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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7:17~43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증거의 장막 7:44~50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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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니 애굽 왕이 이스라엘의 아기들을 죽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을 통해 건져져 애굽 사람의 지혜를 배웁니다. 그는 동족을 구하려다 살인자가 되어 도망했는데, 40년이 지나자 하나님이 그를 불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 내십니다. 그러나 백성은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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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7:17~43
스데반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 대해 말합니다. 모세를 길게 언급하는 것은 그가 모세를 모독했다는 비난 때문으로 봅니다(6:11). 스데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완수했고(34~36절), 그 자신과 같은 선지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언했다고 밝힙니다(37절). ‘광야 교회’(38절)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모으신 백성으로서의 신앙 공동체가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암시합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을 ‘살아 있는 말씀’(38절)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이 율법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군대’(42절)는 하늘의 ‘별 신들’(star gods)을 가리킵니다. 우상 숭배로 타락한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예언했나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이유를 묵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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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의 장막 7:44~50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성막)에 대해 말합니다. 증거의 장막은 모세 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제작되었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가지고 들어갔으며, 다윗 때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후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사람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48절). 그는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편협한 사고에 저항하며, 하나님이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광야에서 우상을 섬긴 조상들처럼, 유대인들이 성전을 우상화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성전만이 아니라 온 우주에 편만하게 계시는 전능자입니다(49~50절; 사 66:1~2).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이 사람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는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하나요?
한절묵상:사도행전 7장 41절
하나님이 이루신 출애굽 사건은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은혜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려고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는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애굽에서의 삶을 그리워합니다. 큰 은혜를 받아도 되새기며 간직하지 않으면 쉽게 잊는 법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우상으로 가득한 세상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때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어느 곳에서나 그분을 나타내신다. - 트레이시 윌리엄슨
오늘의 기도
하나님! 고난이 더할수록 약속의 말씀을 더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매 순간 진리의 말씀에 거하지 않으면, 우상을 만들고 죄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광대하시고 오묘하신 하나님 섭리에 거룩한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88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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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향한 백성들의 원망.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느냐며 원망하고, 애굽에서는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는데 이 광야에서는 맨날 만나만 먹는다며 불평하고, 목말라 죽겠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너하고만 말씀하시냐며 대적했다.
똑같이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스데반은 설교하였다.
나 역시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죽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때가 많은 죄인이다.
동일하게 학사의 아이들 역시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을 때도 있고, 말해도 그때뿐이고 도무지 변화가 보이지 않는 때도 있다.
이 모습이 내 모습이다.
이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회개하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던 사람들처럼 되어야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이를 가는 사람들처럼 반응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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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말씀>
사도행전(Acts) 7:17 - 7:36
<성경보기>
*모세의 유년과 청년 시기
17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의 광야 시기
23~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
30~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해설>
스데반은 과거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속량할 모세를 거절한 역사를 강론하며,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의 죄를 완곡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7~22절 모세와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태어납니다(갈라디아서 4장 4절).
하나님과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고, 사랑스러웠고(누가복음 2장 52절),
말과 일에도 능했습니다(누가복음 24장 19절).
바로의 압제와 헤롯의 위협도 비슷합니다(마태복음 2장 13절).
스데반은 모세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회중이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구원자이자 선지자임을 일깨우려 한 것입니다.
모세가 종이라면 예수님은 아들이고,
모세가 그림자라면 예수님은 실체입니다(히브리서 3장 5,6절).
모세가 지향하는 바를 예수님이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새 출애굽’을 이루셨고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십니다.
20,23~29절 스데반의 변론 중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모세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모세를 모독했다는 유대인들의 비난(6장 11절)과 달리,
자신은 모세와 그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아님을 밝힙니다.
도리어, 모세를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구원자 예수를 거절한 유대인들도 조상의 죄를 반복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고 바로(죄)의 노예로 살겠다는 의사 표시오,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완악함입니다(51절).
30~33절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이 재판의 변론이나 선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했다(6장 13절)는 “거짓 증인들의 주장을 상대화하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사도행전의 맥락(1장 8절)에서 거룩하지 않은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주의 임재(통치)가 머무는 거룩한 땅이 될 것입니다.
