하고 이 약실을 회전시켜 연속 발사를 가능케 한 것이다.
콜트사는 지금 서방측 제일의 총포 메이커로 성장했다.
이 리볼버가 대원군 때 육혈포(六穴砲)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서부영화에 맨날 등장하는 리볼버. 회전 약실을 가진 총을 리볼버라 하며 탄창 삽입식 권총은
피스톨이라 부른다.
1862년 리처드 개틀링이라는 사람에 의해 기관총이 발명된다. 리볼버가 1개의 총열에 여섯 개의
약실이 있는데 반해 6 -10 개의 총열이 회전하는 방식이다.
그 때는 사람의 인력으로 회전시켰다.
이 개틀링 포가 발칸포의 원형이 되었다. 다만 전기 모터로 회전시키는 게 다를 뿐이다.
초기 기관총 개틀링 건. 발칸포나 미니 건도 개틀링 건의 일종이다.
기관총은 전쟁의 양상을 기본적으로 뒤흔들어 놨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지루한 소모전인
참호전(Trench Warfare) 양상으로 갔다. 옛날처럼 말 타고 돌격하는 건 기관총 앞에 날 죽여 줍쇼
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직사탄도를 피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숨은 것이다.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방어하는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차(戰車)가 개발되었다.
영국에서 처음 만들었는데 초기에는 1센티쯤 되는 연강판을 방어 장갑으로 두르고 보병이 걷는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이 전차를 전장까지 수송할 때 나무 컨테이너에 담아 열차로 운반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컨테이너엔 TANK 라고 큼지막하게 썼는데 (물탱크로 보이게 하려고)
그래서 지금도 전차를 탱크라고 부른다.
2차 대전 초기 독일은 기갑부대를 근간으로 하는 전격전(Blitzkrieg)교리를 도입하여
프랑스 북동부의 마지노 방어선( Maginot Line)을 손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군 수뇌부는 1차대전의 선방위 교리에 사로잡혀 막강 마지노 방어선을 과신했지만
기동력을 바탕으로 우회, 집중과 분산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타격하는 독일군 전차부대에 속수무책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총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총포란 것은 14세기에 나타나서 수백년간 개량된 것이라 아주 완성도가 높은 무기체계이고
이제 더 이상 개량할 만한 여지가 없다고까지 말해진다.
어떤 물건이 발명되어 개량을 거듭하다 보면 더 이상 개량할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도끼는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같은 것을 쓰고 있다. 가령 최신형 M-1A1 에이브람스 전차에
달려 있는 12.7밀리 중기관총은 우리가 흔히 캘리버 50으로 부르는 브라우닝 M-2인데 놀랍게도
이건 1930 년대에 나온 구닥다리다.
몇 개 안 되는 전차용 기관총을 위해 새 모델을 개발하기도 그렇고 조금 아쉽지만 옛날 것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잘 만든 기관총이라 아마 총신이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사용될 것 같다.
총포 중 전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AK-47 돌격 소총이다.
"아브토마트 칼라시니코프"를 줄여서 AK 로 표기하는데 아브토마트는 오토매틱(automatic)
이라는 뜻이다. 칼라시니코프는 이 총의 설계자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47은 제식화 된 연도 1947년을 뜻한다.
우리는 에이케이(AK) 소총이라고 하지만 북한은 러시아어(語) 발음으로 아까(AK) 보총으로 부른다.
아브토마트 칼라시니코프 AK- 1947 돌격소총.
테러와 혁명의 상징으로 아프리카 남부 모잠비크 놈들은 터무니 없게도
자기나라 국기에 이 총을 도안해 넣었다.
고장도 없고, 정비도 간편하고, 무엇보다 소련 무기가 다 그렇듯 튼튼하다는 장점과 그 단순성
때문에 양산성이 높다. 양산성이 높다는 것은 가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발사 속도도 분당 600발로 제한하여 30발 탄창 하나로 꽤 오랫동안 사격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무겁고 반동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AK-47은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서 엄청나게 생산되었고 하도 많이 생산되어 집계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대략 파생형까지 1억 정 이상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주의 몰락 후 이 총이 미국으로 대량 밀반입 되어 흑인, 히스패닉계의 돈 없는 갱들 손에
들어가 미국 당국이 골치 아프다. 100 달러 주면 살 수 있다고...
