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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3일 목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 토빗 6,10-11; 7,1.9-17; 8,4-9ㄱ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공무원 시험 대비학원의 한 강사가 합격생과 비합격생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다가 힘들고 우울할 때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합격생은 ‘울면서 공부한다.’라고 하고, 비합격생은 ‘그냥 운다’라고 합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딱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들다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다가는 단 한 번도 일어설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울면서도 공부했던 합격생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울면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613개의 유대교 율법 조항들을 단 하나로, 즉 ‘사랑’ 하나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 따로, 행동 따로의 모습을 통해서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사랑할 수 없는 각종 이유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모든 말씀에 동의하는 율법학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
- 하느님 중심의 삶 -
이수철 프라니스코 신부
수도원에 30년 이상 정주하다보니 세상의 변화가 한눈에 보입니다.
얼마나 변화무쌍한 세상인지 체감합니다.
앞에는 넓은 들판에 마을이 펼쳐진 동네들이였는데
별내 신도시가 들어섰고 곳곳에 즐비한 고층 아파트들입니다.
참 편리하고 빨라진 세상인데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바빠지고 여유도 없어 보입니다.
행복해보이지도 않고 왠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에 그늘져 있습니다.
‘그늘’하니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는 글귀도 생각납니다.
“올 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여름의 할 일)”
제 경우도 2000년 전과 후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2000년전에는 강론도 친필이었고 받은 편지도 모두 친필이었습니다.
노트북도 핸드폰도 이메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생각되지 않았고 찾아오는 분들도 많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참 역설적으로 신속하고 편리해진 세상이라면 여유와 평화도 많이 누려야 할 텐데
갈수록 바빠지고 여유없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웃음보다는 긴장한 얼굴이 대부분입니다.
수도원 피정을 다녀간 어느 자매의 진솔한 친필 편지에 감동했습니다.
-늘 따뜻했습니다. 늘 환대해주었습니다.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늘 든든했습니다.
요셉 수도원 덕분에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섰습니다.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않으시고 꺾어진 갈대를 베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 나침판도 없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만났습니다.
구세주가 따로 있나요?!
예수님이 따로 있나요?!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덕분에 용기도 생겼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생각만해도 든든한 요셉수도원입니다.
‘배밭’ ‘불암산’ ‘요셉’ ‘남양주’ 이름만 들어도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슴 깊이 고마움만 가득 담아 갑니다. 모두 모두 건강히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당신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2021.5.31.
감사와 사랑의 진솔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내용이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 중 수도원을 만나 살아난 분의 고백입니다.
읽는 순간 ‘경천애인의 수도공동체!’였습니다.
세상의 오아시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개인의 증거보다 공동체의 증거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그리스도의 평화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그리스도의 쉼터에서 쉬고, 그리스도의 배움터에서 배우고,
그리스도의 샘터에서 샘물을 마시고자 옵니다. 이 모두는 수도원의 존재이유를 보여줍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경천애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선입니다.
참으로 경천애인의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갈수록 건강하고 견고한 삶입니다.
대부분의 혼란과 방황, 표류는 중심을, 하느님 중심을 잃어 자초한 경우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 삶의 중심을 확실히 잡아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 물었는데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으로 답해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또 우리 믿음의 수도공동체가 그대로 ‘이스라엘’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경천애인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분명한 우선순위가 하느님 사랑에 이어 이웃사랑입니다.
구별할 수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이 환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감복한 율법학자도 즉시 공감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경천애인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말해줍니다.
613개 율법조항들이 이 가장 큰 계명 하나로 요약됩니다.
말 그대로 우리 삶의 중심이, 의미가, 목표가, 방향이 되는 말씀입니다.
참 사람이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사는 길도 가장 큰 계명의 실천뿐입니다.
마음과 몸은,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참으로 경천애인의 가장 큰 계명의 실천이 깊어질수록 확보되는 심신의 건강, 영육의 건강입니다.
경천애인의 사랑이야 말로 우리 삶의 건강에 최고의 식食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경외의 사랑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오늘 화답송 후렴도 참 행복은 하느님 경외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갈림 없는 온 마음, 온 생각, 온 정신, 온 힘을 다해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 일, 공부 등
우리의 모든 수행에 목숨을 걸고 매진邁進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림 없는 사랑의 수행이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이웃을 위한 섬김의 사랑에 올인하게 합니다.
