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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망하는 고려에 명운을 걸다 비참하게 패배한 비극적 군상과 함께,
단호한 개혁의 비전으로 조선을 힘차게 열어 간 호걸들의 이야기다.
삼국과 고려가 ‘자연적 국가’(natural state)인 반면,
조선은 설계도에 의해 건설된 ‘의식적 국가’(conscious state)다.
그래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나간 인물들은 지략이 넘치고 의지가 헌걸차다.
공민왕·이제현·이색·신돈·우왕·이인임·최영·이성계·정몽주·정도전·조준·길재 등
12인의 드라마를 독자와 함께 감상해본다.
백성을 근간으로 한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공민왕 암살사건 이후 오랜 유배와 유랑생활을 거치며 정도전은 ‘백성’을 발견했다.
군주도 백성 때문에 존재하며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도전은 성리학적 윤리와 배치되는 배신과 패륜을 극복하고
혁명을 꿈꾸는 대항 엘리트로 변신할 수 있었다.
1395년 3월 20일 조선 건국 후 4년째 되는 봄,
이성계는 새 수도 한양의 새 궁궐, 바람과 볕이 잘 드는 양청( 廳)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손님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옛 친구들인 남양백 홍영통과 창녕부원군 성여완 등이었다.
합석한 판삼사사 정도전이 시를 지어 올렸다.
충북 단양군 매포읍의 도담삼봉(명승 제44호).
단양팔경의 하나로 남한강 상류에 3개의 기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3개 봉우리는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가운데 가장 큰 봉우리 허리쯤에 자리 잡은 정자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금원(禁院)에 봄이 깊어 꽃은 한창인데/ 옛 친구 부르고자 금술통 마련했네/
하늘마저 때맞춰 홀연히 봄비 보내시니/ 온몸에 우로(雨露)같은 은혜 깨닫겠구나.”([태조실록])
양력으로는 4월 10일이니 나무에 연둣빛 새싹이 푸르고
진달래와 벚꽃, 복숭아꽃, 앵두꽃이 화사했을 것이다.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고우(故友)였다.
정도전은 봄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이성계의 은혜에 취했다.
그해 초겨울(12월 12일) 밤에도 이성계는 건국 훈신을 불러 주연을 마련했다.
풍악이 울리고 주연이 무르익자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 등의 힘이다.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만대에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정도전이 지은 악장(樂章)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했다.
그 내용인즉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베푼 인정(仁政)에 대한 것이었다.
언로를 열고 공신을 보존하며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예악을 제정한 것 등 네 가지다.
‘개언로’(開言路)만 보자.
“대궐이 엄숙하고 구중으로 깊으며/ 하루에 만 가지 일이 숲처럼 쌓이누나/
왕정의 요체는 민정에 통하는 거라/ 언로를 활짝 열어 만민의 소리를 듣네/
언로가 열렸어라/ 신의 소견으로는/ 우리 임금 성덕이 순임금과 같으시네.”([삼봉집])
노래가 시작되자 이성계는 “이 곡은 경이 찬진(撰進)한 바이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라”고 했다.
정도전은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상의를 벗고 춤을 추라 하고 담비 털로 만든 고급 갖옷 귀갑구(龜甲)를 하사했다.
밤새도록 심히 즐겼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사이는 이처럼 따뜻하고 깊었다.
그런데 개국할 무렵 술에 취하면 정도전은 종종
“한고조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스스로 이성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도전을 낮춰 본 태종도 그 점은 일부 인정했다.
“부왕 때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하나는 몽주고, 하나는 도전이었다.
몽주는 왕씨 말년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했고,
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해 힘을 다했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은 것이다.”([태종실록])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조선경국전]은 그 설계도로써 국가 제도의 골간을 제시했다.
[경제문감]은 재상 이하 대간·수령 등 관리의 모범상을,
[경제문감별집]은 이상적 군주상을 다루었다.
국가제도와 공직자상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정치와 국가의 문제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독립 저술이다.
삼국과 고려가 자연적 국가라면 조선은 의식적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라는 뜻이다.
하지만 1409년 이성계의 건원릉에 세운 비석에는 ‘간신(奸臣) 정도전’으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권근이 썼다. 그것은 조선 역사에서 정도전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권근이 밝힌 정도전의 죄는
“표문의 글 때문에 중국 조정의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命)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1398년) 8월에 우리 태조가 편찮은 틈을 타서
어린 얼자( 子, 이방석)를 끼고 자기의 뜻을 펴 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태종실록])
제1차 왕자의 난이 초래한 비극을 모두 정도전의 죄로 돌린 것이다.