죄로 물든 우리를 주님 거하시기에 합당한 성전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30,34~36절 하나님은 ‘40년이 지나’ 모세를 지도자와 해방자로 세워 애굽의 압제에 신음하는 백성에게 다시 보내셨습니다. 40년 동안의 침묵은 언약의 망각이나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출애굽과 광야의 40년은 거대한 백성(출애굽기 1장 7절)이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입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그 조상 때부터 줄곧 성령을 거역해왔음을 고발하며, 이제 그 후손들이 예고된 의인(예수)까지 죽였다고 말합니다.
44~50절 이 땅에서 사람이 지은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어디든 계시고 언제든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놓고 성전 자체를 숭배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주의 임재를 갈망하는 성도들입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는 세상에서, 우리도 건물 중심의 공간의 종교에 만족한 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온전해져가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7~39절 모세는 언약의 중재자이자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와 율법을 거역하며 욕보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말씀을 등한시하고 애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 가치관과 어긋나더라도 내 가치관을 포기하고 그분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인생의 ‘방황’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보여줍니다.
39~43절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애굽을 동경하고, 출애굽의 구원(자)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보다 배부름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언약의 땅에서도, 결핍의 땅(광야)에서도, 풍요의 땅(가나안)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다 멸절당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갖가지 우상을 만들어 내 안전과 미래를 보장하려 했던 우리도 예수님의 중보가 아니었다면 죽어 마땅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나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51~53절 설교를 마무리하며,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과거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완악한 마음으로 성령을 거역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무서운 ‘악의 연대기’입니다. 마음과 귀에 진정한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 없이 몸만 예배당을 오가는 신앙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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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님의 도우심
모세는 태어나서 삼개월을 집에서 몰래 키우게 됩니다. 하지만 모세는 나일강에 버리우게 됩니다. 이렇게 버리워진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자신의 아들로 택하게 됨으로서 한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준비됩니다. 이러한 모세의 믿음의 역사는 결코 환란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면서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역사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길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도 꿋꿋하게 하나님의 의지하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갈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앞에 있는 모든 장애를 치워주시고 우리가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하나님의 도우심을 내 삶속에 체험하며 사는가?
2.모세의 혈기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는 것을 자신이 가진 젊음의 혈기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족을 구하기 위하여 휘두른 주먹에 애굽 군인이 죽게 되었을 뭔가 이루어 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자신들의 동족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하게 됩니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늙어가는 한 양치기로 변해져 갑니다.
모세의 계획은 처절하게 무너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때 나의 계획과 나의 기분으로 행하는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에 맞추어 행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항상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이 곧 하나님 이심을 바로 인식하는 믿음을 기집시다.
묵상하기
나는 나의 혈기로 뭔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지 않는가?
3.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스데반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율법을 웨방하고 모욕했다고 고소한 그들에게 말씀을 진리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이 거의 신격화 하고 있는 모세에 대하여 구속사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재평가 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의 목동으로 살아가던 모세 무려 40년동안 자신의 과거는 다 잊혀질법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하고 갖추어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항상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를 항상 주목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가?
4.이끌림 받은 모세
호렙산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모세는 이끌림에 순종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것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모세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끌리는 대로 그곳으로 다가 가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의 인생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떨기나무 불꽃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관심을 요구하십니다.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면 그대로 움직이십시오 다가 가십시오 그곳에서 나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는가?
5.신을 벗으라
사람들은 한가지 좋지 못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눈에 보이는 것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습성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모세가 선 곳은 정말 평범하고 오히려 험한 산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거룩하다 하시면서 신발까지 벗으리고 말합니다. 왜 그곳이 거룩합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에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서 하나님께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사자가 모세를 향하여 거룩한 곳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곳이 어떠하든지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곳은 곧 성스러운 곳이 될 것입니다. 성스러움의 기준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판단되어 집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앞에 정결함을 유지하고 사는가?
6.말씀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 이끌어 내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20-36절)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앞에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고 있었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실제 예수님께서 오셨을때 그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 가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과 그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를 깨닫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자인가?
7.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갔을때 아론을 동참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는 우상숭배를 함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후에도 광야 40동안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 그리고 하나님 거역사건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거역 사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지금 스데반은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도 이와같은 영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자각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불평과 불만을 마귀는 아주 크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영이 깨어서 이러한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는 습관을 갖고 있지 않은가?
