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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을 박해하는 사울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9:3~9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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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사울은 신자들을 결박해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합니다. 다메섹 근처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춥니다. 땅에 엎드러진 사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가서 3일간 식음을 전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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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을 박해하는 사울 9:1~2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7:58; 8:1). 사울은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청합니다. 모든 신자를 예루살렘으로 결박해 오기 위함입니다. 당시 다메섹은 매우 크고 발달된 도시여서 유대인이 많이 살았고 유대인 회당도 여러 개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박해 때문에 그곳으로 도피했습니다. 사울을 비롯한 유대인이 신자들을 박해한 이유는 복음이 유대교 신념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메시아)로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독교를 심하게 모독하고 비판하는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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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9:3~9
극악한 죄인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살기등등한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 음성을 듣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사울에게 비친 빛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입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두 번 부르신 것은 상황의 긴박성과 더불어 예수님이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사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사울이 앞으로 행할 일을 그에게 알려 줄 사람도 예비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극적 체험 이후, 사울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큰 충격으로 힘을 잃었습니다. 3일간의 금식은 그가 박해자로 지내던 때를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며,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더 깊은 묵상
사울은 부활의 주님을 어떻게 만났나요?
주님은 나를 언제, 어떻게 만나 주셨나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저를 찾아오셔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매일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 제 삶을 영광의 빛으로 가득 채우게 하소서. 제 인생에 펼치실 주님의 계획을 기대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주님께 완전히 매인 자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89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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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다면 모두 그 빛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피조물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늘 빛을 필요로 합니다. 캄캄한 밤 불빛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운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처럼 살아갑니다.
눈을 감고 잠에 들면 우리는 어떠한 공격에도 방어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뜻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잔멸해야 한다고 확신하여 스스로 세상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어둠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생명 값으로 세워 그분과 하나 된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줄은 전혀 깨닫지 못한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제대로 보고 있다고 여기고 스스로 옳다고 여겨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진정한 빛으로 임하심으로 그의 눈은 오히려 어둠이 되고 그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어리석은 전진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일삼다가 진실을 아는 증인이 나타나면 수치 가운데 놓이게 되고 지식이 없는 자들의 감언이설은 참 지혜자 앞에서 어리석게 되듯 사울의 율법적 기준과 세상의 의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좌절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믿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도바울의 결정적 회심 또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하는 성령님의 역사요 그의 눈을 멀게 할 정도의 놀라운 권능의 임재의 실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어둠을 밝히는 그 빛으로 나아가며 그 능력으로 인도함을 받는 성령 충만한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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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교회를 심히 박해했습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외국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어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그의 마음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11)
세상 신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주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
그래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어둠에 다니다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그래서 어둠에 눈 먼 사울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빛이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사울에게 빛을 비추셨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9:3) 그리고 말씀하셨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그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행9:5)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5~6) 그때 사울의 눈이 멀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감아야 주를 보는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는 빛을 비추셨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그런데 지금이 바로 주께서 어둠을 일으키시는 때입니다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렘13:16)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주와 주의 나라의 영광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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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과 땅에서 대답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동시에 밝힌 말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라고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 것은 확인하는 것보다는 그에게 이미 사명이 주어져 확정되었다는 증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말은 그의 역할에 대한 지적으로, 그는 율법을 수호하는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메시아를 핍박하는 박해자였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로마 식 이름은 ‘바울’입니다. 회심한 후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충격은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이요, 율법 교사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인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난 후 일평생 닦고 애쓰고 헌신한 것들이 다 무너져 버리니, 그간 애지중지하던 모든 보화들이 다 배설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종교관, 율법, 사상, 철학, 지식, 인생 경험 등등입니다. 그는 사흘 동안 맹인으로 있으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한 것은 자신의 뜻입니다. 너무 충격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한지, 얼마나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였던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는 금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인생경험에서 얻은 삶의 노하우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예가 어릴 적 어른들에게 교육받은 유교사상 그리고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서양 철학입니다. 주입식 교육에서 강제로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진화론적 사고체계입니다. 그리고 인본주의를 위시하여 각종 주의, 전통들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 마음에 굳어져 흔들릴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과 그렇게 떠받들고 있던 것들이 오류이고, 착각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경우 우리의 당황함과 절망감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위해 우리도 일평생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심정 우리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의 충격이 곧 우리의 충격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읽을 때, 묵상할 때, 그리고 연구할 때 마치 맑은 호수에 우리 모습이 비치듯이 우리 안에 있는 배설물도 보이길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은 온전히 우리를 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만 할 수 있고, 바울처럼 성령의 조명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절실히 간구할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안목을 갖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된 것은 바로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잠시 눈이 먼 것은 바로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한 하늘의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육안으로는 영적인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영적인 눈을 뜬 바울은 위대한 사도가 되어 두 대륙을 오가는 복음전도자가 됩니다. 