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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normal 비정상적인
normal 정상의
norm 규범,기준,표준
나메를 보니 몽골어 책의 뜻인 넘이 보이네요.
몽골어 НОМ [넘]
1.명사 책, 경전.
2.명사 ширээний ~ 늘 사용하는 책.
3.명사 ~ барлах 책을 인쇄하다, 목판으로 출판하다.
페르시아어
تعبیرنامه [ta’bīr-nāme] 너메
해몽책
쿠쉬나메의 줄거리 쿠쉬나메는 쿠쉬라는 무서운 영웅의 전설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시대배경은 사산왕조 페르시아(226~651)가 아랍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이고, 페르시아 주민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피신한 쿠쉬가 주인공이다.
그렇지만 신라 관련 부분은 쿠쉬의 어린 시절 후견인인 아비틴(Abtin)에 집중돼 있다.
[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와 혼인했었다]
이란 국립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이자 아자드대 교수인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전공자인 다르유시 교수의 연락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즉 1998년 이란 학자 잘랄 마티니 교수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는 것. ‘쿠쉬나메(Kush-name)’라고 하는 이 서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그런데 다르유시 교수는 이 책 내용에 ‘shilla(실라)’, ‘즉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희수 교수에게 알려준 것이다.
“2005년부터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이른바 ‘악의 축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30 여 년 간 경제제재에 나선 것에 일종의 오기를 부렸다고 할까요. 어쨌든 다르유시 교수가 사장되다시피 한 ‘쿠쉬나메’를 보고, 그 속에 신라를 다룬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의미는 큽니다. 한양대 연구소와 이란 측의 공동연구 결실이라 할까요.”
무슨 말이냐. 1998년 잘랄 마티니 교수가 ‘쿠쉬나메’를 정리해서 책을 펴냈다지만, 그 속에 포함된 의미는 사장되다시피 했다. 이란 학자들이 대부분 ‘쿠쉬나메’ 속에 있는 ‘신라’를 ‘일본’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아는 학자들은 드물었다. 하기야 최근까지도 한국인이라 하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보는 게 다반사였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이란의 공동연구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신라’의 존재를 인식하고 주목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쿠쉬나메, 파천황의 자료
자료를 입수한 이희수 교수는 깜짝 놀랐다.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족이 신라의 공주와 혼인,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이라크로 귀국해서 폭정자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현재 이 교수를 비롯한 국내학계와 다르유시 교수를 비롯한 이란 학계가 ‘쿠쉬나메’ 해독 및 번역작업을 벌이고 있다. 총 243쪽에 달하는 필사본 원본은 현재 영국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쿠쉬나메는 총 1만129 쿠플레(대구·對句)가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란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전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절은 1만219절 중에서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 역사기록으로 살펴볼 때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아즈데기르드의 왕자 피루즈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과 공동체를 이뤘다.
--->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아즈데기르드는 대구읍성의 왕조이며, 이란왕계보에 나타나는 야즈데게르드 3세 (632년 - 651년)가 아즈데기르드와 동일인물이며, 사산조페르시아(대구읍성왕조)는 연개소문에 의해 651년 멸망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즈데기르드=야즈데게르드,
영국에 보관된 쿠쉬나메의 아즈데기르드 = 이란왕계보의 야즈데게르드
연개소문=김춘추=일본서기의 천무왕=아비틴=처용=이적=이세적,,,,
대서사시인 ‘쿠쉬나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로 이 무렵(7세기 중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사망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쿠쉬나메’에서 ‘쿠쉬’는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전상의 영웅이다. 7세기말 아랍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의 중국 왕으로 묘사된다. ‘나메’는 ‘서(書)’이다. 말하자면 ‘쿠쉬나메’는 ‘쿠쉬서(書)’인 것이다.
---> 7세기말 아랍(중국 당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의 중국왕으로 묘사된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장수라고 알고 있으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며, 영국공 이적은 이세적이며, 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이다.
이세민과 이세적(연개소문)은 형제이거나 당나라황족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개소문=김춘추=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천무왕=아비틴=처용=이적=이세적=이세민의 동생=당태종의 동생 이세적=이세민의 동생 연개소문,,,,,,
쿠쉬나메는 "대구읍성의 서" "대구읍성의 문집"으로 해석하고 싶다.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
<쿠쉬나메>에서 신라관련 내용을 알려온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오른쪽)과 이희수 교수(한양대). |이희수 교수 제공
다음은 이희수 교수가 지금까지 번역한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이희수 교수는 한국·이란 학자들이 한창 번역 중인 내용을 조심스럽게 필자에게 전했다.
