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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3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제1독서 : 스바 3,14-18
복 음 : 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니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조각의 천재입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매일 20시간씩 14년간 계속 일했는데도 제가 천재로 보이십니까?”
어떤 선천적인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노력을 통해
다른 이의 눈에는 천재 이상의 인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능을 주지 않으신 하느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 있는 자신의 탓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계속되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벌써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나 자신은 세상 안에서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한 노력이 과연 충만했을까요?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교만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서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당시 이 두 분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지요.
엘리사벳 성녀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것에 대한 걱정,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한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러한 걱정이 있을 때,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셨고
이 둘은 서로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의 이 만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시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휴대전화가 있어서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만남을 위해 성모님께서는 힘든 방문을 하셨습니다.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자기 자리만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때일수록 주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길 바란다고 기도하시는 분을 봅니다
(사실 자기 뜻을 이뤄달라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어떤 노력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떠실까요?
노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성사는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결합이다.
고유한
관계 안에서
자라나는
우리들 신앙이다.
세례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드러내는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분명한 자기계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건네신다.
삼위일체는
구원의 역사이다.
내적인 관계를
통하여
동참하시고 참여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협력하시며
구원을 완성하신다.
성부의 창조와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성화는
우리를 향해 있다.
삼위일체 관계는
상호적인
공동체의 관계이다.
공동체는
사랑을 주고받는
실천의 자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다.
그 어디에도
종속시킬 수
없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일체(一體)의 신비이다.
정의롭고
공평하고
평등한 협력을
삼위일체는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다.
가장 좋으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다.
참된 사랑을
회복하고
실천해야 할
우리들임을
삼위일체의 신비는
가르쳐주고 있다.
서로를
섬기는
참된 사랑이다.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 입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돌계집으로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이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찬양을 받은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비천한 이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권능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은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대해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만남이요 친교요 소통입니다.
곧 그들의 만남과 친교와 소통은 '믿음'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벌어집니다.
엘리사벳은 믿음 안에서 마리아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여인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서로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동창 신부님이 한국에서 전화하였습니다.
요즘은 카톡으로 전화를 하니 전화비에 대한 부담은 없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받으니 ‘잘 지내는지 물었습니다.’ 며칠 전에 꿈속에서 저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소식도 있었고, 걱정도 되어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꿈에서 봤다고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의 소식을 듣고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대하였습니다.
동창 회장이었을 때입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친구가 있으면 꼭 찾아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친구의 성격과 분위기에 맞는 화분을 준비해서 방문했습니다.
준비해온 화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축일을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저도 동창 회장을 했었습니다. 축일 선물은 한꺼번에 같은 것을 사서 동창 모임에서 주었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지만 세심한 배려는 부족했습니다.
코로나19로 요즘은 거의 없지만 코로나19 이전에는
제가 있는 신문사로 신부님들이 자주 오셨습니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2월까지 4달가량 신부님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대부분 안식년이었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도착한지 2달가량 되었을 때입니다.
불편한 잠자리지만 신부님들은 모두 즐겁게 지냈습니다.
뮤지컬도 보았고, 센트럴파크에도 다녀왔습니다. 근교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백신이 널리 보급되고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들이 봄이 되면 다시 찾아오듯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신부님들이 뉴욕을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하루 지내면서 식사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신부님들이 오면 식사도 같이하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함께했던 시대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경험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보스턴, 코네티컷, 필라델피아의 한인 성당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보스턴에 가면 미사 전에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함께 하였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보스턴 시내를 구경하였습니다.
보스턴의 신부님은 소탈한 웃음으로 배웅하며 다음에도 오라고 하였습니다.
코네티컷 신부님은 인터넷에서 요리하는 법을 배워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었습니다.
텃밭도 가꾸고, 직접 술도 담았습니다.
더덕주, 과일주, 막걸리를 만들었습니다. 생각이 깊고, 성실한 신부님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신부님은 신자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신문을 홍보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신자분들은 후원금도 주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신부님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인 신부님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강생하신 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을 기쁨에 찬 어조로 전합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노령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 마리아는
"서둘러" 그녀를 방문합니다.
당시 교통 여건이나 사회적 안전망은 소녀가 홀로 여행을 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참 적극적이고 용감해 보입니다.
혹자는 이 방문에 대해 출산을 앞둔 노령의 사촌에게 봉사하려는
마리아의 착한 심성을 주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천사의 전언을 확인하려는 발걸음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순간을, 강생하신 창조주를 인간의 무리가 환대하는 첫 만남의 자리라 보고 싶습니다.
사실 인간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모든 지향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어놀았습니다."(루카 1,44)
마리아의 인사말이 들리자 엘리사벳 태 안에서 아기가 기뻐 뜁니다.
훗날 예수님의 오실 길을 마련할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르단 강가 광야에서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신랑의 친구"입니다.(요한 3,29 참조)
마리아가 남모르게 성령으로 잉태한 뒤
이토록 기쁨 충만한 축하와 격려를 받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또 마리아의 순결한 태 안에 자리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토록 열렬히 환대를 받으신 적이 있었던가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때이고 그 순간입니다.