그로부터 신약성경 절반 이상의 쓰이고,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그를 통해 세워집니다. 그의 영안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안은 어떤 신비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은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표현 한다면 영적인 안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영적 분별력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 안에 악독과 불의를 본 것을 말합니다. 또한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간파한 것이 그 좋은 샘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있기에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영의 일은 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물질적인 세계도 있지만 영적인 세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울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 이름도 불려져 복음전도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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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에게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 안광복 목사
회심하기 전의 사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주의 제자들을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합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200KM가 넘는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잡으러 갑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에게 비추자 엎드러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나이까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시고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면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이 교회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자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울은 주여 누구입니까 질문합니다.
우리도 지금 주님과 그리스도의 자녀를 박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일에 빠져 주님과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시지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막연하게 시내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문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사울은 충격에 빠져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합니다.
사울은 누군가에 의해 시내로 끌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울은 주도적으로 자기 능력대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제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끌려 다니는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사울은 그동안 눈을 뜨고 살아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눈을 떴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명은 무엇인지, 나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사울을 만나주셨던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찾아와 주셔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오늘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거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방향을 향해 불필요한 열정을 쏟으며 살지 않도록
내 삶의 방향과 내용을 항상 지켜주시옵소서!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쓰임 받으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인생 여정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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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울이 회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사울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큰 자라는 뜻이었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전에 사울은 교만한 자였지만 회개 후에 바울은 작은 자로서 겸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은혜가 되지만 정확하지 않는 말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지만 또한 로마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로마식 이름은 바울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이라고 하고 뒤에 바울이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대상은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상대할 때는 유대식 이름으로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바울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기 등등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인다는 것은 정말 잔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데반을 돌려 쳐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바울이 믿었던 신앙 때문입니다. 바울이 믿었던 신앙은 신명기에 의하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서 죽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려서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바울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고도 바울은 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8장 3절을 보시면 “행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합니다. 이제 바울은 교회를 완전히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집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200킬로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열심은 진짜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빌3장 6절에서 바울은 “빌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열심이 있는가를 생각해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내가 만들어서 믿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아닙니까? 우리의 열심이 사람을 살리는 열심이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한 열심이 아닙니까?
우리의 열심이 진정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교회를 죽이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살리는 열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3절입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가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행22장 6절에 보면 이때가 정오였습니다. 태양의 빛이 가장 강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빛은 자연적인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비치는 빛이었습니다. 구약성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도 하나님을 불꽃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모세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빛을 통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빛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하나님의 밝은 빛 아래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이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 박해한 것이 나를 박해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예수님은 마25:40.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예수님 섬기듯이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마시고 예수님에게 하는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을 잘 섬김으로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아 너는 지금까지 그동안 나를 박해했다고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너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하나님을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회심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모르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나에 대해서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가 있습니다.
둘째, 나는 아는데, 남이 모르는 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나만 아는 나가 있습니다.
셋째, 나는 모르는데, 남이 아는 나가 있습니다. 남들은 나에 대해서 다 잘 압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이런 지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넷째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가 있습니다.
첫째와 두 번째는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문제를 나도 알고 남도 안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고쳐질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몰라도 나의 문제를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도 언젠가는 고쳐집니다.
