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탄생 예고 -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 1395-14550)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개요
연대와 기간
1779년(기해년, 정조 3년)부터 1784년(갑진년, 정조 8년)까지 5년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광암 이벽, 녹암 권철신, 직암 권일신, 만천 이승훈, 선암 정약종
참여한 관계 인물
손암 정약전, 다산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주요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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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연구와 강의(녹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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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학 연구와 강의 및 천주교 신앙 주도(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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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신앙생활 실천(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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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주일 제정, 엄수(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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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공경가 저술(광암)
- 성교요지 저술(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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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창립 주도(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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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천 이승훈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주도(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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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표동(광암자택)으로 교회 이전, 그 후 명례방으로 이전(광암)
천진암 강학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1779)
우리 선조들은 옛부터 영원한 진리를 스스로 탐구하며,
지극히 높으신 천주를 공경하여 왔었다.
특히 하느님이 보내주신 큰 스승이신 선각자 이벽 성조의 주도로,
1779년에는 학문적 지식을 탐구하던 강학회를, 종교적 신앙의 수련회로
발전시켰으며, 또 이벽 성조께서는 신구약 대의를 집약하여
「성교요지」라는 긴 서사시를 읊조리고 「천주공경가」를 지어 불렀고,
강학회 참석자였던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어 불렀으며,
당시 한국에는 양력과 요일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서,
모르고 있던 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날을 정하여
지켜야 함을 알게 되자, 매월 음력으로 초하루, 초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를 임시 주일로 정하여, 온종일 기도와 묵상,
단식과 파공으로 지냄으로써, 천주의 계명과 교회의 법규를 알고 있는
한은 최선을 다하여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천진암에서의 한국 천주교회는 양반계층의
학자들이 대부분이었고,주로 한문으로 된 기도문을 바쳤으니,
양반학자 남자들만의 한문사용 천주교회였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 초상
이승훈 선생 북경파견과 영세(1783)
마침내, 구원의 성사적 은총을 로마교회로부터 전승하여 받고자,
1783년 늦가을(11월 18일)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현들은 수차에 걸친
시도와 실패를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이웃나라 북경 천주교회로,
강학자들 중 하나인 이승훈 선생을 파견하여,
마침내 1784년 봄에 성사은총을 받아오게 하였다.
따라서 권고하거나 지도하는 이들이 없어도, 마치 성령으로 인도되던
주님의 사도들처럼, 우리 선조들은 복음의 진리와 구원의 성사적 은총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며, 전국 각 지방을 분담하여, 많은 동포
형제들에게 불철주야로 이를 전달하여 주었으며,
필설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갖가지 난관을 극복하여 나갔다.
수표동에서의 서민교회 출발과 명례방으로의 이전(1784)
이승훈 선생께서 영세하고 돌아온 후, 한국 천주교회는 천진암 계곡에서
5년간의 연구, 실천 시기를 끝내고, 이벽 성조의 집이 있는
서울 수표동으로 옮겼으며, 여기서는 양반 남자 학자들 중심의 한문기도
사용위주의 교회가, 당시 언문이라고 부르던 국문밖에 모르는
일반 서민들, 특히 중인, 상인들의 교회로까지 발전하였으니,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한국 천주교회창립자들의 부인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이벽 성조의 부인 유한당 권씨(병조판서 권암의 딸), 이승훈 선생의 부인
라주 정씨(다산 정약용의 누이), 직암 권일신 사우거사의
부인 광주 안씨 (순암 안정복의 딸) 등은 천주교 교리의 우월성에 대한
신앙심 위에 당시 사회의 여필종부 정신의 영향으로,
남편들을 따라 천주교를 믿는 동시에, 집안 내의 한문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하여, 한문으로 된 기도서와 교리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일반 상민들의 입교를 늘리었고, 이벽 성조의 양반집에는 상민신자들의
출입과 집회가 부자유스러워서,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이벽 성조의 제자이고, 중인계급의 한의원 의사이며,
통역관이었던 김정지(金正之), 즉 김범우 선생의 병원으로 집회장소를
옮기게 되었으며, 명례방 김범우 선생의 병원에서는 남녀유별,
장유유서, 양반 상인 계급차별 등의 제약을 덜 받게 되었다.
