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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 Angelico(1395-1455) "The Last Judgement". c.1431. Tempera on wood. 105 x 210 cm. Museo di San Marco, Florence, Italy.
염수정 주교,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의 명가
게다가 15촌 일가친척이 모두가 신자이고,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의 명가이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시기에 실학을 연구하다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셨고, 박해를 피해 관직을 버리고 배티 성지가 있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사기장골 옹기마을로 숨어 들어가 사셨다. 수감되었다가 죽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하여 같은해 9월 30일 참수 치명하셨다. 그후 3대조께서는 옹기마을을 떠나 경기도 안성 삼죽면 일대인 윗새울로 피신하여 정착하셨다.
성모님처럼 너도 그렇게 하라
미리내, 감곡 성당으로 순례하며 첫첨례-첨례는 축일의 옛말. 첫첨례란, 매월 첫목ㆍ금ㆍ토요일에 특별한 지향(목요일은 성직자 수도자를 위해, 금요일은 예수 성심 공경, 토요일은 성모 공경)을 갖고 미사ㆍ고해ㆍ영성체하고 기도했던 신심 행위-를 지켰다. 그리고 막내며느리인 주교님의 어머니께,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순명하고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너도 그렇게 청하라”고 하셨다.
어머니께선 이를 받아들여 5남 1녀(2녀는 사망)중 3형제를, 가지면서 하느님께 봉헌하시고 매일 마음속에 담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이를 전혀 내색하지는 않으셨다. 막내가 사제 수품을 받은 81년에야 38년간의 침묵을 깨고 “하느님께서 내 소원 다 들어주신 것 같다. 너희들 가져서부터 주님께 봉헌했었다”고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내 잘난 맛에 사는 줄만 알았는데… 물론 응답은 내가 했지만 다 어머니의 기도 덕에 산 거구나”라는 걸 깨달으셨다.
불순명의 교만
신앙의 교과서인 어머니를 보면서 자란 주교님은 59년 소신학교에 입학하신다.
우연히 경향잡지에서 성신고등학교 입학안내를 보고 “한번 가볼까” 하니, 가족들은 “그래, 가봐. 좋은 거야” 했었다.
본당 신부님 면담 때 “그냥 가고 싶습니다”라고 한 후, 1970년 사제수품, 불광동ㆍ당산동ㆍ이태원ㆍ장위동ㆍ영등포동본당 사무처장, 목동 본당, 15지구 지구장을 거쳐 지난 12월 12일, 주교로 서임되셨다. 그리고 “이런 거 내게 맡기지 않았으면… 하지만 하느님께서 쓰시겠다는데 싫다고 하면 불순명이지.
너무 큰 십자가여서 떨리고 두려운 마음뿐이지만 ‘불순명의 교만’을 범하진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주교직을 수락하셨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난 주어진 것 하나만 하기도 벅찬 사람이야. 하느님께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요한 9,3)도 하시잖아.
꽉찬 사람보다는 나같이 자신 없는 친구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좋은 사람이 아닐까?
내 힘으로 사는 것도 아닌데,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데 왜 못하시겠어?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마태 3,9)고 하신 하느님을 믿고, 교회의 머슴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봉사하겠다.”
오십시오. 오셔서 해주십시오
주님 예수님”(묵시 22,20)을 그대로 사목표어로 삼으셨다. 이는 초대교회 때부터 전례 안에서 신자들이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내가 곧 가겠다’고 약속하셨고,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찬미와 영광 드리며 ‘아멘, 오십시오’ 하고 답하고 있어 이것으로 정하셨다.
또 사제 생활에 준비된 것이 없고 하느님께서 다 알아하시니까 ‘오십시오. 오셔서 해 주십시오’ 하는 뜻도 포함된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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