그런데 세 번째부터 문제가 됩니다. 나는 누구보다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아무도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은 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의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또 네 번째 나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이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문제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나를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밝은 빛 앞으로 나가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이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절대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빛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잘 압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가를 잘 압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출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회심했다고 하니까 큰 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굉장한 신앙적 결단을 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누구보다 더 큰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얼마든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 사람을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날마다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바로 알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바로 고백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믿기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아니라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라고 했다면 바울이 어떤 반응을 했겠습니까? 아니라고 부정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죄인이고 하는 것은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어디에 있습니까?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 아래에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절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완전히 공개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내 안에 분노가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외롭습니다. 어렵습니다” 고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라면 어떤 자신이라도 무엇이든지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부족한 여러분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내 삶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내 삶에 빛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되어주십니다.
또 연약하다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강함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그러나)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원래 “그러나(알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그러나 너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라는 말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비록 네가 나를 박해한 죄인이지만 “그러나” 나는 이미 너의 죄를 용서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요8장 11절에서 예수님은 “요8: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의 죄를 예수님 앞에서 공개하면 예수님은 나의 죄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예수님 앞에서 공개하면 예수님은 나에게 강함을 주십니다.
나의 할 수 없음을 예수님 앞에서 공개하면 예수님은 나에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시간에 얼마든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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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된 사울처럼 획기적인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살리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반응한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을 향하여 반사하는 자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소유한 자이기에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우리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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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자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도중에 주님의 빛이 길을 막고 그를 굴복시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3절 사울의 어두운 눈을 밝히려고 환한 빛으로 찾아오십니다. 사울은 누구보다 율법에 해박했지만, 정작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단번에 깨트리시려고 친히 부활하신 자신의 육체를 보여주십니다. 성경 지식이 많고, 신앙의 열심이 있어도,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4,5절 성도가 박해받는 것을 자신이 박해받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땅에 남겨두신 성도들은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산,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되거나 손해를 감수할 때가 있습니까? 그 고난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고, 수많은 지체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당당히 이겨냅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2절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성도들을 박해합니다. 옛날 광야에서 하나님과 조국을 위한 열정으로 창을 들었던 비느하스의 열심(민수기 25장 7~11절)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열정을 가지고 한 일은 결국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옳다고 여기고 의심 없이 행하는 일이 혹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는 일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핍시다.
6~9절 사울의 인생은 ‘길 위에서’ 전환점을 맞습니다. 박해자의 길이 전도자의 길로 바뀝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됩니다. 전에는 모든 것을 보면서도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주님만을 봅니다. 기세등등하게 사람들을 끌어오려 했지만, 힘없이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사울은 충격에 빠졌고, 비로소 진실을 깨달았으며,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나의 가치관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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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박해하던 사울을 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사울을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
이것은 즐거움과 편안함이 있는 삶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과 핍박이 있는 삶이다.
만일 내 삶 가운데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과 어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는 삶이다.
내 앞에 있는 어려움을 감사함으로 받자.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드냐고 불평하지 말고 주님께 감사하자. 고난은 주님이 택한 자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에 기쁘게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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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앞에 붙잡힌 인생...-
사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살기가 등등하여 갑니다. 사울이 다멕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그가 박해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복음 앞에서 분노와 살기등등한 사울의 인생입니다(1~2절).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1절).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부터 계속된 믿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살기등등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믿는 성도들을 핍박할 분명하고도 확실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2절a). 공문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체포영장과 같은 것입니다. 어이없는 사실은 지금 이들은 성도들을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믿는 우리를 향하여 극도로 부정적인 언사와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길을 나섭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입니다. 아직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한 그로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 외에 또 다른 신을 신봉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척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세상이 이처럼 성도와 교회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은 복음의 가치를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명이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힘겹게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어떤 결박이나 환난이 우리 앞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사울처럼 복음에 대하여 분노와 살기가 등등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사울이 그토록 위협과 살기등등하여 성도들을 핍박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복음의 이 가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복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사울의 인생입니다(3~6절).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빛이 하늘로부터 그의 주위에 비추었습니다(3절). 예수님은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기 위해 빛으로 오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던 사울입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신앙은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나의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믿음과 착한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속에 비추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땅에 엎드러져...’ 사울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음성 앞에서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강력한 빛이 사울에게 비춘 후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은 분명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었건만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느냐 묻습니다. 결국 우리 믿음의 사람은 주님과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대상은 성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의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내었던 사울을 우리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모든 삶을 용서받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울은 결국 복음 앞에 그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대도 쓸모없는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급기야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전히 내 안에는 자존심이 남아 있습니다. 우쭐거리는 마음과 시기와 질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또한 세미한 계획들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내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믿음이기를 소원합니다.