송시열도 같은 논리로 그를 비난했다.
“개국 초 간신 정도전 등이 위험한 말로 선동하고 사악한 꾀를 비밀리에 행하여
태조대왕이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소도(昭悼, 이방석)를 포함한
이공(二公, 방번·방석)을 요절하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건원릉 비석에 ‘간신’으로 기록되다
두 사람의 비판은 조선 건국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하지만 허균은 정도전을 임금과 나라를 팔은 극악의 간신이라고 비난했다.
정도전은 마음에도 없는 이성계를 꾀어 역성혁명을 했다고 비판했다.
국망의 간신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정도전은 최악이라는 것이다.
“거취의 형세를 엿보아 임금과 나라를 팔아넘기며 그런 계책을 종용해서 부귀를 도모하는 자가 있고,
겁 많고 나약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오직 욕되게 살기만을 일삼으며,
부끄러움을 참고 원수를 잊으면서 구차하게 딴 성씨(姓氏)를 섬기는 자도 있다.
정도전은 전자고, 권근은 후자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전자는 하늘이 그나마 살려주지만 후자는 반드시 죽임을 면치 못한다.
권근은 제 명에 죽었고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고 일족까지 멸망시켰으니
나는 여기에서 더욱 확증을 갖게 되었다.”([惺所覆藁] ‘鄭道傳·權近論’)
정도전에 대한 비난은 조선의 끝자락까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도전의 꿈은 해동에 유교적 이상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새 나라의 이름인 ‘조선’도 단군조선이나 위만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공자가 ‘나는 동주(東周)를 만들겠다’고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삼봉집] ‘國號’)
조선을 공자가 꿈꾼 ‘동주’로 만들고자 했던 정도전은 왜 조선인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것일까.
정도전은 13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경기도 양주에서 유년을 보내고 개경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이고 어머니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이다.
정운경의 입신 과정은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李), 이색의 아버지 이곡을 닮았다.
모두 지방의 이름 없는 호장 가문 출신이다.
학문에 매진한 정운경은 과거에 합격해 입신하고 가문을 일으켰다.
정운경의 증조부 정공미(鄭公美)는 호장이다.
조부는 비서랑 동정(同正) 정영찬, 아버지는 검교(檢校) 군기감 정균이다.
동정이나 검교는 모두 직임이 없는 허직이다.
이를 보면 정운경 가문은 지방 호장 출신에서 착실하게 성장하여 조부대에 중앙에 진출하고,
정운경 대에 완전히 지배 관인계층으로 올라선 것이다.
정운경은 7년이나 위인 이곡(1298~1351)과 절친한 망년지우가 되었다.
후에 정도전이 이색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으니 두 가문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
1330년(충숙왕 17년) 과거에 합격한 정운경은 정3품 형부상서(1359년),
정3품 검교밀직제학(1363년)에까지 올랐다.
정운경은 법관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해 명판결로 세상에 이름을 얻었다.
또한 권세가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법을 집행했다.
이를 높이 평가한 공민왕은 그를 내전에 불러들여 술을 하사했다.([정운경전])
정도전의 초년은 순조로웠다. 그는 소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젊어서부터 과거 공부에 열중한 그는 1360년 성균시에 급제하고 21세인 1362년 과거에 급제했다.
1366년 1월과 12월에 부친상, 모친상을 당해 시묘(侍墓)하며 3년 상을 마치고
29세인 1370년 성균관 박사로 복관했다.
당시 성균관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열기로 뜨거운 용광로 같았다.
1367년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이 되자 “학칙을 개정해 매일 명륜당에서 경전별로 수업하고,
강의가 끝난 뒤에는 토론을 벌여 지루한 것을 몰랐다.
이에 배우려는 생도들이 운집해 서로 감화를 받으니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했다.”([李穡傳])
얼마 후 정도전도 그 흐름의 일원이 되었고, 그것이 그의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
정도전이 성리학을 처음 접한 것은 과거 공부를 하던 16~17세쯤이었다.