7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중국에 망명한 이란인들의 공동체를 지휘하던 인물 가운데 아비틴(Abtin)이 있었다. 그런데 아비틴은 중국 내의 정치적인 대혼란기에 이란 공동체가 도륙을 당하게 되자 망명을 결심한다.
---> 양나라 광개토대왕의 정벌, 당고조의 서역정벌로 달성주위의 오천축은 폐허가 되어 이란(달성)공동체가 도륙을 당하게 되자 망명을 결심한다.
이 내용은 만엽집에 나타나는 연개소문은 왜로가 왜왕에 오른다는 기록과 같다.
신라왕=왜왕=이란왕=대구읍성왕,
아비틴이 이끄는 이란 공동체는 마친(Machin·중국의 주변국)왕의 주선으로 신라로 망명한다. 마친왕은 “신라 왕 타이후르(Tayhur)를 추천한다”면서 “신라는 낙원이나 다름없으며, 침략이 불가능한 안전한 나라”라며 신라를 망명지로 추천한 것이다.
신라왕 타이후르는 아비틴 일행이 신라에 도착하자 극진하게 영접한다. 우선 두 아들이 인솔하는 대군대를 항구로 보내 아비틴 일행을 환대한다. 망명단은 타이후르의 성(城)으로 향한다. 음악이 흐르고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쿠쉬나메>의 저자는 타이후르의 성과 골목, 길가, 정원, 도시의 주변 모습, 신라의 아름다운 음악과 연주자들, 정원의 새들, 왕의 환대 등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타이후르는 이비틴과 함께 황금왕좌에 앉아 연회를 베풀며 긴밀한 대화를 나눈다. 아비틴이 ‘중국으로의 송환’을 걱정하자 타이후르는 “신라는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이라며 “당신 일행을 도울 것”이라고 다짐한다.
---> 달구벌주위의 오천축(탈라스=달성, 토번=서천축=평리동=페르시아, 동천축=위나라=사산왕조 페르시아=오화성=대구읍성,,,,,)은 AD400년경 광개토대왕의 속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증거로는 덕흥리왕릉, 위의 글내용)
오천축의 문자는 각 나라들 마다 달랐고, 중국과 서로 문자가 달랐기 때문에 중국사람(연개소문 고선지 훌라구 광개토 그리고 중국의 왕족,,,,)이 오천축의 왕이 되었으나, 이들 중국왕족들은 오천축의 언어와 문자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세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 증표로 진귀한 선물을 건네준다. 아비틴과 타이후르는 이란의 스포츠인 폴로(격구)를 즐긴다. 원래는 ‘신라 대 이란’으로 팀을 나눠 경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비틴은 국가간 경기가 과열양상으로 치닫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양국 선수들을 섞어 경기를 치른다. 타이후르는 “이란인들의 폴로실력이 대단하다”고 격찬한다.
■신라의 해상봉쇄에 나선 중국
---> 대구읍성과 달성은 해海였다.
또한 달성과 대구읍성은 새(사막)였다.
사서의 기록에 새를 벗어났다. 사막에 다다렀다는 뜻은 달성과 대구읍성주위를 벗어났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달성서쪽에 새길시장이라는 지명이 있다.
"새길"이라는 뜻은 "새로운 길" "사잇 길"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새길의 뜻은 그리스문자에 나타나는 새타의 길, θ의 기산, θ의 기자, θ의 길주 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길주목사는 번조선의 목사, 평양성의 목사, 기자의 목사, 즉 명나라가 도읍지로 있었는 평리동의 목사라는 뜻이 되며, 인조임금시기의 길주목사는 평리동을 감시하는 목사가 길주목사라고 하였을 것이다.
중국이 신라의 해상을 봉쇄한다는 것은 중국(하빈)세력이 달성과 대구읍성주위를 봉쇄한다는 뜻이다.
이란 남성들이 이란 유적을 답사하던 한국여성에게 ‘양금이’하면서 다가와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필자 일행이 2008년 2월 이란답사 중 겪은 흥미로운 광경이다.