8.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48-50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하시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성막은 후에 솔로몬에 의하여 성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의 본질을 훼손했습니다. 건물 그 자체나 그곳에서 행하는 의식 자체가 신앙생활의 전부인것 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을 스데반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유대인들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속에도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신앙적 행위중 하나입니다. 마치 교회의 건물 가운데 있으면 되는 것처럼 교회의 모임에 참여만 하여도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 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느끼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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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적인 신앙을 멀리하라 >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 교훈은 무엇인가? 형식적인 신앙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살다 보면 진실한 사람보다 장삿속에 밝은 사람이 오히려 크고 높아질 때가 많다. 그 정확한 이유를 이 땅에서 알려고 하지 말라. 아마 천국에 가서야 그 의문이 온전히 풀릴 것이다. 또한 “왜 진실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도 난제다. 중요한 사실은 현세에서는 ‘장사하는 삶’이 ‘열매 맺는 삶’을 앞서지만 천국에서는 오직 열매만 남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고 진실하기를 힘쓰라. 거짓은 다리가 짧지만 진실은 다리가 길다. 거짓은 수명이 짧지만 진실은 수명이 길다. 진실한 사람이 이 땅에서는 잠시 뒤쳐지는 것 같지만 천국까지 메아리치는 축복은 결국 그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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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집사의 이 논증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자신들의 이권 창출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도전입니까? 스데반 집사는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전에 가둘 수 없는 분이시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셔서 스스로 신임장을 발부하던 성급함으로부터 신을 벗고 훈련된 성품으로 하나님의 신임장을 발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훈련이 마쳤을 때 하나님은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모세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한 시간으로부터 4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80세 노인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이입니다. 애굽에서 배웠던 학문들은 이제 전부 잊혀지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십니다.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우리의 기준이 다릅니다. 내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기준이 다릅니다. 이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전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은 진짜 성전인 예수를 핍박하고, 모세도 핍박하고, 선지자들도 핍박했던 것입니다. 엉뚱하게 처소를 이해한 탓입니다. 증거의 장막을 장소로 만들고 하나님을 제한시킨 결과입니다
이 부분을 지금도 왜곡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건물 성전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어디서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보다 예배당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성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생활 속에서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즉 사람 성전이 된 사실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은 그의 삶 전반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성경에는 건물 성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그것은 광야 교회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여기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재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속에 내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성전인 우리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십니다. 거룩할 것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은 교회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청소, 교회에서 기도, 교회 모든 행사, 교회의 무슨.....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 가정은 들어가면 발 디딜 틈이 없이 어질러져 있고, 아이들은 어떻게 밥을 먹는지 알 수 없고, 직장에는 태만하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물 성전으로 되돌아간 사람의 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말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 성전은 성적인 왜곡, 윤리적 타락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게으르거나,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교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람 성전이기 때문에 매일 우리 삶의 영역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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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모세의 율법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겼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디자인에 따라 주어진 장막이 있었으며
여호수아의 인도함에 따라 가나안 땅에 그 장막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잇는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을 집겠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이 만든 곳에 계실 수 없는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종교적 기득권과 유대 선민사상,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그들이 그토록 붙들고 있는 율법과 지키고자 하는 성전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또한 간절히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메시아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기 위해
말할 수 없이 위대하게 바라보았던 아브라함과 요셉, 모세와 다윗 모두 죽은 자와 같은 존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져내셨음을 그들의 역사 가운데 나타내어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의 열매들, 생각과 말, 행동과 눈빛까지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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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여기서 보면 스데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큰 성전을 지었을 때 그때를 교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건물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겨냥해서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혹 교회를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건물을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크고 화려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작고 초라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건물만을 가지고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의 설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어떤 건물도 없고, 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이 없는 광야에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교회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건물도 아닙니다. 숫자도 아닙니다. 재정도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막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광야)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한 적한 곳이란 말이 광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막6장 32절에서 “막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광야)에 갈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을 벗어나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이 세상의 영광에서 떠난 곳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영광에서 떠난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님 앞에서 홀로 서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더 이상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바라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에게서 참된 위로를 얻고 소망을 얻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광야란 한 순간도 하나님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 광야였습니다(출16:22).