시작(詩作)에 몰두하던 어느 날 민자복이 “정몽주 선생을 만났더니 하는 말이
‘사장(詞章)은 말예(末藝)에 불과하고 이른바 수기(修己)·정심(正心)의 학문이 있는데,
그 설이 [대학]과 [중용] 두 책에 갖추어져 있다’하고 지금 이존오(1341~1371)와 같이
이 두 책을 가지고 삼각산 절에 가서 강구하고 있는데 그대는 이 사실을 아는가?”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두 책을 구해서 읽는데 비록 얻은 것은 없으나 자못 스스로 기뻐하였다”고 했다.
당장 알 수는 없으나 영혼을 울린 것이다.
정도전이 성균관 시에 합격한 1360년 정몽주도 장원급제했다.
정몽주를 만난 후 그는 “드디어 가르침을 주어서 날마다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1366년부터 3년 상을 치를 때 정몽주가 [맹자]를 보내주어
정도전은 매일 한 장 내지 반 장씩 읽으며 깊이 탐구했다.
공민왕 암살과 정도전의 위기
정도전이 “상기를 끝마치고 송경에 돌아오니 목은 선생이 재상으로 성균관을 영도하여
성명(性命)의 학을 제창하고 부화(浮華)한 풍습을 배척했다.”([圃隱奉使藁序])
‘부화한 풍습’(浮華之習)이란 문장을 중시하는 사장유학이다.
‘성명의 학’(性命之說)이란 천성과 천명을 논하는 성리학이다.
하늘과 인간에 대한 종합적 설명이다.
이는 성리학에 의해 유학이 일원적 형이상학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성리학의 설명은 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종교에 가깝다.
성리학에 이르러 이단논쟁이 본격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안향이 뿌린 씨앗은 이색에 이르러 개화했다.
그 속에서 13세기 말과 14세기 중엽 한국의 정치와 학문, 지성을 이끌어간 거인들이 탄생했다.
정도전이 말하는 계보를 보자.
“우리나라는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대대로 중국 풍속을 사모하여 문학하는 선비가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고구려에는 을지문덕이 있었고 신라에는 최치원이 있었다.
본조에 들어와 시중 김부식, 학사 이규보가 우뚝한 존재다.
근세에 이제현 같은 대유(大儒)가 나서 비로소 고문(古文)의 학을 제창하였고,
이곡과 이인복이 따라서 화작(和作)하였다.
지금 이색 선생이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고 북으로 중원에 유학하여
연원이 올바른 사우(師友)를 얻어 도덕과 성명의 학설을 궁구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제생을 맞이하여 가르쳤다.
그래서 보고 흥기한 자는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권근, 윤소종이 있고
비록 나같이 불초한 자도 역시 이 열에 끼게 되었다.”
공민왕대까지 정도전의 삶은 평탄했다.
1374년 공민왕이 갑자기 암살되면서 고려는 물론 정도전의 삶에도 큰 위기가 시작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은 공민왕의 암살에 대한 명의 문책이 두려웠다.
이 때문에 그는 공민왕의 대외정책을 바꿔 친명에서 친원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명과의 전쟁을 의미했다. 개인의 안위를 위해 국가 전체가 볼모로 잡힌 것이다.
박상충은 “한두 사람의 신하가 마음에 불충을 품고 나라를 팔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 죄악으로 나라에 화를 전가해 반드시 종사가 멸망하고
생민이 타서 죽은 뒤에 그만두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고 개탄했다.
신진 성리학자들이 반대의 선봉에 섰다.
고려 말 정신운동을 통해 결집한 성리학자들이 역사와 정치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얼마 후 원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을 때 정도전은 자신이 사신을 죽이든지 명에 압송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결국 유배됐다. 박상충, 전녹생이 죽임을 당하고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염흥방, 이첨, 전백영 등도 유배됐다.
하지만 10년이나 복직되지 않은 사람은 정도전뿐이었다.
이 정쟁은 공민왕대 이후 성장해온 역사적 대안의 첫 번째 개화였다.
신진 성리학자들은 이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정치적으로 미약했으며 충분히 성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첫 정치적 데뷔는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죽음과 유배를 통해 이들의 이념은 실존적 질문에 직면했다.
이 엄혹하고 부정의한 세계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은 진실로 옳은가?
성리학의 이념은 그 자신의 생애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던 사람은 염흥방처럼 삶의 방향을 바꾸어 이인임의 협력자가 됐다.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극한까지 갔던 정도전은 정신분열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이념의 창시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혁명적 성리학이 탄생했다.