즉, 천진암에서 출발한 양반 남자들만의 천주교회가
수표동에 와서 남녀서민 천주교회로 분리되었다가,
명례방에서 통합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 장안 명례방에서 힘찬 발전을 하게 되었다.
최초의 박해와 창립자의 순교(1785)
성직자없이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는,
성사적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뿐,
지상의 사목적인 면에서 볼 때는, 목자의 시야와 손길에서
멀리 떨어진, 가시덤불 속의 양들이나, 부모 없는 고아들과 같았다.
그런데, 이 어린 새싹 위에, 무자비한 박해의 칼날이 서릿발처럼 닥쳤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들은 모두가 거룩하고 용감하게,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아무도 격려하며 거들어주는 이들이 없이도, 오로지 천주님만 신뢰하면서,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뿌리려는 자세로
기꺼이 목숨을 바치며,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였다.
그리하여 1785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주역을 담당했던
세자 요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 그 당시 나라의 권력과 사회 풍습에서
오는 강력한 탄압과 한층 더 가중된 문중박해로 인하여 집안에 감금되고,
아버지가 목을 매달기까지 하면서 자살로 위협하는,
가장 무섭고 처절한 박해 중에서도 식음을 전폐하고,
의복을 갈아입지 아니하며, 철야기도와 묵상으로 신앙을 증거하다가,
14일 만에 온몸이 탈진하여, 만 31세를 일기로,1785년 6월 14일,
장렬하고 거룩하게 순절하셨다.
단식과 기도와 묵상중 천주와의 일치 속에서 이루어진 이 거룩하고
영웅다운 순절이 한국 천주교회가 천주께 드린 최초의 제물이었다.
가톨릭 첫 희생자 김범우 초상
김범우 선생의 귀양살이와 순교(1787)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 세자 요한 광암 이벽 성조의 뒤를 이어,
교회 창립에 기둥과도 같이 활약했던 모든 어진 학자들이
제 각각 상이한 희생으로, 동일한 천주의 진리를 증거하였는데,
토마스 김범우 선생은 오늘의 서울 명동 주교좌 대성당이 자리잡은
명례방 임시 성당의 집 주인으로, 위의 최초 박해로 인하여 관헌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매를 맞고, 경남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나 귀양소에서나 항상 큰 소리로 기도를 바치며,
구원의 진리를 증언하다가, 감옥에서 맞은 매의 장독으로 인하여,
귀양지에서 1787년 7월 16일에 천주를 부르며 목숨을 바쳤으니,
한국 천주교회가 천주께 바친 두번째 희생 제물이었다.
임시준 성직자단의 활동(1788)
성직자없이 갓 태어나서 최초의 박해를 당하여,
창립자를 잃고 임시 성당을 잃고, 각 가정과 이웃과 마을이,
그리고 나라와 사회가 미움의 시선으로 무서운 박해를 하는 중에도,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기둥과도 같이 활약했던
우리 선조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 전파와 성사은총 전달을 위한 열성에 불탄 나머지,
교회의 법규를 충분히 모르고, 자발적으로 임시 준 성직자단을 구성하여,
흩어지는 양떼들을 다시 모아 결속시키고, 미신자들을 새로이 입교시키며,
교회를 재건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천주교회 성직자제도의 신품성사에 관하여 어렴풋이
회의를 갖기 시작하자, 이웃 나라 북경 천주교회의 주교에게 문의하였고,
1789년에 교권의 깨우쳐줌을 듣고는,
즉시 성무집행을 중지하며 겸손되이 순명하였다.
동시에 방인성직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마침내 김대건, 최양업신부를 내기에 이르게 되었다.
성모상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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