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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레위기의 말씀 23,1.4-11.15-16.27.34ㄴ-37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합니다.
고향에서는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그저 고향 사람의 딸이나 아들이요 친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초등학교 동창이 수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의 첫마디는 ‘걔가 수녀가 되었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이 신자도 아니었고, 아주 평범했던 친구가 수녀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저희 수도회의 관구장이 되고 수녀님은 그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저의 형제들과 그곳 수녀님들을 의식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관계를 피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녀님을 하느님께서 수녀로 부르시고 하느님께서 원장 수녀로 임명하셨는데 나는 여전히 인간적 관계인 동창으로만 보고 있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런 인간적인 관점 때문에 얼마나 관계가 부자연스럽고 해가 많았는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즉시 하느님 안에서 그분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수녀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여러 가지 은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그 수녀님을 통해서 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볼 때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내 뜻대로 안 될 때 인간적으로 보면 그것이 내 탓이거나 네 탓이라고 인간적으로 이유를 찾지만, 믿음으로 보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거나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적으로 보면 아내가 내가 선택한 짝이거나 장인의 딸일 뿐이지만, 믿음으로 보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짝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혜와 힘을 넘어서는 지혜와 힘을 볼 때 인간적으로 보면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지만, 믿음으로 보면 즉시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믿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해 뜨는 것을 자연 현상으로만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고, 꽃을 꽃으로만 보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로 보지 못하며, 세속화된 사제에게서 죄만 보고 하느님의 사제임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볼 때 그 안에서 하느님을 봅니다.
바위를 볼 때 바위이신 하느님을 보고, 사제를 볼 때 하느님의 사제를 봅니다.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내가 솔로몬이 가졌던 그 정도의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의 가엾은 사제들을 만난다 해도, 그들을 마치 나의 주인인 듯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또 그들이 나의 주인이므로 그들 안에서 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보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보지 않으며,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섣부른 앎이 병이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 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 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 2,40.콜로 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 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 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내세우는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뿌리 깊은 선입견은 대상을 왜곡되게 보게 하는 색안경이 되어 진실을 가립니다.”
(함께야)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를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 것〉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확 달라져 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잘 압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코로나도 그 성장을 꺾지 못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국민 가게라 불리는 ‘다이소’입니다.
보통 다이소는 일본 것이라고 여기고 팔리지 않는 싸구려 제품을 파는 곳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000원짜리로 질 좋은 제품을 팔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이소가 전국 모든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을 합친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1,500여 매장에서 연 매출 3조 원에 달하는 성과를 냅니다.
1,000~5,000원짜리를 팔아서 그정도 매출이 나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1997년 천호동에 1호점을 열 때, 한국에서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팽배했고 ‘1,000원짜리 팔아서 뭐가 남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50대 이상보다 2330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숍이 되었습니다.
저도 ‘1,000원짜리가 뭐 품질이 좋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 방문해보고는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없는 게 없고 가격에 비해 품질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소 신화를 이룩한 박정부 회장의 그러한 지혜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지혜와 힘은 자신 안에서 샘솟지 못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저절로 똑똑해지는 사람 없고, 음식을 먹지 않고 에너지가 솟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지혜와 힘은 외부로부터 온 것입니다.
박정부 회장은 45세에 회사를 사퇴하고 먹고 살 일이 막연하여 무역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일본 100엔숍을 접하게 됩니다.
미국엔 1달러숍이 있고 유럽에도 그러한 회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일본 다이소에 납품하며 배운 것과 유럽을 다니며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10년을 준비하여 천호동 1호점을 엽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가게가 될 리가 없다고, 특별히 서울 잘 사는 동네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말렸지만,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용기는 오히려 잘사는 나라에서 더 건전한 소비를 한다는 지혜를 획득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이런 지혜와 힘은 분명 이미 그러한 사업으로 성공하고 있는 선진국의 상황을 보고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의 힘으로 이뤄집니다.
믿음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박 회장의 지혜와 기적 같은 힘은 바로 외국의 성공을 믿고 잘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노력한 결과가 지금의 다이소를 만들었습니다.
박정부 회장이 한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역업을 하며 외국의 상황을 공부하고 배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고향에만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배우고 공부하셨습니다.
그런 시간을 무엇이라 할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바로 이 기도의 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기도의 힘을 믿을 수 있어야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한 수녀님이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할 때 “그럼 가서 성체 앞에서 기도하세요”라고 하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러자 정말 학교 파업으로 남게 된 부식을 수녀원에 가져온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기도를 믿는 것은 하나입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믿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도하면 다 깨달을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음을 믿읍시다.
기도를 믿음과 주님을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악령을 쫓아내시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제로서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성사 집전에 충실함을 통해 성화의 길을>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여기저기 본당 특강을 다니면서, 제2의 비안네 신부님들을 많이 만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신부님들 머릿속에는 오로지 본당 교우들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긴급 병자 성사나 장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할까 봐, 잠시도 본당을 비우지 못하십니다.
