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마흔 넷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 집은 아버지 유산으로 자식들이 한 재산 챙기기도 한다지만 아버지는 빚만 잔뜩 남기고 갔다.
덕분에 어머니와 장남인 큰형은 오랜 기간 그 빚을 감당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당시 상속포기니 한정상속이니 그런 제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있었다 해도 농투성이가 알았겠는가.
큰형은 어릴 적 비교적 풍족하게 자랐다고 한다. 마을 부잣집 중 손가락에 들었고 할머니가 장손이라며 발에 흙을 묻히지 않을 만큼 귀하게 키웠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차례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변했다.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무책임한 가장도 아니었는데 술과 노름과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한 후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기에 이른다.
언젠가 큰형이 자기 머리칼을 젖히더니 정수리를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 초승달처럼 생긴 흉터는 아버지가 밥상에서 숟가락으로 냅다 형의 머리를 내리치는 바람에 찢어진 상처라고 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면서 훗날 당신 무덤에 풀 뜯어줄 장남한테 왜 이러냐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큰형을 미워했다고 한다.
유독 큰형을 미워하고 가족에 무관심했어도 밖에서는 천하에 사람 좋은 호인이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도 아는 사람 지나가면 불러서 술 사주고 갖은 인심을 팍팍 쓰니 호인 소릴 들었겠지.
농사도 나몰라라, 태풍에 벼가 완전히 쓰러져서 어머니는 일꾼들 사서 허리가 부러져라 일을 하는데도 당신은 술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오더라나,,
어머니도 큰형도 아버지 험담을 하지 않기에 이런 얘기는 큰 누이와 고모에게서 들은 것이다.
큰형이 국민학교 졸업하자 자기 밥은 자기가 벌어먹어야 한다면서 장남을 쫓아냈다. 정수리 흉터가 그 무렵 생겼을 것이다.
누구 아버지는 소를 팔아서 장남 학교를 보냈다는데 아버지는 거꾸로다. 어린 것이 어디서 밥벌이를 할 것인가. 쫓겨난 형은 아버지 없을 때면 어머니가 부엌에다 몰래 차려놓은 밥을 먹곤 했단다.
부엌에서 밥을 먹다 아버지에게 들켜 혼비백산 도망친 적도 여러 번, 형은 어머니가 그때 아버지를 붙들지 않았다면 다리 부러졌을 거라고 했다.
이후 형은 이웃 면소재지 이발관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 국졸이든 대졸이든 사람 인생은 첫 직업이 많은 것을 가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어머니는 나를 낳고 며칠 안 된 몸으로 30리 길을 걸어 큰형이 일하는 이발관으로 갔다. 그때 형의 나이 열일곱, 나와 큰형은 나이차가 16세다.
월급은 없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 가르쳐주는 것도 감지덕지다. 아무래도, 느그 아부지 오늘 못 넘길 것 같다는 어머니 말에 큰형이 그랬단다. 엄니, 나 그런 아부지 둔 적 없어요.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누이를 보내 같은 마을에 사는 작은 아버지에게 여러 번 알렸지만 숙부 또한 자기는 형이 없는 사람이라며 꼼짝을 안 한다.
참다 못한 작은 엄마가 아무리 미워도 형은 형인데 임종은 봐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해서 작은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신기하게도 새벽부터 종일 곧 끊어질 듯 가쁜 숨을 내쉬던 아버지가 당신 동생이 방문을 열고 막 들어서자 바로 숨을 놓더란다.
아버지 제삿날에 형은 가끔 왔다. 절은 하지 않는다. 우리집 내력인지는 몰라도 제사는 물론 명절에도 절은 하지 않고 음식상만 차려 놨다가 음복을 했다.
하나 있는 형과 의절하고 살았던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 제사에 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보통 사촌형이 왔다. 그도 나보다 세 살 위이니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당신의 제삿날은 아무도 좋은 추억담을 말하지 않고 온 가족이 가슴에 쌓인 상처를 꼭꼭 누르는 밤이다. 대부분의 제삿날이 추모(追慕)이건만 追慕가 아닌 醜慕가 되는 기념일을 당신은 알까.
