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세를 사람답게 살았던 유물론적 철학자 데모크리토스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적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근대 과학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데모크리토스는 트라키아의 압데라에서 출생했다. 부유한 시민의 아들로 부모의 막대한 유산을 받은 그는, 일찍이 이집트와 그 밖의 동방 세계를 여행했다고 전해진다.
레우깁포스에게 배운 후, 그 생애의 대부분을 연구와 저술 및 교수로서 보낸 그는. 무비의 박학인 때문에 "소피아 Sophia(知慧)"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공허하게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잘 웃었기 때문에 "게라시노스 Gelasinos(웃는 철인)"로도 불리었다. 그는 플라톤의 후기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때에는 중시(重視)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때때로 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여행을 좋아했고, 여행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너무 가난해져서 형제인 다마소스에게 생계를 지원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예언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자신의 책 《대우주 체계》를 사람들에게 낭독해주고 어마무시한 돈을 벌게 된다.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으며, 심지어 생전에 청동상까지 세워졌다.
일을 좋아했던 데모크리토스는 정원에 일부를 떼어 내 쪽방 하나를 만들고 거기서 사색과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철학뿐 아니라 문학, 천문학, 수학, 물리학, 의학, 농학, 지리학, 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박학자라 불렸다. 그러나 명성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남에게 알려지는 데 열을 내지 않았다.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 가서 그가 한 말이 유명하다. "나는 아테네로 왔으며,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했다." 고 말했으며, ’말은 행위의 그림자다.“라는 말을 남겨 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임종은 다음과 같다. 그가 너무 연로해서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누이는 테스모포로스 축제[5] 사이에 그가 죽을 참이라는 걸 알고, 축제 때 그녀가 여신에게 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그 모습을 본 데모크리토스는 누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자신에게 따뜻한 빵을 매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이 빵을 코에 대고서 스스로 축제 기간 동안 살아 있었다. 3일이 지나고 그는 아무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고 이때 그의 나이 109세[6]였고, 죽은 뒤 국가에서 장례를 치러줬다.
“청년기의 자존심은 혈기와 아름다움에 있지만, 노년기의 자존심은 분별력에 있다.”
(The pride of youth is in strength and beauty, the pride of old age is in discretion)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
(Do not trust all men, but trust men of worth; the former course is silly, the latter a mark of prudence.)
“행복은 소유물이나 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맛일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상들이 우리 눈에 떨어지는 데 따른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인생의 최고목적이란 쾌활함에 있으며, 모든 일에서의 온건함과 문화적 고양을 통해 그것이 잘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쾌와 불쾌는 이로운 것들과 이롭지 못한 것들을 구별하는 경계"이고,이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가장 최선은, 가능한 가장 유쾌하게 그리고 가능한 가장 괴롭지 않게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보다는 혼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혼의 완전함은 육체의 결함을 바로잡지만, 육체의 강함은 헤아림이 함께 하지 않으면 혼을 조금도 더 낫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데모크리토스의 '쾌활함'은 그 뒤에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의 왕국을 갖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원인 설명을 찾아내길 원한다.”
“세계는 무대, 삶은 한 편의 연극, 그대는 와서, 보고, 떠나네.”
“사람은 작은 우주와 같다.”
“광기 없이는 그 어떤 누구도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명언을 남긴 데모크리토스를 위해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자신의 책 《팜메트로스》에서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타고난 지혜를 가졌을 것이며,
누가 모든 것을 데모크리토스가 이룬 만큼의 일을 이룩했겠는가?
그는 죽음이 사흘 동안 곁에 있을 때 집에서 견디며
빵의 따뜻한 기운으로 씻어내고 있었네.
이것이 109세를 사람답게 살다 간 데모크리토스의 삶의 철학이었다.
2025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