뭐라도 하나 생기면, 도움이 필요한 교우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교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교우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드리고 희망을 드리기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강론을 준비하십니다.
이런 신부님을 목자로 모신 교우들 표정은 다들 환한 보름달 같습니다.
교우들 표정 보면 즉시 딱 견적이 나옵니다.
그런 분위기에 감동 받은 제가 한 마디 인사치레라도 할라치면, 즉시 하시는 말씀, “우리 본당 교우들이 정말 착하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의 탁월한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비안네 신부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부족한 사제이지만, 이정표로 삼을 모델이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비안네 신부님께서 탁월한 성인(聖人)으로 자리매김하신 배경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분이 성인이 되신 비결은 뭐 엄청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제로서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성사 집전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특히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오늘 저희 사제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은 고백성사에 그렇게 충실하셨고, 목숨을 거셨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고백성사의 탁월한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교우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거룩한 영적 생활로 인도하는 데 있어 고백성사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제 생활 내내 고백성사에 올인하신 것입니다.
잘 나가실 때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하루 24시간 중에 15~17시간 동안 고백소 안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에게 고백성사를 보는 교우들의 숫자는 1년에 평균 2만 명이 달했습니다.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혹한이 찾아오는 아르스의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고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교우들은 하루 온종일, 혹은 이틀, 사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41년간의 혹사에 시달리던 비안네 신부님은 1859년 7월 29일 17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외치셨답니다.
“여기까지! 나는 이제 그만이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그는 닷새 후 8월 4일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주된 업무인 성사 집전에 충실함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자렛의 겨자씨>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또 예수님 자신도 목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6,3).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 어떤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운 적 없는 학력에 대한 편견 등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고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에 ‘목수’는 천대받는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는 말은 표현만 보면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인정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목수 따위가 예언자 행세를 하는군.” 이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전체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는 아닙니다.
나자렛에서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몇 명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라고 기록했고,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나자렛에서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그 몇 명의 병자들은 황무지처럼 척박한 땅 나자렛에 예수님께서 심으신 ‘겨자씨’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겨자씨가 나중에 어떻게 자라서 어떤 나무가 되었는지, 얼마나 열매를 맺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심으신 일이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과 마주쳤습니다(마르 5,1-9).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고(마르 5,10-12),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해버렸고, 마귀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마르 5,13).
그것을 본 게라사인들은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마르 5,17).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지방을 그냥 떠나시게 되었는데,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마르 5,18-20)
복음화의 관점에서 보면, 게라사인들의 지방은 사막과도 같은 불모지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으셨습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한 것은 분명히 겨자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에서의 선교 활동’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활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실패’인데(사도 17,16-33), ‘완전한 실패’는 아니고, 몇 명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사도 17,34)
그 몇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 지역에 심은 겨자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분명히 자기들만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복음의 겨자씨’ 역할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먼저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신앙인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하면서, 항상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여정 - 전례와 믿음; 믿음의 은총, 믿음의 공부와 훈련>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시편 81,2ㄱ)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모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하고도 결정적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사랑에서처럼 믿음의 여정에서도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에 읽은 교황님의 리스본에서 젊은이들에게 한 강론중 두 말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미래도 없다.”, “젊은이들여 너희들 손을 더럽히는(dirty)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인들의 삶에서, 우리 신자들의 삶에서 하느님을, 믿음을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허무와 무지의 제로일 것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마음의 병 중 가장 큰 병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라 합니다.
역시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노년의 품위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의 지론입니다.
하느님 믿음 빠지면 건강과 돈만 남고 이 둘이 절대적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믿음이 빠진 그 자리에 탐욕이나 허무가 자리 잡을 것이고 인간 품위의 상실이 뒤따를 것입니다.
또 하나 오래전부터 강조한 예가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라는 말마디입니다.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관계는 얼마나 많습니까?
혈연관계 역시 이해관계 앞에는 참 무력합니다.
정말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뿐입니다.
믿음 역시 부모로부터, 선배나 이웃으로부터 보고 배웁니다.
그러니 평상시 몸에 밴 믿음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뼈가 시리도록 밤낮 늘 외롭다고 했습니다.
외로움, 그리움은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텅빈 외로운 마음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남편한테 자녀들한테 올인했다 합니다.
남편이, 자식만 있었지 그안에 하느님이, 내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믿음의 관계가 참으로 허약했던 것입니다.
궁극의 믿음, 희망, 사랑은 하느님뿐임을 잊었던 것입니다.
믿음 없는 인간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믿음의 성장도 없습니다.
믿음의 은총이지만 부단한 자발적 믿음의 공부와 훈련도 필히 뒤따라야 합니다.
평생 믿음의 공부와 훈련입니다.
역시 죽어야 끝나는 믿음의 공부와 훈련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회개하는 것도 바로 믿음의 훈련에 속합니다.
제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일어나자마자 쓰는 강론도 믿음의 공부와 훈련에 속합니다.
소리없이 노화되는 모습처럼 소리없이 성장하는 나무들의 모습입니다.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2009년 애목이었는데, 14년 지난 지금은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믿음의 여정중인 우리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성장하는 믿음의 나무에,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관계인지 묻게 됩니다.