사울이 땅에 엎드러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 앞에서 여전히 나의 것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 앞에서 무력함을 보이는 사울의 인생입니다(7~9절).
예수님은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울 자신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7절). 우리 주님은 오늘 나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나에게 하늘의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지금의 나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교의식 속에서 낙심하여 한숨만 내 쉬고 있습니다. 나의 영적 무지함이 하늘의 비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땅에서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8절).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그가 참으로 무기력하게 사람들의 손을 잡고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강한 힘을 지닌 핍박자가 아니라 복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동안의 잘못된 나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고, 새롭게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식음을 전폐한 사울의 그 모습이 변화와 부흥을 바라는 나에게 오늘 가장 필요한 신앙의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복음 앞에서 나의 영혼이 온전히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9: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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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울고 있는 사울
본문:행 9:1-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9절)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아주 특수한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크게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B.C와 A.D.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과 오신 후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하나님 밖에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입니다. 십
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드리던 제사제도에 따라 그들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죄를 사하신 후 이제 제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 제사를 드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후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구원이 없습니다.
바로 그런 엄청난 변화의 시대의 중심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다메섹에 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가려고 가던중입니다.
하늘에서 홀연히 빛이 비추이고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된일입니까? 지금까지 목숨을 바쳐 헌신하던 하나님의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보고 나서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3일 동안을 앞을 보지 못하는 필연속에서 자발적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식음을 전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 왜 식음을 전폐하였겠습니까?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겠습니까?
저는 식음을 전폐한 사울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배 고파서 하는 신음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울부짖음같은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죽인 스데반, 그리고 그 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영혼이 울부짖으며 아파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부짖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너무나 추하고 너무나 악해서 어찌할지를 모를지 모르는 삶을 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저마다 바뀌어야 하는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 큰 죄인데 교만에 가려서 보지 못한 것들이지요. 바로 그 때 우리는 사울처럼 "사흘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모습을 따라가야 합니다. 진리에 가려져 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사울이 전에 가던 길을 계속가면 아무리 평안해도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지금 사울은 사흘을 식음을 전폐하는 길이 복된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전에 나쁜 길을 갔다즌지, 우리가 교만한 길을 갔다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그릇된 길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들을 때 그 음성에 진지하게 반응하여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어떤 부자보다도, 성공자 보다도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할 때 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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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은 내 것이라(행9:1-9절)
오늘 우리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사울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의 극적인 변화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간략하게 사울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소성 길리기아 사람(빌3:4-6; 롬11:1, 행22:1-5)
우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바울의 출생과 출신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동족 유대인들 때문에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로마 군대 천부 장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는 천부 장을 향해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다”(행21:39)라고 말했습니다. 화면에 나가는 지도를 보시면 다소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을 것입니다.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비교해 보는 것은 아주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길리기아의 수도인 다소는 유대 본토인 팔레스틴 지역이 아니라 로마 제국 내에 편입된 교육으로 유명한 도시 다소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바울의 선조들이 다소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다소의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최소한 500드라크마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다소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500드라크마는 일반 노동자의 2년 품값에 해당됩니다.