중국의 쿠쉬(왕)는 이란인들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에 분노한다.
--->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이 부분은 중국땅인 쿠쉬(대구읍성)인데, 이란인(여기서는 평리동사람을 나타낸다고 보고 싶다)들과 함께 신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에 분노한다로 해석하고 싶다.
신라왕과 아비틴은 협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타이후르는 모욕감이 치를 떨며 아비틴에게 “가장 강경한 어조로 답장을 보내라”고 요청한다. 중국 왕은 대대적인 침공에 나선다.
---> 이 시기는 김춘추(연개소문) 김유신등이 활약하던 시기이며, 신라에서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다는 시기이다.
하지만 신라-이란 연합군은 곧 중국 침공군을 대파하고 대륙으로 쫓아낸다. 허겁지겁 도망간 중국왕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신라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신라를 계속해서 포위하고 타이후르가 스스로 항복하게 해라.”
말하자면 직접 공격 대신, ‘해상봉쇄를 통한 경제제재’가 효과적인 공세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치 요즘 서방의 이란 경제제재를 방불케 하는 대목이다. 중국왕이 이란인들의 신라망명을 주선한 마친왕을 핍박하자 신라-이란 연합군은 중국 원정길을 떠난다. 아비틴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중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뒤 전리품의 반을 신라에 보낸다.
■신라 공주와 결혼하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비틴은 다시 신라왕 타이후르의 환대를 받는다. 아비틴은 타이후르의 딸인 신라공주 프라랑(Frarang)과 혼인할 마음을 갖는다.
---> 일본의 만엽집에 의하면,
김유신의 여동생은 보희이며, 보희는 연개소문과 결혼하여 신라 문무왕 김법민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법민이 삼국을 통일했다는 문무왕이며,
프라랑이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다.
아비틴=연개소문=김춘추
프라랑=보희
우마이야=파리둔=김법민
프라랑, 우마이야, 쿠쉬, 아비틴 등은 과거 대구읍성사람들은 알파벳을 사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측근들로부터 “신라 소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덕까지 갖췄으며, 그 가운데 신라공주가 최고”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비틴은 타이후르를 만나 조심스럽게 “따님과 혼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라왕은 주저한다.
“신라법에 이방인에게 딸자식을 내주지 않아요. 내가 딸을 내준다면 귀족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아바틴은 자신이 이란의 전설적인 왕인 잠쉬드(Jamshid)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절대 우스운 혼인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고민하던 타이후르는 마침내 혼인을 승락한다.
하지만 조건을 단다. 아비틴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공주 프라랑을 10명의 처녀들 틈에 섞어 놓고는 “찾아보라”고 시험한 것이다.
아비틴은 좌절하지만, 몰래 공주의 인상착의를 가르쳐 준 측근들의 기지 덕분에 공주를 찾는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됐다. 성대한 혼인식을 치른 아비틴-프라랑 커플은 아이를 임신한다.
그런데 아비틴의 꿈에 “장차 태어날 왕자가 바그다드의 자하크(아랍의 폭정자)을 물리치고 이란인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계시가 나타난다. 신라왕은 낙담했지만 부부를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프라랑은 이란으로 가는 배에서 왕자를 생산한다. 왕자의 이름은 파리둔(Faridun)이다. 이란에 도착한 아비틴은 자하크의 맹공세에 그만 전사하고 만다. 너무 어렸던 파리둔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채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 파리둔=우마이야=김법민=문무왕,
평리동=페르시아=이란,
신라=사산조페르시아=바그다드=대구읍성,
연개소문(아비틴)은 이란(평양성 평리동)에 도착하여 자하크(장안)의 맹공세에 그만 전사하였다.
연개소문은 문무왕(김법민)을 낳고 곧 전사했음이 드러난다.,
■중국대륙을 점령한 신라
한편 신라도 6년에 걸친 중국왕 쿠쉬의 맹공에 말려 누란의 위기에 빠진다.
---> 타이후르=김유신,
쿠쉬를 지명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사람이름으로 보아야 하는가!
6년에 걸친 중국왕 쿠쉬의 맹공이 있었다로 보면, 쿠쉬는 중국의 왕이름이다.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은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이 된다. 이 무렵 신라왕 타이후르는 이란에 있는 딸 프라랑의 편지를 받는다.