내 아버지 초상 치를 때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랬단다. 이 사람 일찍 갔어도 하고 싶은 것은 원없이 하고 죽었으니 후회는 없을 거라고,,
덕분에 남은 가족만 직싸하게 고생을 하고 그 가난의 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고통을 받는다. 큰형이 이발사를 언제까지 했는지는 잘 모른다. 서른 중반쯤 그만 둔 것으로 기억한다.
큰형은 평생 자기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살던 집은 오두막이라 큰형 식구까지 함께 살기엔 비좁아서 마을에 빈집을 얻어 살았다. 집세를 내고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때론 마을 회관에 딸린 집에서도 살았다. 어쩌면 재산만 있으면 몰려들 빚쟁이가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나는 큰조카에게 모은 돈이 있으면 얼마쯤 대출에다 부족한 부분은 내 형제들 몇이서 십시일반 보태겠다며 집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최대한 저렴하게 지었지만 형제들이 돈을 보태서 집을 짓는 줄 뻔히 알면서도 큰형은 집이 완성되기도 전에 집들이 때 사줘야 할 목록을 정해서 형제들에게 알렸다.
누구는 세탁기, 누구는 TV,, 나는 목록에서 제일 비싼 냉장고를 사줬다. 우리집 냉장고는 소음으로 덜덜거리는데도,,
누이는 참 염치 없는 오빠라고 흉을 봤고 나 또한 큰형에 대한 정이 많지 않지만 핏줄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했지만 때론 피가 물보다 징하기도 하다. 큰형은 새 집을 지어 이사하고 1년 반쯤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때 형의 나이 쉰 아홉이었다.
큰형 죽기 3년 전인가? 어머니는 장애인이었던 둘째 형이 평생 어머니 속을 태우다가 마흔 일곱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한동안 산송장처럼 지냈다.
에미 잡아 먹을 웬수라며 그렇게 구박했던 아들이 막상 죽자 어머니는 불쌍한 내 새끼 잘해주지 못한 게 한이라며 가슴을 쳤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조금 회복했는데 큰아들까지 먼저 보내고 어머니 심정은 어땠을까. 이후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죄 많은 년이여를 중얼거리곤 했다.
훗날 큰조카가 말해 주기를 어머니는 큰형 무덤 앞에 앉아서 바닥을 치며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돌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큰형 장례 치르고 나서 나중 들으니 뒷말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수근대더란다. 새로 지은 집이 터가 안 좋아서 형이 돌연사로 일찍 죽었다고,,
내가 조카를 설득해서 집 짓기를 추진한 터라 안 그래도 마음이 무겁던 차에 그 소리 듣고 진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평생 안고 자기 집 없이 살다가 새집에서 1년 만에 세상을 뜬 큰형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징하다고,, 한때 나도 내 몸에 흐르는 아버지 피를 몽땅 뽑아서 내다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피는 물보다 징하다.
*누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몇 줄 쓰자 딱 막혀 진전이 없다. 해서 대신 큰형 이야기다.
첫댓글 지난 삶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써내려가기란
쉽질 않은데
구수한 실제적 정담이 가슴을 울린다고 하기엔
너무나 암울했던 집안 내력이로군요..ㅠ
오죽하면
피는 물보다 징하다!
했을까 마는도..
이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지난 일은 차라리
그리움으로 남아있기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ㅎ
잘 읽었습니다~^^
글 올려놓고 집근처 호프집에서 한 잔 하고 와서 님의 첫 댓글에 답을 합니다.
아마 10년 년쯤이었으면 이런 가족 얘기를 쓸 수 없었을 겁니다.
훌훌 털어버릴 자리를 만나서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도
과도기에 노출된 家族史
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신보다 진한 흔적 ^^*
호태님의 문신 같은 선언에 동의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저도 이럴진대
큰형의 마음은 어땠을지 아직도 그의 아픈 상처를
헤아릴 길이 없었던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현실적인 내용이기에 막힘없이 써내려갔을까요 가족관계 이야기는 가가호호 내용이 비슷한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슬프게 더 아프게 내재된 그무엇이 있다면 글쓴이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마냥 섞여서 동화 된다는것
물론 썰을 잘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요^^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단편소설 후딱 한 편 읽은 느낌 입니다
이제는 주인공 역활이 자연스레
행복 하시겠지요 해피엔딩 ^^
썰 푸는 건 서툴지만서도 글썰은 조금 풀 줄 압니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틈틈히 낙서처럼 저의 상처를
일기장에 적은 것들이 쌓인 결과로 보입니다.