로마 시민권(행22:25,27)
또한 천부장의 병사들이 그를 채찍질했을 때 곁에 섰던 백부장을 향해 “너희가 로마 사람을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22:25)했습니다. 그랬더니 천부장이 눈이 퉁방울만 해져가지고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나는 나면서부터라”고 말합니다. 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한 마디가 그를 로마에까지 압송해 가는 중요한 관건이 된 것은 그만큼 로마 시민권은 당대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해보면 바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과 명성을 가진 유대 가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천막 짓는 일을 했던 것(행18:3)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그 집안은 천막 업에 종사했을 것이며 당시 천막을 만드는 사람은 최소한 중류층 이상 되는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바리새인으로서의 바울(빌3:5; 행21:39; 롬11:1)
빌3: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부모가 비록 희랍 도시인 다소에 살았지만 유대교적인 전통에 충실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창17:12; 레12:3).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파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행16:3). 바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난 지 십삼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이스라엘 족속과도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율법에 정한대로 난 지 팔 일만에 부모로부터 할례 받은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부모님들은 남다른 교육열과 유대주의에 깊이 빠졌었던 완고한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은 모두가 다 그 의미에 있어서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사울 왕의 경우 베냐민 지파라는 것이 아주 작은 지파라는 열등감으로 작용했지만 신약시대에 있어서 베냐민의 후손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적어도 나는 정통파 유대인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열왕기에 의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 유다에 잔류했기 때문에 사울의 이 말은 더욱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더구나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당시에 유대 종교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는 일종의 대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 종교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 중에서 엘리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길은 율법에 정통한 랍비의 문하생이 되어서 철저히 율법을 공부하는 것, 그것도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며 율법 공부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불리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에 유학했을 뿐만 아니라 랍비 중에 가장 유력한 가말리엘의 문하였습니다(행22:3).
가말리엘은 당시의 유명한 교법사 즉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유대인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행5:34절에서 가말리엘의 중재로 사도들이 풀려났던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버트슨(Robertson)이라는 학자는 “가말리엘은 유대인들로부터 '우리의 랍비'라는 최고의 칭호로 불리어지는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웠다는 것은 그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지녔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는 그때까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며 자신이 가진 학문과 지식, 그리고 신앙이 옳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의 신분으로서 예루살렘성 밖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행9:13,21).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삼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쫓아다니는 열심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다메섹으로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예루살렘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가지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의 나이는 어림잡아 25-35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 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학력과 배경을 가지고 자신만만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최소한 다메섹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네 인생은 나의 것=다메섹 사건(행9:3-21, 참고:행22:6-21)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인생을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촌에서 태어나 33년을 살다가 죽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핍박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포박해서 잡아오려고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내게는 그런 권세가 있다는 말이지요. 너희 같은 존재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박해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핍박을 가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칠십 인으로 구성된 의회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권한 곧 사법권과 행정권을 팔레스틴 내, 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산헤드린 공의회가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싶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겠다는 이 젊은이를 얼마나 총애했겠습니까? 그래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의기양양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가 원하지도 않았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우리는 여기서 이 사건이 전혀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사울이 갑자기 만나고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아마 지금 사울이 다메섹의 체험을 하고 있는 시점은 주후32년에서 34년 어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주전4년, 혹은 3년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시점은 주후 약30년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이 고전15:4-8절에서 모든 사람 중에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의 상황이 기묘합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해서 멍하니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 자신은 땅에서 일어난 눈을 떴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의도하던 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눈은 보이지도 않았고 자신의 모든 지식 체계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건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자신은 땅에 엎드러져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자신을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있습니다. 그리고 사울 자신은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일방적인 명령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간섭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십시오. 이 사람의 인생이 자신의 것입니까? 사울의 인생은 사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극적인 만나지는 못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별 굴곡이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 네 인생은 지금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인생의 행복한 날들이 계속될 때 우리는 그것에 별 이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내 인생이 행복하다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쉽게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입니다. 뭔가 내 인생이 내가 의도하는 대로 되어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혼돈-함몰웅덩이(The Sinkhole Syndrome)
사울은 깊은 혼돈 가운데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달려온 그 길이 한꺼번에 붕괴되는 깊은 함몰웅덩이에 빠져버렸습니다. 함몰웅덩이는 사실 지표면만 멀쩡했지 속으로는 붕괴가 일어난 땅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멀쩡했다고 생각했던 땅이 푹 아래로 꺼져 내려가는 지옥의 고통을 맛보는 것이 바로 함몰 웅덩이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혼돈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음을 전폐한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혼돈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며 유대교에 암적인 존재로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했고 빈틈을 찾기 위해서 연구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학문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자신 앞에 펼쳐졌습니다. 너무 자신 만만하게 자신의 인생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입니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고, 내 능력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면에 직면했습니다.
이 혼란은 그가 유달리 유대교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더 컷을 것입니다. 이 만남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가운데 있었고 사울의 인생은 완전히 붕괴될 위험가운데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구약지식들을 총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네 인생은 나의 것이다!!!!