우연한 갑작스러운 믿음의 성장은 없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날마다 정성을 다해 돌보고 가꿔야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공부와 훈련에 결정적인 것이 바로 교회의 전례입니다.
전례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는 온통 이스라엘의 축일들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의 전례력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믿음은 구체적 전례 수행의 훈련을 전제로 합니다.
믿음의 공부와 훈련에 이은 믿음의 습관화입니다.
우리 천주교 역시 전례력이 있고 전례력에 따라 공동체가 지켜야 할 축일들이 즐비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공동전례 축일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축일들입니다.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로 시작된 레위기 23장은 온통 이스라엘 축일들이 얼마나 견고한 믿음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자주 되풀이 되는 말마디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믿음에 주력한 축일들인지요!
오늘 복음은 지금까지 하늘 나라의 비유를 멋지게 설파하신 주님께서 고향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예화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무지의 편견은 바로 믿음 없음을 반영합니다.
그대로 우리 신자들의 보편적 부정적 모습들이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이처럼 철벽같은 무지의 편견입니다.
과연 이런 무지의 편견에서 자유로울자 몇이나 될런지요?
이 고향 사람들은 믿음 부재의 반영으로 하느님 중심의 축일들의 수행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축일들에 마음을 다해 참석하며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았다면 이런 무지의 편견은 없겠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편견에 눈멀어 예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한 고향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못했다 합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선행할 때 비로소 가능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편견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요 믿음없이는 기적도 없습니다.
오늘은 프랑스 리옹 출신의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믿음의 여정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믿음의 대가, 성 요한 마리 비안네입니다.
부진한 학업에 여러 어려운 환경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의 믿음의 노력으로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41년 동안 한결같이 전력투구한 믿음의 성인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마리 비안네 사제가 훌륭한 목자가 되는 데 결정적 모범을 보인 분이, 비안네의 롤 모델이 아르스 본당의 전임 사제 발레리입니다.
비안네는 발레리 신부의 온유함과 굳은 신앙심, 사제로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성인의 말년 시 감동적 일화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1855년경 아르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숫자는 2만명에 달했다.
하루 단위로 하면 매일 60명이요 그후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하루에 최소 16시간에서 최대 18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냈고,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마침내 1859년 8월 4일 새벽 2시,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41년 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아르스에서 선종하니 향년 73세였다.
그가 선종한 날에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울었다.’
비안네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1925년 시성됐고 1929년 본당 신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성 요한 마리 비안네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의 참된 모범”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살아있는 보물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있는 믿음의 전사인 우리를 분발케 하는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해줍니다.
믿음의 공부와 훈련과 습관에 날마다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고해인생을 믿음의 축제인생으로 바꿔 주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선거 때 대통령 후보들이 자주 찾는 곳들이 있습니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시장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서민들은 후보들의 그런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표를 얻기 위한 가식인지 분별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산업현장으로 시찰을 가기도 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대통령이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전국적으로 호우가 발생해서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이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피해자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감독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도자는 무릇 서민들과 함께하는 동반자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현장에 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반은 맞을지 몰라도 국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그분들의 삶은 후세의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던 베드로 성인이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회개하며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던 바오로 성인이 있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눈썹하나 흔들리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던 성인들이 있습니다.
성인전을 읽으면 감동의 눈물이 나기도 하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생각도 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분들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의 나는 작은 고통에도 참지 못하고, 담대한 용기도 없으며, 뜨거운 열정과 굳건한 신앙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친밀감이 가는 성인도 있습니다.
백정이었고, 글도 잘 몰랐는데 어쩌다 교리를 배워 순교의 영광을 얻은 성인도 있습니다.
평생 수도원의 마당을 쓸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성인이 된 ‘빗자루 수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있습니다.
학문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여러 곳으로 복음을 선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생 본당에서 사제로 성사를 충실히 집전했어도 공경 받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생깁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 더 나아가 ‘열등감’에서 생기기 마련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한겨울에 길고양이가 불쌍하다며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길고양이가 너무 많다면서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며 아이한테 저분 덕분에 깨끗이 산다고 말하고,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돈이 많아도 티 내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부자도 아니면서 돈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곳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를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또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자기의 마음이 끌리는 모습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을 각자 가지고 있기에 더 나은 가치를 찾으면서 살 수 있는 것도 될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 부정하기만 하면 함께 사는 방법이 사라지고 맙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은 혼자서 여행을 가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하고도 말하지 말고 딱 일주일만 지내보십시오.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해지는지 모릅니다.
평소 과묵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혼자만의 삶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스스로 외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특히 주님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 없이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아직은 더 세상의 것에 집중할 시간이라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목수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성경 공부에 전념하지도 않았고, 율법학자도 아니었기에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면서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 당연히 함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함께하지 못하는 곳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길 바라는 주님의 뜻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함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도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겠습니까?
주님과도 함께 해야 하며, 나의 이웃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나의 뜻과 맞지 않다고 해서 거부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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