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장복겸(張復謙)의 연시조 고산별곡] 세상 시름 잊고 자연 아름다움 노래
2014-03-14 기고
필자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옥경헌유고(玉鏡軒遺稿)」를 접하게 된 것은 1987년 전주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했던 김종진 씨로부터다. 마침 호남을 중심으로 수집한 고서의 해제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그로부터 이 문집에 실려 있는 ‘고산별곡가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경헌 유고에 실려 있는 것처럼 가사문학작품이 아니었다. 거개의 고전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창(唱)으로 향유하기 위한 가사(歌詞)였지, 문학장르상으로 통칭되는 가사(歌辭)문학 장르가 아니라 10수의 연시조였다. 이 고산별곡은 필자의 작품연구를 거쳐 1988년 「국어국문학」 102집에 실리게 되었다.
광해군 9년에 전북 임실군 지사면에서 태어난 장복겸(張復謙 1617- 1703)은 영천 위에 있는 고산(일명 독뫼)의 승경과 아래로 아름다운 서호의 중간에 외롭지 않다는 ‘불고정(不孤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가사(歌詞) 10장’이라는 연시조 〈고산별곡〉 10수를 지었다. 강호한정을 노래한 이 〈고산별곡(孤山別曲)〉은 조선중기의 은일처사 옥경헌 장복겸이 남원부 거녕현(현 임실군 지사면)에 살면서 지은 연시조이다. 아버지 흥성(현 전북 흥덕)인 장사랑 담(膽)과 효령대군 2세손인 어머니 석성(石城)의 정증손녀 슬하에서 태어났으나, 7-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고산 윤선도가 6세의 어린 나이에 친부모의 슬하를 떠나 물설고 낯설은 전남 해남의 백부댁에 양자로 입양된 고독한 문학적 환경과 동질적이다.
그래서인지 장복겸은 고산 윤선도보다 30년 후세인으로 자신이 지은 〈고산별곡〉은 윤선도(1587 -1671)의 〈산중신곡〉이나 〈어부사시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옥경헌은 그가 양육되었던 외가에 후사가 없고 서자만 있으므로 국전에 따라 전답을 고루 분배함으로 제사를 지낼 서자를 위해 자신에게 분배된 재산을 내놓을 정도로 당시의 서얼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선각자였을 뿐만 아니라, 핍박받던 민중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지닌 사대부였다.
그는 현종 11년(1670년)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이 심해지자, 백성들을 위한 환상(還上)제도가 오히려 고리(高利)의 이식(利殖)으로 민생고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며, 사농공상 중 농사짓기가 가장 힘든데 선비는 무위도식하는 계층이기 때문에 소학과 사서를 터득한 업유(業儒), 활과 말타기를 익힌 업무(業武), 나머지 무리를 업농(業農) 등 3등급으로 분류하고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무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구폐소(救弊疏)를 올린 민주적인 의무론을 제기한 선각자였다는 것이다. 실제 이 당시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높은 이율로 국고의 쌀을 대여하고 가을에 수확한 곡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가렴주구의 지방관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방 곳곳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고, 마침내 동학혁명의 농민전쟁이 일어난 도화선도 되었다.