모든 현실적 대안이 봉쇄됐을 때 정도전은 자신의 고귀한 이념이
자신의 생을 부양하고 위로해 주었던 부곡의 천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통렬하게 자문했다.
이러한 질문과 부끄러움 속에서 혁명적 자각이 배태됐다.
그는 이 이념이 단지 ‘존재’하는 진리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창조되고 실현되는 진리라는 점을 자각했다.
고려 말의 성리학이 깊은 시련 속에서 진정으로 고려 안에서 재탄생된 시기였던 것이다.
이로써 성리학은 한반도인의 피와 살 속에 뿌리내렸다.
정도전은 회진현(지금의 전남 나주) 소재동의 거평부곡에 유배됐다.
유배 직후 그는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을 근심하리오”([家難]) “나는 의를 행할 뿐”([哭潘南先生文])이라며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첫 한가위를 맞으며 추연한 기분에 젖었다.
“지난해 한가위 달 구경할 때/ 가무에 우스갯소리 하며 잔치 벌였네/ 금년에 멀리 회진현에 귀양 오니/
대 울타리 띳집 황산의 앞이로세/ 금년의 밝은 달도 지난해 그 달일세/ 명년에 보는 달 또 어느 곳일지/
밝은 달 말 없는데 밤은 반이 지나려 하네/ 홀로 서서 아득히 슬픈 시 노래하네.”([삼봉집] ‘中秋歌’)
질서정연한 이성계 군대에 감탄하다
오랜 유배와 유랑생활 속에서 그는 철저한 시련과 고독을 맛보았다.
‘가난(家難)’이라는 글은 그의 경제적 곤궁과 정신적 고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죄를 지어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간 뒤부터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구설이 터무니없이 퍼져서 화가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아내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책을 읽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지 않아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라 하였다.
나는 답장을 아래와 같이 쓰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각자의 직분을 다할 뿐이며
성패와 이둔(利鈍),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무엇을 근심하겠소’라고 하였다.”([家難])
정도전의 아내는 굴원과 사마천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김득배의 죽음에 직면해 정몽주가 하늘을 향해 절규했던 문제,
천도(天道)와 역사의 괴리에 관한 것이다.
[심문천답(心問天答)](1374년)은 이에 대한 정도전의 솔직한 의문이다.
마음이 하늘에 물었다. “하늘의 보응에 이르러서는 일이 거꾸로 된 것이 많았다.
하늘을 배반한 자는 장수하고 순종한 자는 요절하며 좇는 자는 빈궁하고 거역하는 자는 부귀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신이 하는 일을 그릇되게 여겨 신의 명령을 좇지 않고 오직 적(賊)을 따를 뿐이다.”
이래도 “아침에 인의로 살면 저녁에 죽어도 다시 구할 것이 없는가?”
그런 질문은 박상충의 제문(1374년)에서도 반복된다. 박상충은 그토록 옳게 살았지만 장살됐다.
그래서 세인들은 “선생의 운명이 사납고 시대가 어려웠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의심이 모두 그르며 또 선생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가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은 때이고 사생 화복은 자기에 있는 것이 아니거늘
선생이 이런 것을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의를 행할 뿐”이라고 했다.([哭潘南先生文])
신에게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 부조리하다.
순교자만이 이런 현실과 무관하게 정신을 지킬 수 있다.
보통 인간은 재산과 명예, 지위 위에서만 정신적일 수 있다. 현실 속의 정신은 거주처가 필요하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모든 것을 잃었다. 정신의 실천은 비로소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대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굴원(屈原)은 자살했다.
“옛 세상에서도 다 그랬던 것을/ 지금 사람들을 내가 왜 원망하리/ 이대로 나는 굳이 바른 길 행하다가/
햇빛을 못 본 채 이 몸을 마치리.” ([楚辭]) 도연명은 은거하며 달관했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장차 거칠어져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체에 부림받게 하였으나 어찌 근심하며 홀로 슬퍼만 하겠는가.”([歸去來辭])
사마천은 슬퍼했지만 인내했다.
“혹자는 말한다. ‘천도(天道)는 특별히 친한 자가 없으며 항상 선인과 함께한다’고.
백이·숙제 같은 사람은 정말 선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인(仁)을 쌓고 깨끗한 행동을 하였는데 굶어 죽고 말다니!
도척은 매일같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고기를 먹었지만 결국 천수를 다하였다.
나는 심히 당혹함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史記],
‘伯夷列傳’) 유기(劉基, 1311~1375)는 혁명을 택했다.