이 광야는 먹을 물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이 광야는 인간의 힘으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하늘의 양식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바위에서 나오는 주님이 주시는 생수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주리게 하시고 목마르게 하셨습니까?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제일 사모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우리가 당장 배고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령의 생수가 없으면 우리는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어도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우리는 만족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실 때 마다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사모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과 기독교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항상 무덤을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구 유럽에는 무덤이 동네 가까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건물 안에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기독교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에는 무덤을 가까이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무덤을 가까이 둡니까?
살아가면서도 항상 죽음을 생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절대 삶을 가볍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도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에는 죽음을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고 하는 죽음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정현채 교수님은 본격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고 하는 죽음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죽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만일 죽음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세상이 있습니다.
또 죽음 이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 우리는 한 순간도 가볍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 왜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죽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인가 하면
죽음이란 우리가 그 동안 살아온 삶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한 평생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성도님들을 보면 돌아가실 때 그 얼굴이 너무 평온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한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평온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합니까?
마지막 죽을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죽어야겠습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마지막 죽을 때 병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단순히 육신적으로 병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인간적으로 보면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누가 스데반의 죽음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죽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죽음이라고 하겠습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죽음도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1. 첫째, 스데반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대부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데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죽을 때까지 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내 놓지 않고 끝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직분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되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분에서 은퇴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직분에서 은퇴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에서 은퇴를 하면 우리는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은퇴를 하고도 눈에 보이는 교회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죽을 때까지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까?
요6장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면
“요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6장 2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예수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일이 너희가 할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합니까?
우리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할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고 찾아온 목사님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십시오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죽어야합니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젊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또 자녀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연세 드신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했을 때 어떻게 말씀을 해 주어야합니까?
내가 평생을 살아보니 나도 그런 일을 수없이 격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그것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다 맡기고 사니 예수님께서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셨다.
그러니 사랑하는 내 아들이 사랑하는 내 딸이 사랑하는 집사야
사랑하는 성도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실 것이다 고 말씀을 해주어야합니다.
이번에 어머니를 만나고 왔는데, 어떤 친척분이 전화를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야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예수 잘 믿는 것이 최고다.
그리고 누가 예수 잘 믿는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기쁘다. 예수 잘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들은 그렇게 잘 믿으시다가
마지막 죽을 때 믿음이 흔들리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겠습니까?
끝까지 예수님을 잘 믿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잘 믿다가 주님께로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김소리 목사
스테판 집사는 모세의 이야기를 하며 변론을 합니다.
스테판은 모세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며
모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오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도 번성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이르자 이스라엘 족속을 교활한 방법을 써서 괴롭히며 학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을 받고 살아갈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이 가득한 이 땅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사명자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약속의 때를 구하면 건져주실 것입니다.
스테판은 호렙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아니라 떨기나무를 통해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온 세상 어디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스데판은 성막을 증거의 장막으로 표현합니다.
성막 안에는 모세가 받은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스테판 집사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지 않는다고 변론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하나님이 서 계시는 발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올바르게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 죄인을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함께 동행 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나를 통해 우리의 가정, 직장, 교회, 도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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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한 모세(7:17-29)
하나님의 때에 모세가 태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모진 핍박을 받고 멸절의 위기를 맞은 때입니다.
모세도 강물에 버려져야 했으나, 하나님의 눈은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세에게 고정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딸을 통해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당대 최고인 애굽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게 하십니다.
40년 후 모세는 ‘말과 하는 일들’에 능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안위보다 동족을 살피고자 합니다.
동족 한 사람을 위해 살인도 불사합니다.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 생각하며 동족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했지만,
도리어 거부당하고 협박을 받아 도주까지 하게 됩니다.
모세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 묵상 질문: 왜 모세는 자기 민족을 돕기 위해 애쓰고도 그들에게 거부당했을까요?
- 적용 질문: 좋은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도리어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7:30-36)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두 아들을 낳고 나그네 신분으로 살아간 지 40년이 지나자,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 칭하시며, 그들의 고난을 보고 탄식 소리를 듣고
이제 그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모세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이 비밀을 알게 된 모세는 비로소 하나님의 대리자,
즉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보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됩니다.