옥경헌은 지배계급인 사대부 계층을 혁신하여 각자 소임을 다함으로써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야 하고, 민중들을 이러한 지배자의 부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대부였기 때문에 고리의 환상제도의 폐해를 없애야 하고 무위도식하는 유학자들을 각자 소양에 따라 업유, 업무, 업농의 3부류로 나누어 일하게 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구폐소를 왕께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대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분연히 의병에 가담하여 나라를 위기로부터 헌신적으로 구해낸 선진 지배자나 민중들이 많았고, 이로써 조선사회의 삶의 문화가 세계적인 선진대열에 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옥경헌은 집문 밖 시냇가 독뫼(일명 고산)에 불고정(不孤亭)을 짓고 수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로 〈고산별곡〉 10수의 연시조를 남겼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작품은 「옥경헌유고」 가사(歌詞)편에 〈고산별곡〉이라는 제하에 실었는데, 고산과 서호의 절경에 옥경헌과 불고정을 짓고 달 밝은 밤, 서늘한 바람, 흐드러지게 핀 꽃들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그 연시조에 담겨있다, 거개의 강호류의 시가들이 자의든 타의든 환로(宦路)에서 벗어나 자연에 묻혀서 그 아픔을 달래고 자위하는 수단으로 음풍농월한 것과는 달리 장복겸의 〈고산별곡〉은 애당초 벼슬길과 무관한 순연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가치 있는 처사적 인생을 노래했다는데 남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청산(靑山)은 에워들고 녹수(綠水)는 돌아가고
석양(夕陽)이 거들 때에 신월(新月)이 솟아난다
일존주(一尊酒)가지고 시름 풀자 하노라
(중략)
[5]옥경헌(玉鏡軒) 잠을 깨어 눈유장(嫩柳莊) 안니다가
청계석(靑溪石) 흩디디어 불고정(不孤亭) 올라가니
아이야 일호주(一壺酒) 가지고 날을 찾아 오너라
(중략)
[10]국 안주(安酒) 깊은 잔 좌상(座上)께 나소오고
노래 춤 장고 북은 젊은이 맡겨두고
아이야 종이 붓 먹 들여라 연구(聯句)한 작 하옵세
[1]의 ‘청산은’은 여타 은일류의 작품이 그러하듯 청산, 녹수, 석양, 신월, 일존주를 주된 소재로 하고 있다. 청산은 첩첩이 안으로 에워싸고 있지만 녹수가 돌아서 주야장천 흘러가는 공간을 제공하는 가운데 한낮이 지나면 석양이 오고 석양이 지나면 동녘에 청신한 새달이 솟아오른다는 만유불변의 이법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변화무쌍한 인간들에 대한 서글픔을 노래하고 있다. [5]의 ‘옥경헌’은 하루의 일상을 압축하여 마치 일기 쓰듯 서술하고 있다. 옥경헌에서 잠을 깨어 눈유장에 있다가 푸른 이끼가 낀 징검다리를 지나 불고정에 올라서 술과 벗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10]의 ‘국안주’는 고산별곡의 마무리 장으로서 시주(詩酒)와 벗, 달, 거문고로서 위안을 삼아 보지만 그것만으로 자위할 수 없는 화자는 고려속요 청산별곡의 마지막 8연과 같이 ‘깊은 잔(盞)’많은 술에 자신을 의지하여 현실의 아픔을 달래었고, 더욱이 노래, 춤, 장고, 북소리를 즐기며 인간 본연의 고독을 치유하려 안간 힘을 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산별곡은 청산, 녹수, 석양, 신월, 술, 삼척금(三尺琴) 등 자연을 주요 소재로 삼아 시를 읊조리는 가운데 세상시름과 번뇌를 잊고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면서 자오자락(自娛自樂)하는 게 작자의 주된 정서다. 옥경헌의 작품도 이념을 앞세운 정제된 소재나 공식화된 소재로서 시조작품을 생산하는 일반적인 고시조와 마찬가지로 작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출세하여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지절을 노래할 때 으레 관례적으로 물이나 달을 등장시키면서 더욱이 인간이 아닌 달을 유일한 벗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은 고산 윤선도가 수석송죽월의 자연을 오우(五友)로 삼고 있는 경지와도 동질적이어서 이 두 작품의 상관성이 있었음직도 하다.
옥경헌의 문학적 배경이 된 불고정은 남원부 거녕현(현 전북 임실 지사면 영천리)에 장복겸이 세운 정자이다. 집문 밖에 ‘독뫼’라 부르는 작은 ‘고산(孤山)’이 있는데, 그 산 위에 정자를 지어서 ‘불고정(不孤亭)’이라 하였다. 이는 정극인이 전북 정읍 칠보 동진강 가에 초옥을 짓고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우헌(不憂軒)’이라 이름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고산(孤山)’과 ‘불고(不孤)’의 아이러니는 옥경헌 스스로의 심회를 드러낸 것이지만, 그 행장을 보면 소동파가 ‘산은 외롭지 않다’라고 한 말에서 취의(取義)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장복겸은 때로 이 정자에 노닐며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고 외롭지 않음을 읊조리기도 했고, 달 밝은 창가에 고요히 앉아 도의를 강론하고 학문을 닦는 즐거움을 스스로 누리며 살았는데 바로 이러한 것들이 ‘불고정’이라고 명명한 작자의 의취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산별곡〉 10장의 연시조가 300 여 년 전에 전북 임실 영천에서 장복겸에 의해 생산되어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나 〈산중신곡〉과 더불어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우리 국문학 의 시가작품의 질량을 높였다는 사실은 자못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북일보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수고히셨습니다
장복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고정이 지금도 있습니까?
찾아가고 싶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글 쓰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정말 너무 수고 하셨내요
읽기도 힘이 드는데 너무 고생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