(근데 요즘 IS 등 내전 때문에 이 총 가격이 폭등했다고한다)
서방측 제일의 히트 상품은 말할 것도 없이 M-16 돌격 소총이다. 유진 스토너라는 기계공학자가
설계했다. 2차 대전 때는 M-1 개런드 총이 미군의 제식 소총으로 쓰이다 종전 후 같은 탄을 쓰는
M-14를 개발해서 잠깐 쓰다만 곧 새로운 소총을 설계 공모하게 된다.
M-1 개런드 총 (설계자 존 개런드의 이름을 딴 것임)은 800 미터 거리에서 철모를 관통하고
병사를 즉사 시키는 위력을 지녔다. 하지만 2차 대전의 전투 양상을 분석해 보니 보병끼리의
총격전은 90% 이상이 400 미터 이내의 근접된 거리에서 일어 났고 이런 위력은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 되었다.
그래서 총을 경량화 하는 구상을 하게 된다. 새로운 제식 소총을 설계 공모하는데 유진 스토너가
혁명적인 설계를 한 것이다. 구경을 5.56밀리로 낮추고 플라스틱과 경금속을 써서 중량을 대폭
낮췄다.
구경을 축소하다 보니 당연히 위력이 떨어지는 것은 탄피 길이를 조금 늘여 (=폭발장약의 양을 늘여)탄을 고속화 함으로써 해결했다.
하지만 가늘고 긴 총탄의 형태는 나중에 탄창 설계의 골칫거리가 된다.
이렇게 해서 물론 M-1의 위력에는 못 미치지만 각개 병사나 소프트 타겟에 손상을 주는 데는
충분한 것으로 결론났다. 총탄 무게가 12 그램 이하로 떨어져 각개 병사가 560발을 휴대할 수
있게 되었다. 총열 길이도 51센티로 줄여 전체 길이가 M-1 보다 10 센티 이상 짧게 되었다.
M-16 돌격소총
설계도를 들고 가서 공모에 응모를 하지만 이 총은 아주 냉대를 받았다.
당시 미군 수뇌부는 총은 당연히 목재 개머리판을 가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알루미늄
몸체에 플라스틱 개머리판을 가진 이것은 총 같아 보이지 않고 무슨 장난감처럼 보였다.
M-16을 여자가 설계했다는 잘못된 소문도 있는데 아마 외관의 섬세함으로 생긴 말이 아닌가 한다.
결국 유진 스토너는 이 총의 판권과 도면 일체를 콜트사에 넘기고 자신은 콜트사 이사로 취업했다.
후에 이 총이 제식화 되고 서방의 대표적인 개인화기로 자리 잡자 콜트사는 떼돈을 번다.
우리나라도 대우정밀이 이 총을 라이센스 생산하여 전군에 보급하고 연이어 같은 탄을 쓰는 K시리즈의
기관단총, 소총, 기관총도 보급했다.
M-16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 또한 많다. 분당 900발에 달하는 높은 발사속도로 20발 짜리
(최대 21발) 탄창 하나가 불과 1초 남짓한 시간에 소모되어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탄창 갈아 끼울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미군은 전투 중에 "리로드(reload)" 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지주 보이는데 내가 지금 재장전
하고있으니 엄호해 달라는 소리다.
빈 총을 든 병사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20발 들이 탄창엔 대개 18발을 장입하는 것이 권고되지만
베트남전 당시 병사들은 탄창에 21발을 억지로 눌러담고 약실에도 1발을 장탄해 22발을 장탄한 채
들고 다니는 놈들도 많았다.
후에 30발 짜리 휘어진 바나나 탄창이 개발 되었지만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오래 걸렸다.
탄자가 너무 가벼워 측풍이 불 때 오차가 많이 나고 너무 섬세, 정밀하여 고장이 잦다.
또한 격렬한 전투상황에 쓰기에는 총이 너무 무르다는 단점이 있다.
한 10여년 전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와 유진 스토너가 만났다. 대조적이었다.
칼라시니코프는 영웅 칭호를 받았지만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빈한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고
유진 스토너는 콜트사의 은퇴한 고위 임원으로 어마어마한 부호가 되어 있었다.
80 늙은이 둘이서 만나 악수를 하고 차를 마시던 모습이 사진으로 나왔는데 냉전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중동의 사막에서, 베트남의 정글에서 그들이 만든 총을 들고 수많은 병사들이
싸우다 죽어간 것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첫댓글 애씽.. 1탄 2탄 씽!!!!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