“천지의 도를 성취하여 천지의 마땅함을 도움으로써 천지의 만물을 화육한다면
만물로부터 빼앗아 스스로 쓰더라도 또한 잘못이 아니다.”([誠意伯文集] ‘天道’)
그는 원나라 말 과거에 급제했지만 주원장을 도와 명을 건국했다.
정도전은 10년간 절망하고 방황했다.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복직되지 못했다.
“물은 흘러도 종당 바다로 가고/ 구름은 떠도 항상 산에 있다오/ 이 사람은 홀로 시들어 가며/
나그네로 한 해 한 해 보내고 있네/ 옛 동산 아득해 얼마나 멀까/ 가는 길은 깊은 못에 막혀 버렸네/
생각은 있어도 가지 못하고/ 푸른 바다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네.”([奉次東亭詩韻])
‘백성의 발견’으로 배반과 패륜을 극복하다
우왕 9년(1383년) 가을 42세의 정도전은
동북면도지휘사로 함주(咸州) 군영에 있던 49세의 이성계를 찾아갔다.
10여 년에 걸쳐 철저한 시련과 고독을 맛보고 고난에 빠진 민생을 몸소 체험한 뒤였다.
이듬해 봄, 정도전은 다시 함주를 찾았다.
이성계의 군대가 호령이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정연한 것을 본 정도전은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군영 앞에 노송 한 그루가 있으니
소나무 위에다 시를 한 수 남기겠습니다”며 감탄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구나.”
(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好在他年相見否 人間俯仰便陳縱)([題咸營松樹])
이성계의 호는 송헌(松軒)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소나무에 빗대 변방 출신의 이성계가
매우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앞날을 기대했던 것이다.
지난 10년을 회고하면서 정도전은
“고금을 통론해도 백 살을 넘긴 사람 없네/ 득실을 가지고서 정신을 허비마소/
다만 썩지 않는 사문(斯文, 유학)이 있다면/
후일에도 당연히 정씨 같은 사람 나올 걸세”(‘自詠’)라고 자위했다.
이성계를 만난 뒤 정도전은 “무릇 임금(이성계)을 도울 만한 것을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다”고 한다.([태조실록], ‘정도전 卒記’)
정도전의 이 급진적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유배기에 정도전은 크게 세 가지 점을 새롭게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하늘·출신·백성이다.
첫째, 천명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실천을 통해 천명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세계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심문천답]에 시사돼 있다.
둘째, 자신의 출신에서 실존적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의 외조모는 노비의 딸이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과거 합격 뒤 한동안 임명장을 받지 못했다.
우왕 원년에 유배된 다른 벗들과 달리 정도전은 10여 년 동안 복직되지 않았다.
벗들도 모두 떠났다. 공양왕대에 정몽주가 김진양을 시켜 올린 탄핵 상소를 보면
“정도전은 천인의 소생으로 높은 벼슬자리를 도적하게 되자
그 미천한 근본을 엄폐하기 위하여 본래의 상전을 제거할 것을 꾀했는데, 혼
자서 거사할 길이 없으므로 남의 허물을 주어 모아 죄명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수다한 사람을 연좌시켰다”고 비판했다.([金震陽傳]) 그는 그 원한을 잊지 않았다.
“정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자 반드시 우현보 한 집안을 모함하고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해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다.”([태조실록],
‘정도전 卒記’) 정도전이 품은 분노는 이처럼 격렬한 것이었다.
고려 왕조에서는 그에게 희망이 없었다.
그리하여 혁명을 꿈꾸는 대항 엘리트로 변신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정도전의 성리학은 파탄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스승 이색의 처형을 주장했고, 그 아들과 절친한 벗인 이숭인을 죽였다.
스승처럼 존경하고 그를 구원한 정몽주와도 적이 됐다.
마침내는 왕조를 배반했다. 그는 임금과 스승과 친구를 버렸다.
따라서 성리학이 아니라 일반적인 윤리 감각에서 본다고 해도
그의 성리학은 ‘파탄’을 넘어 ‘패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성리학의 최종 결론도 그러했다.
주공 같은 성인을 꿈꾼 진지한 성리학자가 어떻게 이처럼 야수같이 변모했는가.