죄수는 석방 날짜를 매일 벽에다 손톱으로 새겼다는데
저는 거꾸로 자란 종유석이 삶의 자산이 되었습니다.
제법 긴글인데도 단번에 읽었네요
저의 어릴적 사연과 비슷함도 있구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글 잘 읽고 갑니다.
비슷한 사연을 가졌다니 반갑습니다.
가능한 짧게 쓰려고 했으나 가지치기가 잘 되지 않네요..
님의 닉이 아주 향토적이서 정감이 갑니다.^^
장에 간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고향 신작로의 마루나무가 생각납니다.
마음 아픈 얘기들이 많으네요
지금까지ᆢ
견디어온 세월 이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할거 같읍니다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예전에는 아픔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단련이 되었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산사나이님의 응원까지 더해서 잘 살아보겠습니다.
님도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도 울 일이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이런 글을 쓸 때
잠시 울컥해서 안습으로 창밖을 오래 바라보기도 합니다.
때론 눈물이 마음을 씻어주기도 하지요.
현덕님 잘 읽었습니다 아무리 내 얘기지만 글을 아주 잘 쓰십니다
글은 먼저 나를 덜어 내어야 글이 트입니다
나를 덮어 놓고 는 다른 어떤 것도 글로 이어지지 않지요
나로 이어지는 글
유명한 화가는 자신의 얼굴부터 그립니다
나를 알고 나를 내려놓고 그렇게 쓰시다 보면
속시원한 글 쓰기가 되더군요 긴 글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운선님의 댓글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억지로 지어 짜면 소설이 되지만
나를 덜어 내면 저절로 술술 나오는 게 글이더군요.
앞으로도 님의 말씀처럼 더욱 나를 내려놓고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약간 알땰딸, 취중 댓글을 달고 있는데 님의 댓글로 정신이 번쩍 드네요.^^
고맙습니다.
읽는내내 마음이 찡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크신 장남인 아버님은 왜 자신의 장남을 그렇게도 미워했을까요?
그 삶속에 누이는 얼마나 힘들게 동생들과 엄마를 바라봐야 하셨을지
마음이 아려옵니다
긴글 잘 읽었어요
저도 이젤님처럼 내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답니다.
큰형도 왜 아버지가 그렇게 자리를 미워했는지를 말하지 않더군요.
점치기 좋아하는 작은 엄마 말씀으로는
당신을 완전 빼다박은 붕어빵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ㅎ
참 용기있는글입니다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그 가난과 주림덕분에 자식들을 씩씩하게 키워낸 우리세대입니다
많이 머물다가 갑니다
용기 있는 글이라는 말에 힘이 납니다.
이곳에 글을 쓸 때마다 몇 줄 썼다가 지울 때가 여러 번,
가난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제 운명의 근원지이기도 하니
그 운명을 내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사연을
담담하게 풀어내시는 유현덕님
솔직한 글에 마음이 찡 해졌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하도 질려서
어릴 때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니 집안 내력의 불온한 피를 알아버렸습니다.
취중 댓글이긴 하지만 진정성은 훨씬 있을 겁니다.^^
그때 그시절 모두가 힘들게 살았지요 ㆍ
토지의 저자 박 경리선생님도 일제시대 , 6.25 전쟁이 몸서리쳐서 다시 이세상에 태어나고 싶지않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ㆍ
맞습니다.
그 시절 겪은 가난이 비단 우리 가족뿐이었겠는지요.
저도 박경리 선생처럼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뿐아니라
행여 윤회가 있다해도 사람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네요.^^
피로 맺어진 천륜은
냉정하게 끊기가 쉽질 않지요.
동의합니다.