결국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섬김의 이웃 사랑의 열매로 검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참으로 경천애인,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오늘 바로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주님을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너무 자명한 삶의 진리, 사랑의 진리에
어느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였다 하니 너무 당연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어제 주인공 토빗과 오늘 주인공인 그의 아들 토비야가 경천애인의 모범입니다.
말그대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자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없는 어제 토빗의 유언중 계속되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언제나 주 너의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고 너의 길을 올바르게 해 주십사고,
너의 길과 너의 뜻이 성공을 거두게 해주십사고 그분께 간청하여라.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얘야, 이 분부를 늘 기억하고 네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하여라.”(토빗4,19)
“얘야, 우리가 가난하게 되었다고 해서 두려운 생각을 품지 마라.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모든 죄악을 피하며
주 너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면, 큰 재산을 얻을 것이다.”(토빗4,21)
오늘 제1독서 말미에서 토비야와 사라의 신혼부부가 잠자리에 들기 전
토비야의 기도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사랑이 우선입니다.
하느님 경외의 사랑과 사라를 통한 이웃 사랑의 일치가 참 절묘합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마지막 구절의 기도 분위기도 참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아멘. 아멘”하고 함께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토빗8,9ㄱ).
마침 교황님의 6월의 기도지향이 ‘결혼의 아름다움’이며 그 전문을 인용합니다.
공동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기도지향입니다.
-“특히 이 힘든 시기에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는데 진실입니까?
결혼하여 함께 삶을 나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렵고 복잡한 시대 결혼 여정은 쉽지 않을 수 있으나 노력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긴 삶의 여정 중에 남편과 아내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동반해 주십니다.
결혼은 사회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태어난 성소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준비를 요하는 각자 남은 삶에 대한 의식적 결정입니다.
결코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꿈을 즉 사랑의 꿈을 꾸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 꿈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원을 바라며 결혼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사랑 안에서 너그럽게, 충실하게, 인내로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보다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불어together’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이 경청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더불어 부부 여정의 삶 또한 경천애인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순교자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아프리카 순교성인들의 순교상황을 대하면서 순교의 죽음은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이자 경천애인 사랑의 절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온마음과 온정신,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
불의한 권력에 희생된 19세기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성인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경천애인의 사랑을 통해 날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관점”과 그에 따른 “변화”가 요구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이라고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곧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 한 자매”라는 관점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에페 1,10;1고린 1,30)일 뿐, “남”이란 애시 당초 없다는 뜻입니다.
‘한 몸’의 지체로 자신들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또한 “이웃 사랑”은 어떤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표현을 빌리면(새천년기 24항),
“이웃”은 나의 일부요, “나”는 “이웃”의 일부가 됩니다.
따라서 이웃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이 되고,
이웃에게 주어진 선물이 자신을 위한 선물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결국, 이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자기”를 살아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내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이웃이 아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이웃을 하느님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토록,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탄생, 새로운 자기”에로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바로 이 사랑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2021년 올해에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두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태어난 아시아 출신의 감독입니다.
아시아인의 정서와 감정이 유럽과 미국의 영화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가 주는 주된 시대정신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온 도시와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나의 능력과 업적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에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봄에 피는 꽃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낯선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웃에게서 믿음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에는 하루하루 삶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늘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가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이 사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의 ‘문명의 역습’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은 너무나 큰 희생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 같습니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버려지는 쓰레기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과연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공지능, 자율 주행 자동차가 우리를 편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행복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인 손실을 이야기합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백신과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곧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어쩌면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면서 우리는 어쩌면 지나치게 타인에 대해서
비난과 비평을 일삼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어쩌면 우리는 말 못하는 생명을 괴롭히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들 착취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수시로 체온을 재면서 나의 사랑의 온도, 나눔의 온도, 희생의 온도는
너무나 식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안전을 위해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으면서
과연 내가 거처할 하느님 나라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자연을 희생하면서 세우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없는 연민과 사랑입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입니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합니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최우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들려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모든 계명 중 첫 째 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첫째는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만연한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삶의 최우선으로 삼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정 제도나 신분에 속하지 않은 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칫 이상주의자나 현실 부적응자, 광신자로 치부될 위험까지도 있지요.