“아버지, 저의 아들, 파리둔이 자하크를 패배시키고 철끈으로 묶어 산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군대를 죽였습니다.”
타이후르는 매우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타이후르는 마친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바하크의 땅으로 남아있던 곳을 차지하고, 중국의 수도 호마단(Khomadan)까지 점령한다.
타이후르는 중국과 마친에서 7년을 보냈고, 결국 병들어 신라로 돌아와 신라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이 왕좌를 이어 신라를 다스린다.
이상이 이희수 교수가 전한 <쿠쉬나메>, 대강의 내용이다. 이희수 교수의 말마따나 이 서사시에 역사적인 정당성을 주기는 쉽지 않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역이 당시 신라사회의 지명이나 인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 왕실이나 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역이 당시 신라사회의 지명 인명과 일치하지 못한다. 당시 신라왕실이나 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가 신라인들의 후예라고 보면, 우리는 한문을 사용하든지 우리말의 언어가 쿠쉬나메에 실려있어야 하는데, 알파벳언어가 100%이고, 한문이나 우리말의 언어는 하나도 쿠쉬나메에 실려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집트문자, 알파벳, 아랍문자, 한문, 히라가나, 몽골문자, 히브리문자, 산스크리트문자,,,, 모든 문자들이 달구벌에서 만들어졌다.
중국과 오천축의 문자는 달랐다.
양서에 의하면 "오천축은 여러 나라가 있었고, 각 나라들 마다 문자가 달랐다"고 기록했다.
달성의 동 서 남 북천축은 서로 문자가 달랐고, 달성을 넘어 영역을 확대할 수 없다. (해에 막혔다, 사막에 다다렀다는 기록은 달성을 넘어 영역을 확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쿠쉬나메의 문자는 아랍문자다.
달성의 동 서 남 북의 오천축과 중국(하빈)은 서로 전혀 다른 문자를 사용하였고, 독자적인 문자와 언어를 형성하였다.
달구벌에서 사용하던 문자를 모르면, 쿠쉬나메를 보고도 쿠쉬나메는 우리의 선조들의 역사서가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낙양가람기 위서서역전 동방견문록 오도릭기 중국25사 일본서기 만엽집 고사기,,,,등을 보고도, 이 땅의 역사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달구벌의 유적지를 발굴하여 이집트문자 알파벳 아랍문자 한문 히라가나 몽골문자 히브리문자 산스크리트문자,,,모든 문자들이 달구벌에서 만들어졌음을 밝혀야 한다. (청동거울문자 명도전문자 달성의고대문자 하빈의고대문자 울산청송사의산스크리트문자 대동강의 히브리문자와편 삼전도비문의만주문자등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신화나 서사시, 전설은 그 민족의 문화원형이자 역사원형이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서구문화의 원형이 됐고, 단군신화가 한민족 역사의 원형이 됐듯,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희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고고학, 민속학,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용한 해석의 길잡이임에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쿠쉬나메는 새빨간 거짓의 기록인가, 아니면 뭔가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가. 이제 <쿠쉬나메>에 숨겨진 비밀의 단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상에서 쿠쉬는 무슨 뜻인가?
위 내용을 보면 쿠쉬는 중국의 왕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낙재선생일기에 1592년 임진년의 난리에 왜장이 스스로 "왜추"라고 하기도 하고, "대구쉬"라고 하기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쿠쉬나가라, 쿠쉬나메, 대구쉬의 "구쉬(쿠쉬)"는 무슨 뜻으로 보아야 하는가?
낙재선생일기에서 왜장이 대구쉬라고 했다는 것은 대구읍성의 인조임금이 난리를 일으켜 스스로 "대구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인조=청태조=누루하치,,,,이며, 청태조가 대구읍성에서 대구쉬라고 하였다는 뜻이며, 중국왕이 대구읍성(신라)에서 대구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된다.
순임금은 대구읍성에 도읍했다.
쉬의 뜻은 순임금을 나타낸다.
수리 - 순임금의 무리,
중국왕이 대구읍성에서 왕이 되었다는 뜻으로 "대구쉬"라고 불렀다.
그럼 쿠쉬나메는 언재 달구벌에서 현재의 영국으로 건너갔는가?
영국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병풍이 현재의 영국에 있었는가?
영국에서 발견된 임진왜란과 관련된 병풍은 조작의 그림이며, 왜곡된 조작의 그림을 누가 영국에 옮겨 놓았는가?