애굽과 미디안에서 총 80년간 자신이 주인 되어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모세는 이제야 비로소
잘못된 모습을 버리며, 하나님이 원하시고 자신도 꿈꾸던 사명을 이루게 됩니다.
- 묵상 질문: 어떻게 모세는 자신이 꿈꾸던 대로 동족을 돌볼 수 있게 되었나요?
- 적용 질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벗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잘못된 헌신(7:44-50)
증거의 장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백성의 순종을 상징합니다(출 40:34-38).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함을 보이시기 위해 장막 짓는 것을 친히 지시하십니다.
장막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강성해지자 다윗 왕은 장막보다 더 위엄 있는 ‘성전’을 짓고 싶어 합니다.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은 성전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삼상 15:22; 사 66:1-4).
- 묵상 질문: 모세가 세운 증거의 장막,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 적용 질문: 지금 내가 하는 노력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요, 나만의 고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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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경험했지만 온전히 순종할 수 없었으며 그 구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약함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과 같이 무지하고 죄악된 마음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으며 거부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율법을 순종함으로 지키셨고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교회 공동체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성전과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성전과 율법의 소중함과 한계를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유가 그들을 목이 곧은 민족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도 목이 곧은 민족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우리의 공로 생각하거나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가입니다.
스데반이 그의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고백이 나오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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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함없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스데반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를 통해 그들의 조상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출생과 성장배경,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는 과정. 그 안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계획과 열심 그리고 실패로 인한 도피. 결국 불꽃 가운데서 부름을 받게 되는 모세를 보게 됩니다.
_ 버려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계속되고 있습니다(17~22절).
하나님은 어떠한 역경 가운데서도 한 번 맺은 언약은 성취해 가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17절). 요셉을 알지 못한 애굽의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불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보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계획은 결코 막지 못했습니다. 비록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어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애굽의 새 임금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학대와 핍박은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백성들의 신음 소리는 높아만 가던 그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계획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 모세가 태어납니다(18~20a절). 그런데 모세는 석 달 동안만 집에서 숨겨 키워오다가, 버려지는데 바로의 딸이 모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삼게 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20b~22절).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구체적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우리의 연약한 처지를 아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 속으로, 절망과 고통의 자리로 내 자신이 버려진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걸음걸음을 인도해 가시고,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학대와 핍박이 최고조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강에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의 아들로 모세가 양육을 받게 되는 이 과정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게됩니까?
_ 도망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계속되고 있습니다(23~29절).
모세는 비록 오리지널 애굽의 문화 속에서 배우며 성장했지만, 히브리 민족이라는 정체성만큼은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민족을 사랑한다고 자부했고, 그에 대해 증명이라도 하듯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 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애굽 사람을 죽였는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25절).. 스데반은 현재 유대인들이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예수님을 떠올리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수 없이 말하고, 가르치고, 듣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나에게 없도록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29절)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의욕적으로 내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 보려고 했지만, 의욕만 앞세웠던 모세였습니다. 미디안에 정착하여 평범한 목자로 아들 둘 낳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구원의 계획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십니다. 모세의 도망은 도망 그 자체로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리 녹록치가 않습니다. 때로는 손해도 감수해야 하고, 높은 자리, 개인적 이득도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로인하여 사람들로부터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실패자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하든지 간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만 떳떳하다면 나는 결코 미련하지도, 어리석지도, 실패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행동에 대해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이 모세를 끝까지 보호해 주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손해를 봐야만 했던 적이 있습니까?
_ 죽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계속되고 있습니다(30~36절).
모세가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세는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합니다(30~32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33절). 하나님이 임재하신 그곳이 곧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고 있는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밟는 모든 곳이 곧 거룩한 곳입니다. 내가 밟고 있는 그 땅이 죄악으로 오염되지 않고, 거룩한 곳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부터 거룩한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 사명을 받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34절). 그를 거부하고, 거절했던 곳으로 속량하는 자로 다시 보낸다는 것입니다. ‘네가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27절)며 거절했던 그 땅으로 다시 속량하는 자로 보내십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죽을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괴로움을 받음을 확실히 보고,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위험이 도살이고 있지만 그 자리로 모세를 보내십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은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다시금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허물에 대해 벌하지 않으시고 긍휼의 은혜로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불꽃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밟는 땅의 거룩함을 위해 지금 내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순종함으로 이루어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행 7:17~36절)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중재자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금송아지를 숭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성전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전을 우상화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에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외식 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대해 지적하며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_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삶입니다(37~41절).