이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백성의 발견’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유배기의 정도전에게 일어난 세 번째 자각으로
패륜조차 감행했던 정도전의 내적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 말의 성리학, 아니 성리학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혁명의 이념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진정한 요인으로도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위민의 정치를 고창했고 고려 말의 신진 성리학자들
역시 강렬한 구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이념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구원의 대상’일 뿐 아니라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백성의 옆이나 안이 아니라 백성의 위에 있었다. 정도전 역시 그러했다.
그는 “대개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만 알았지 도(道)의 사정(邪正)은 모른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니,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공자의 백성관을 따랐다.([上鄭達可書])
그가 진정으로 백성에게 친구 같은 애정을 느낀 것은 곤궁하고 외로운 유배지 생활을 통해서였다.
10여 호의 천민 집단이 사는 부곡 마을에서 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첫째는 이 천민들이 상당히 유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성길이란 자는 글자를 약간 알았고, 그 아우 김천은 담소를 잘했으며,
서안길은 사투리·속담·여항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기의 글에는 유난히 촌부·야인·전부(田父)가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시골의 이름은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들로, 정도전의 처세에 충고하고 있다.
[금남야인(錦南野人)]은 그 전형적인 글 중의 하나다.
야인의 말에 따르면 이른바 유학자라는 사람들은 그 방대한 지식과 고매한 윤리에도
실제 세상의 지혜에는 무지하며 오만한 사람들이었다.
둘째, 부곡민들은 훌륭한 성품이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았고,
형제가 한집에 살기도 하고 모두 술을 잘 마시며 담소하는 것을 즐겼다.
셋째, 이들은 정도전을 성심으로 위로해줬다.
정도전이 머물던 집 주인인 황연은 술을 잘 빚고 술을 즐겼으며
술이 익으면 반드시 정도전을 먼저 불러서 함께 마셨다.
“마을 사람도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고, 철마다 토산물을 얻게 되면
반드시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 한껏 즐기고서 돌아갔다”고 한다.
정도전은 마음 깊이 감동했다.
여기에서 정도전의 의식 전환이 일어났다.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귀양살이로 멀리 와 있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렇듯 두텁게 대접하니 어쩌면 그 궁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거두어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시골에서 생장하여 당시의 의논을 듣지 못해
내가 죄인인 줄 몰라서인가? 아무튼 모두 후대가 지극했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되므로 그 시 말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消災洞記])
조선에서 버림받은 정도전의 비극적 운명
정도전은 더 이상 나주 동루에서 훈시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천민들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하고 또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감사와 부끄러움이야말로 정도전이 새롭게 체험한 백성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이색의 문하에서 형성된
그의 학문적·정치적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의 책임을 져야 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의복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관습적인 정치의식에 대한 반론이었다.
왕과 지배 엘리트들이 백성에게 무슨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정치와 정치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의문이었다.
정도전은 군주도 백성으로 인해 존재하며,
따라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그래서 [주례(周禮)]에서는 백성의 호적을 군주에게 바칠 때
군주는 절을 하면서 받았으니 이것은 자기의 하늘을 중히 여기는 까닭이다.
인군된 사람이 이러한 뜻을 안다면 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불 지극해야 할 것이다.”
([朝鮮經國典] 上, ‘賦典-版籍’)
1392년 7월 28일 반포된 이성계의 즉위교서는 이렇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이는 정도전 작이다. 그 요지는 왕은 백성의 상생과 상안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천명이 떠나는 것이 떳떳한 이치(常理)다.
역성 혁명론이다. 요약하면 책임 정부론(accountable government)이다.
조선 건국의 제1 가치는 ‘위민(爲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 건국은 ‘유교적 근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정몽주가 조선의 영원한 정신적 이상으로 문묘에 종사된 것과 대비된다.
[심문천답]에서 정도전이 하늘에 물었던 의문, 천도와 역사의 괴리는 여기서 반복되고 있다.
정치는 윤리의 전당에서 서식처가 좁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제나 정치가 버림받는 이유다.
하지만 정치 없이 윤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식은 어느 정도 기만적이다.
정몽주가 죽었을 때 정도전의 역사적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정도전도 그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죽을 자리를 얻지 못했음을 애석해했다.
“일이 크고 원망이 깊은 것은 비록 신이 아는 바가 아니지만,
신이 어찌 스스로 면하겠습니까? 호사(胡使, 원 사신)를 물리칠 때 죽었으면
신의 몸이 비록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니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鄭道傳傳])
첫댓글 육룡이 나르샤 중 정도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요 ᆢ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