세상은 자기들이 자행하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 양심을 압박하는 하느님과 그분 자녀들이,
세상 한구석에서 그저 조용히 자기들끼리 특정 양식을 공유하며
신앙생활을 문화 양식의 일환 정도로 꾸려나가길 원합니다.
세상이 하느님 대신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재물과 명예, 권력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한갓 우상일 뿐이니 불편하기 그지없겠지요.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하느님 사랑에 이어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이웃 사랑입니다.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타자에게 열려 있는 연민과 헌신의 마음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또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이미 자신과 타인이 별개가 아닌 까닭입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힘이 들게 됩니다.
반면 세상이 첫째로 추구하는 우상에 매이게 되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재물 앞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최대로 추구하는 이윤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체제 안에서
누군가를 도구화하고 착취한 결과물일 때가 많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산업재해들이 그 단적인 증거지요.
권력이 최우선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힘의 원리에 편승하게 되면 사람은 자꾸 뒤로 밀리게 마련입니다.
또 평소 별 볼일 없(어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는 가난한 이들의 지지를 실탄 삼아
누리는 영광은 사람을 그저 이용할 뿐이지요.
우상이 첫째인 사람에게 이웃 사랑은 더 많은 걸 얻기 위한 보여주기 이벤트일 뿐이지요.
제1독서 대목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낳은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토빗 6,9)
토비야는 일곱 명의 신랑이 혼인 신방에서 죽어 나간 사라의 일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그녀와 혼인하기 두려웠지만, 라파엘의 권고의 말을 듣고
"그 여자를 매우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게"(토빗 6,18) 됩니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토빗 8,4)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결심한 토비야는 장인이 될 라구엘의 만류에도 혼인을 결행하고
사라와 함께 이처럼 기도로써 부부의 삶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특별한 인연으로 서로 엮이는 순간,
인간적인 관심이나 욕정을 뒤로 하고,
모든 생명과 관계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앞에 먼저 무릎을 끓는 모습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토빗 8,7)
토비야의 기도는 자신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여 선택하고 실행했음을
그분께 엄숙히 고백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첫째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사라를 향한 연민과 헌신의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이 사랑은 서로에 대한 구원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과의 사랑이 깊어지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더욱 친밀해지지요.
그러면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사랑이 사랑을 더 두텁고 진실되게 합니다.
이제는 억지로 힘 들이지 않아도 사랑이 알아서 사랑을 낳고 키우는 경지가 될 것이고,
그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데려갈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길에 동반자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지치지 말고, 그치지 말고 사랑의 길을 걸어 사랑을 완성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한계와 같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에게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누군가를 최대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사랑이 아주 출중하지 못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나의 사랑은 그 상대의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을 길러준 늑대 부모를 완전히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늑대 부모의 사랑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가 사랑을 더 증가시키고 싶었다면
늑대가 아니라 인간 부모를 찾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또 똑같은 예화를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다른 예화를 찾을 수 없어 반복합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후 토마스는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많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모를 사랑해 봐야 그 수준밖에 안 됩니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역시 올바른 예화는 아니지만, 영화 ‘에비타’의 후안 페론의 삶을 보고 싶습니다.
‘에바 페론’, 에비타는 본래 작은 시골의 연극배우였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고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의 한계는 그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비타는 도시로 상경해서 그곳에서 고위층 남자와 사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그렇게 사귀는 사람을 높여가다 결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어 이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골 여인으로 살던 자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크지만,
에비타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많은 사람에게서 거의 성녀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비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돈 주고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머물렀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 사람의 사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녀는 더 높은 단계의 사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먼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께 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의 도박과 외도, 폭력에 못 이겨 이혼을 앞두고
메주고리에로 성지순례를 하러 갔습니다.
밤낮없이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오르내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유산시키고 자신에게 몸과 마음의 커다란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술과 도박을 끊고
묵주를 손에 쥐고 아내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스도는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만큼이 곧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소명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길은 기도와 공부와 희생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하며 또 부모처럼 고생을 해 보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공부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희생으로 그분의 고통을 느껴본다면
결국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부모를, 친구를, 미운 사람까지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