스데반은 구약에 모세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9:15절).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기억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그러나 정작 모세가 말한 선지자인 예수가 왔을 때, 그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말씀에 대해 불순종 하고 배척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가 예언했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그들은 결국 그 예수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이 내 삶으로 적용되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만큼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고, 신앙의 영향력을 삶의 자리에서 나타낼 때, 그 지식과 앎은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 간 사이에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며 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섬기며 즐거워하였습니다(40~41절).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애굽의 포로생활에서 행방되는 구원의 빛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은 ‘..애굽으로 향하여..’(39절) 있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게으름과 탐욕과 정욕과 시기와 질투등의 죄의 근성이 남아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던 유대인들이 정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악의 근성은 무엇입니까?
_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삶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42~43절).
‘하나님이 외면하사... 버려두셨으니...’(42절).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이라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참으로 엄중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의 대가로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 숭배를 행했습니다. ‘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42절). 그들의 형식적인 제사 행위에 대해 꾸짖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 자신들이 경배하려고 몰렉 신의 장막과 신의 별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43절).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선언입니다.
결국 이 예언대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우상 숭배한 조상들을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버려두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을 계속해서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심판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내 안에 좌정하셔서 나와 영원한 교제를 나누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내 안에 우상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께로 나아감에 있어 방해가 되는 내 안에 우상은 무엇입니까?
_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로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44~53절).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 그리고 백성들과의 만남의 장소로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44절).
성막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 그들의 삶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성막은 다윗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를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솔로몬의 때에 이루어졌습니다(46~47절). 그런데 그 이후 이스라엘은 성전이 갖는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망각 했고, 급기야는 성전 그 자체를 우상화 해 버리는 죄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국한될 수 없는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성전 그 자체는 하나의 건물에 불과한 것입니다(48~50절). 그런데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위를 생각하지도 않고 성전 모독 죄목을 뒤집어씌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장소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외형적 건물을 멋있게 가꾸기에 앞서, 내 마음의 성전을 정결하게 가꾸어가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역해왔고, 심지어는 옛날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그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죄악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51~52절). 또한 율법을 지킨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53절)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스데반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 즉 모양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이 아닌지 심히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알고 있음에도 내 안에는 여전히 교만함과 영적 무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심하게 책망하고 있는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의 성전의 상태는 지금 어떠합니까?
오늘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7:37~53절).
주님,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은 결코 무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에 소망이 없어 보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일하시고 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어디에서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
스데반의 세 번째 메시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학교에서의 불순종입니다. 스데반은 메시지의 2/3 이상을 모세와 광야 학교에 대해 할애를 하며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셨으며 또한 그들을 광야로 불러내셔서 모세를 통해 광야 수업을 받게 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수업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끝없는 불평불만이 저들의 주특기였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불순종은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성전 시대가 열렸지만 계속되었습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스데반의 결론은 "너희 유대인들이여, 너희는 너희 조상이 광야 학교에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뿐 아니라(53 천사가 전한 율법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은혜로 주셨음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박해한 불순종의 DNA를 가진 자들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정곡을 찌르는 스데반의 말에 저들은 양심이 찔렸고 그 반응은 스데반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스데반이 나타나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말씀을 선포한다면 어떤 설교를 할 것이라 기대하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간의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면하고 구원을 받았음에도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광야 2세대가 하는 일은 매일같이 부모 세대의 시체를 땅에 묻는 일이었습니다. 저들은 부모 세대의 실패를 보면서 자신들은 그렇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고 그 결과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 세대가 죽고 잊힐 무렵 가나안 2,3세대들은 차츰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위기의 순간에만 하나님을 찾는 파트타임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처럼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 즉 육신의 할례자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자,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 구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라고 하니까 너무도 값싸고 손쉬운 구원으로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구원은 따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할례자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셔서 손쉬운 방법을 고안해 내신 것이 마음의 할례가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는 편하고 손쉬운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 태초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광야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고, 심지어 파트타임 신자에 머문 상태에서 진정한 구원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풀타임 신자를 원하십니다. 