현재의 서울에 있는 삼전도비는 조작의 내용을 싣고 있다.
인조가 청태조에게 항복하는 그림은 조작이다.
인조와 청태조는 동일인물이다.
인조가 청태조에게 항복할 수 없다.
쿠쉬나메의 내용도 쿠쉬는 중국왕을 나타내고 있어서, "중국왕의 문집" "중국왕의 書" "어느 중국왕의 글"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는 인조(청태조)임금의 문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이 해석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쿠쉬나메가 언재부터 언재까지의 기록인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쿠쉬나메는 총 1만129 쿠플레(대구·對句)가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란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전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절은 1만219절 중에서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
신라의 내용은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고 하며, 5925절 이후에도 많은 량의 기록이 있다면, 이는 청나라에서 쿠쉬나메를 만들어 영국에 옮겨 놓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의 여행기, 오도릭기, 쿠쉬나메, 만엽집, 일본서기, 중국25사,,,,, 모든 기록물들이 세계 각지에 옮겨져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해사록, 목천현지, 지봉유설, 매창선생집,,,등에 기록된 항해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젤란이 가장 먼저 세계일주를 했다고 하지만, 중국(하빈과 달구벌)세력이 가장 먼저 세계지도를 그리고, 가장 먼저 항해를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청나라(대구읍성 일본 조선)에서 임진왜란 이후 현재의 일본 이란 조선에 대구읍성왕계보를 옮기고, 이집트에 달성의 왕계보를 옮기고, 로마에 남산동(비잔틴) 평리동(토번)왕계보를 옮겨 놓았다.
임진왜란은 대구에서 일어났고, 임진왜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했고, 임진왜란은 용호장군(인조, 청태조, 이순신, 누루하치, 노이합적, 이양,,,,)의 쿠테타임을 알면, 역사가 어떻게 조작되고 왜곡되는지 보인다.
쿠쉬나메의 뜻은 중국(하빈)왕이 대구읍성에서 왕에 오른 연개소문의 문집,
그리고 인조임금의 문집이라는 뜻이 있다고 본다.
1517년의 기록이 있다면, 이는 임진왜란이후 청나라(조선 일본)에서 쿠쉬나메를 만들어 영국에 옮겨 놓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일본사=중국사=조선사=영국사=몽골사=천축사=인도사=그리스로마사=이집트사=하빈과달구벌사,,,,
일본서기=중국25사=조선사=환단고기=쿠쉬나메=동방견문록=이븐바투타의여행기=오도릭기=낙양가람기=위서서역전=대당서역기=하빈과달구벌사,,,,
영어알파벳=그리스문자=로마문자=아랍문자=이집트문자=히브리문자=한문=훈민정음=히라가나=하빈과달구벌에서 사용하던 문자,,,,
몽골족=동이족=중화족=선비족=한족=돌궐족=왜족=만주족=하빈과달구벌족,,,,,
친일파=친중파=수구보수파=진보파,,,,
친일파라는 것은 청나라와 친한 사람을 나타낸다.
청나라=조선=일본은 대구읍성이다.
대구읍성에서 갈라져 나갔으나, 황제는 한사람이다.
친일파가 있는가?
청나라황제(조선왕 일본왕)가 역사를 조작하다보니 친일파 친중파 보수파들이 생긴 것이다.
친일파=친중파=보수파=결국 대구읍성파라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황제가 아침에 일본왕이 되었다가, 저녁에 중국왕이 되었다가, 밤에 조선왕이 되었다면, 아침에 친일파고 저녁엔 친중파고 밤엔 조선파인가?
청나라(조선 일본)가 대구읍성에 있었으므로, 친일파 친중파 보수파를 나눌 수 없다.
조선사를 일본에서 왜곡했다는 것은, 대구읍성의 황제(청나라왕=일본왕=조선왕)가 조선사를 왜곡했다는 뜻이다.
이유립선생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
이유립선생은 자신이 청나라의 황제 직계손임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이유립의 선대계보는 청나라황제의 가계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유립은 알유헌원도당지속 하훈육 주험윤 한흉노라고 하여, 알유(하빈의 묘동)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고,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왕계보를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역사서를 이유립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며, 숨겨진 역사서는 청나라황실에서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출처:https://blog.naver.com/whdrbs3000/8017668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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