성전환수술을 해도 피는 못 바꾼다고 하더군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나네요
키가 백팔십이 넘어
그당시 무척 큰 키에
마르고 잘 생기셨죠
엄마는 작고 이쁘셨어요
아버진 키큰 사람치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사람만 좋고
귀가 얇아 사기도 많이
당하고 생활력도 없으셨죠
일만 저지르고 뒤
감당은 엄마랑 큰언니가
했어요
그러다 제가 큰딸
낳은지 8개월 될때
65세로 뇌암으로 병원 에서 석달 사신다 했는데 두달만에
돌아가셨어요
엄마하데 자상하시고 사이도 좋고 저희 6남매에게 다정한 아버지 였지만 무능함은 우리 6남매를 힘들게 하셨죠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제서야 엄마는 빛에 벗어나 버는 돈으로
손자 소녀들에게 옷도
사주고 돈에 여유가 생기셨어요
저 28에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젠 엄마가 숨을 좀
쉬시겠구나~~
아버지가 그나마 일찍 돌아가셨서 다행이다~~
순간 이런 생각을 했던것 같아요
가장의 무능함은 가족 모두가 힘들죠
만일 폭력에 도박이라면
가족모두가 불행이죠
그래도 다정한 분이라
가끔은 그리워요
엄마도 돌아가시고
이제는 고생한 큰언니를
부모다 생각하고 잘하려고 해요^^
댓글에서 님의 가족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다소 생활력은 없으셨어도 심성 착하고 잘 생긴 아버지를 두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모쪼록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아픈 가족사네요ㅠ.ㅠ
그시절에는 가장이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면
여자들이 먹고 살길은
참으로 험난한 시절이라
모두가 고생이었죠
어머님도 형님도 한많은 한세상을ㅠ.ㅠ
그런가요?
혼자 저지른 허물이나 잘못이 본인이 온전히 짊어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남은 가족이 두고두고 고통 받는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요.
형이나 어머니에 비하면 저는 행운아로 생각하고 삽니다.
집집 마다 사연이 다있죠. 옛날 어른들이 그러잔아요, 자기사연 책 한권이 될거라고 모진세상 .힘들게 살아 왔죠..
네, 그런 얘기 저도 들었습니다.
우리 집안 사정을 얼추 아는 제 친구도 늘 그런 얘기를 하지요.
니네 집보다는 못해도 자기집도 사연을 모으면 한 트럭은 된다고,,^^
길게 이어지면, 소설 ‘토지’보다 더 리얼하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요즘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고 아주머니들의 푸념 섞인 옛
이야기 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거의가 세끼 밥도 못 먹는
허기진 시절 얘기라서 금방 배부르게 먹은 마음이 짠합니다.
때로는 뜬금없이 우리 가족사도 흘러나와서 놀라기도 하지요.
등장 인물이 우리 가족 뿐이라서
토지보다는 스토리가 장엄하지 못하겠으나 리얼함 만큼은 토지 못지 않을 겁니다.
살다 보니 누군가의 얘기가 딱 내 얘기 같을 때가 있더군요.
누구든 자기집 사연이 제일 깊다고 생각해도 더한 집도 있는 걸 보면
제가 걸은 가난의 길을 이제는 억울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처럼 산에 안 간 토요일 아침이라 님께 넋두리를 늘어놨네요
이래서 사람은 너무 한가하면 안 된다는,,^^
아름 문힉 행사에
출품 하셔요~~
효주님의 조언은 감사하오나 문학상은 창작품이어야 하는데
제 글은 수기처럼 기록물이라서 규정미달이지요.
베드민턴장에 탁구채 들고 가면 감독님이 맴매,,^^
차분히 잘써내려가신 님의글에 마음이 참그러네요
피는 물보다 징하다
선택해서 태어나진거는 아니지만
무슨연유로 그아버지엄마 한테 태어나 그런일들을 보고 자라며 힘들었을까
또 생각하게되네요
가난은 누구도 도와주지않던 어린
그누구 에게나 참으로 힘든 그 시절들
그래도 모든게 다시 보고싶고 추억하며
나는 더힘든사람보다
그래도~~ 이러며
남은세월 살아갑시다
유현덕님
님의 잔잔한 댓글에서
내 몸의 아버지 피를 몽땅 뽑아버리고 싶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저야 기억이 없으니 그나마 덜 하지만
큰형은 평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슴에 담고 살았겠지요.
그런데도 큰형에게 아버지 험담을 거의 듣질 못했네요.
가슴에 너무 깊게 새겨져서 그랬을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