풀타임 사역자 즉 목회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Daily Chritian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돛는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말씀을 외면하고 기도와 찬양을 걸러도 전혀 마음에 미동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설령 무식해서 성경을 읽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듣고 알고 있는 말씀에 의지해서 살려는 노력이 없는 것을 그저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말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믿음을 얻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Believer's Church'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교의 교회에 대한 정의입니다. 교회는 종교인 양성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얼떨결에 교회에 나왔다면 말씀 앞에서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되어야 됩니다. 내 자아를 완전히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를 다듬어 교회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위와 같은 고집덩어리와 교만 덩어리를 집을 건축하는데 어디에 쓰겠습니까? 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기초석인데, 그런 자아로 가득찬 개인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안에 불순종의 교만 덩어리가 있습니까? 고집불통의 바위 덩어리가 있습니까?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에 "됐다!"라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됐다!", "테텔레스타이!"라고 말씀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 이루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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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죽음이 임박해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한 선지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행7:37)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표적보다 더 큰 표적들을 많이 보았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왜 믿지 않았을까요?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눈 멀고 귀 멀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행7:39) 마음이 우상을 향하여 눈 멀고 귀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행7:41)
그래서 눈을 지으시고 귀를 만드신 하나님이 외면하시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행7:42~43)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들을 믿지 않는 자가 받는 정죄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며 자기들이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 부인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왜냐하면 그들이 주를 섬기는 듯 하지만
두 마음을 품어 세상을 사랑하여 우상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말씀을 보고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 숭배를 피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
그렇다면 우상 숭배가 뭘까요?
땅에 있는 지체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우상 숭배자는 다 성 밖에 있을 것입니다(계22:15)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그래서 육신을 따라 넓은 사망길로 갈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좁은 생명길로 가기 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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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믿음을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표적과 기사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캐톨릭에서는 한 사람을 성인추대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관련된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표적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표적은 성경시대 곧 아직 성경이 기록되고 있던 시기여서 아직도 누군가는
성경의 권위로 말을 하고 누군가는 자기 말을 하는 시대에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시대가 아니라
성경이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에 누가 말하는 것인지 참과 거짓은 완성된 성경을 통해 구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거절하기를 '기적'을 요구하였다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거절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통제와 자기 생각속으로 가두어 놓고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생각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갈 때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는 참 다양합니다. 그들은 모세까지도 거절하였고 심지어는 그들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또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수없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의 틀 속에서 하나님이 잘못되었고 하나님께서 문제가 있어 자신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를 깨트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절하는 이는 항상 자신의 '무엇'때문입니다. 그 무엇이 깨져야 합니다. 힘을 다 빼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거꾸러져야 합니다. 나의 무엇을 쥐고 있는 것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데반의 연설에서 한 사람의 연설이 아니라 두 시대를 봅니다. 스데반의 연설에서 한 사람의 개인적인 법정의 변론이 아니라 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훌륭한 정리를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단한 중심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중심의 준비는 마치 오랫동안 땅 속에서 아무 표시도 나지 않은채 몇년을 준비하였다가 일순간에 몇 미터로 자라는 대나무와도 같습니다.
나는 구제하지 않는 부자가 문제가 아니라 가난할 때 구제할 준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이고, 큰 교회가 교회다운 일을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작은 교회일 때 그렇게 준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단한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시는 외적인 일에 대해서는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지금 단단한 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아마 많은 부분이 이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 기록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느라 저도 많이 고생하였습니다. 그만큼 아주 중심이 단단합니다. 중심을 단단히 하는데 마음을 다하십시오.
스데반의 변론의 탄탄함을 통해 그가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준비되었기에 한 시대가 완성되고 다른 시대를 열수 있었습니다. 그 중심의 단단함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중심의 단단함에 마음을 쏟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믿음 하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무지와 혼란가운데 있지 말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믿음에 대해 단단한 중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더 나아가 말씀과 기도를 아는 일에 단단한 중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크고 깊은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세상 가운데 주님을 나타내는 소금과 빛으로
나아가도록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생명들에게 회복의 손길과 치유의 광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