엄마 엘리사벳은 뱃속 아기의 움직임에서 창조주를 맞이하는 영광에 찬 기쁨을 감지하고,
있는 그대로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이를 듣는 마리아의 마음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찬미의 기도로 터져 나오지요.
그 기도가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요한의 기쁨에 찬 환영을 받으신 마리아 태중의 아기는
당신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마니피캇 안에는 고통과 슬픔에 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생생히 녹아있는 겁니다.
하느님은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이, 불의한 통치로 제 잇속이나 채우는 권력자,
자기만 누리는 부유함에 도취된 이들을 내치시는 혁명가 같은 분이시지요.
동시에 그분은 비천하고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시는 보호자이십니다.
마리아의 입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도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오시는 주님과
그분을 맞이하는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며 복음의 장면을 준비시킵니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이제 이스라엘은 한껏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됩니다.
승리의 용사이신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하시고
영영 불행을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역경을
염려할 것 없이 이제로부터 영원히 이어질 주님 현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위로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7)
우리와 주님이 서로를 향해 환성으로 올리는 이 장면을 관상합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 주님의 기쁨이 그런 주님으로 인해 느끼는 우리의 기쁨을 압도합니다.
하느님이 비천하고 가난한 우리로 인해 이토록 행복하시다니요!
이토록 열락에 차 어쩔 줄을 모르시다니요!
스바니야 예언서의 이 행복이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예수님과 태아 요한에게로 이어졌지요.
이 복되고 신비롭고 유쾌한 만남이 이루어진 유다 산골은 이 순간 이스라엘 전체,
온 세상 전체를 품고 있는 작은 우주일 것이고, 이 축제는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위로의 어머니 마리아는 버겁고 힘겹고 슬프고 아픈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분은 홀로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함께시지요.
예수님을 빼고는 마리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하느님의 마음을 투영해
우리를 격려하고 어루만져 주시며 힘을 북돋우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여러 기쁨과 슬픔의 궤적을 지나온 오월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하느님을 선물하신 마리아를 깊은 감사와 사랑으로 환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복됩니다.
이 행복을 잘 간직한 채,
뜨거운 예수님의 성심으로 더욱 깊이 파고드는 6월을 향해 나아갑시다.
지난 한 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 기쁨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세 요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기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함으로써 참 기쁨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잉태하신 어마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온 인류에게 이 행복을 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늙은 사촌 누이와 그 태중의 아기를 기쁘게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참 기쁨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가족쇼크’에서 김용준(21세) 씨는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의 전화를 계속 받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들과 단둘이 살았는데, 아들이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 혼자 고통을 견뎌야 할 뿐입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방에 놓습니다.
그러며 전화를 안 받는 아들을 원망합니다.
아들은 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머니의 전화까지 외면하는 것일까요?
김용준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락을 안 하면 싫어할 수 있겠다.’ 생각은 하지만,
전화해서 목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현실이 눈앞에 딱, 있다는 느낌?
엄마가 저보고 살았고 저도 엄마만 보고 살았으니까. 엄청 소중하죠.
아직은 함께 할 게 많았는데! 제일 하고 싶은 건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먹는 거.”
김용준 씨는 아직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더 받아야 하는 상태인데 이제 엄마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엄마 임종 직전에야 엄마를 볼 용기를 내어 찾아갑니다. 그러나 울기만 합니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아들을 위해 머리맡에 숨겨 두었던 5만 원 지폐를 쥐여줍니다.
엄마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아들은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 주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무언가 주어야 하는데 아직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죽어가는 엄마를 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두 번째는 내가 주는 것을 기쁘게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참 기쁨의 삶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당신의 능력으로 누구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아셨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가시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은총이 있더라도 그 은총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레오파드 증후군이라는 병 때문에 태어나면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자란 이예지 양.
검은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예지 씨는 부모의 존재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으면 좋고 배고프면 화를 내는 동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부모는 그녀와 소통을 할 수 없어서 예지가 짜증을 내며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고 자해를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주고 싶어도 받을 능력이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질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자신들처럼 대해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줄 능력을 지닌 엘리사벳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누구나 줄 것이 있고 그 줄 것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겸손’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순절 동안 특강을 같은 내용으로 17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는 것이 사순절 때 주님께 바치는 희생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번째 강의를 마치고 많은 감사와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커다란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이게 다인가?’
저는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남을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려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능력이 없는데 내가 기뻐지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그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준 씨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어도 아직 힘이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을 기쁘게 할 힘도 받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전에 ‘가장 작은 학교’라고 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한 시골 학교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고 학생도 한 명입니다.
선생님은 그 한 명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아이도 선생님에게 참으로 고마워합니다.
그 한 명이 없으면 자신은 선생님일 수 없고 아이는 학생일 수 없습니다.
교실에 선생님 한 분, 학생 한 명이 수업하는 사진을 보며
‘하느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주실 때도 이와 같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말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다행이셨을까요?
들어줄 성모 마리아가 없으셨다면 말씀은 아버지 입에서 나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줄 성모 마리아 한 분을 보며 기뻐하셨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한 분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더 바란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도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 가진 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조회수에 신경이 쓰입니다. 교만의 병이 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 할 말이 있고 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기쁠 수 있는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으려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 다음은 내가 줄 것을 받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니
줄 것이 있고 받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기쁘게 감사해야 할 겸손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