네가 네 인생이 네 것인 줄 알고 나를 핍박했지만 기실 네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 그 열정, 그 배경들을 엉뚱한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네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또 하루는 우리 곁을 떠나갈 것입니다.
기왕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왕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으로 드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마음대로 산다고 살아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처럼 잘못된 종교에 빠져서 확신을 가지고 잘못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는 확신을 가지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 삼으셔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신 은혜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는 기세로 다멕섹을 향했습니다. 살기가 무엇입니까? 죽이려는 기운입니다. 그 기운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입니까?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살기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울에게서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정 반대의 살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사울은 구약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가 살기를 띨 정도로 분노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 간과한 것은 하나님이 파괴의 하나님, 분열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화목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마귀의 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상의 문화를 통하여 다음 세대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를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계획이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두 번째 계획은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모든 나라와 공동체의 가장 위험한 적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외부의 적에도 대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교회 내부의 적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력과 색출해내어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이유라도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 내부의 적은 단순히 생각을 달리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무리를 규합하고 세력화하려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고 서로 섬기기에도 바쁜 곳입니다. 그러고도 남는 에너지는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해야지 내부에서 소모시킨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도하면서 접점을 찾아가려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이 다멕섹을 찾은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그곳으로 피했기 때문입니다. 다멕섹은 시리아 난민 사태가 벌어져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입니다. 야곱의 외갓집인 아람 지역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주변에서 비교적 친근감을 가진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을 거쳐 다멕섹에 이르는 도로가 잘 발달되었기에 그곳을 택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울 일행이 다멕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쳤습니다. 동시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하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 음성은 사울과 함께 한 일행도 같이 들었습니다(7절). 하지만 초자연적인 강한 빛은 사울에게만 임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은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살기등등했던 사울을 순한 양처럼 만드셨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날뛰던 모습에서 사람의 손에 끌려서 겨우 한 발자국 내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소명을 주시고자 처음 행하신 것은 이처럼 자아를 완전히 굴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 그 순간부터 순한 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반항하고 자기의 뜻대로 몸이나 영혼을 헛되게 사용하면 결국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사람까지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의 부르심은 쓰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크고 작음과 씨름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크고 작음에 대해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제각기 다릅니다(롬 9:20-21,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으로 나온 자들이 믿음을 더하기 위해 별도의 수양을 하는 곳이 아니라, 즉 로마서 1:17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실천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목사나 성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누군가 비교를 하고, 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은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또한 자기의 의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퍼스트 레이디는 미국을 경제공황에서 살려낸 루스벨트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입니다. 그녀는 10살에 고아가 되었지만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혼해서 여섯 아이 중 한 아이가 요절했을 때도 "아직 내가 사랑해야 할 아이가 다섯이나 있어"라며 비관적인 언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남편이 서른 아홉살의 젊은 나이에 성인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 마비가 되었을 때, 어느 날 휠체어를 미는 아내 엘리노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 불구가 되어버린 나를 사랑할 수 있겠소?" 엘리노어가 대답합니다. "사랑하고 말고요. 저는 불구가 된 당신의 다리, 그 다리의 온기와 냄새까지 사랑해요. 당신의 미래까지 이미 사랑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소명에 순종하며 섬길 때 비로소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열매를 바라보지 마시고 바울의 순종을 바라보며 진정한 순종의 열매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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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친히 사울에게 찾아와 주시고, 사울을 인도해 주시고,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해 주셨다.
사울은 흩어진 주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사납게 돌진합니다(1, 2절).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착할 무렵 예수님께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눈부신 빛이 사울을 비추었고, 사울은 땅에 엎어집니다(3, 4절). 그 때 저주받아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4, 5절).
사울은 혼란에 빠집니다. 진니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 거부했던 것이 진리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다마스쿠스로 들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줄 사람을 만나라고 지시하십니다(6절). 사납게 날뛰던 사울이 시력을 잃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무기력하게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8절). 사울은 거기서 식음을 전폐하고 주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9절)
대지와 소지:
1. 먼저,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에 찾아와 주십니다.
a. 살기를 띠고, 제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사울에게 친히 찾아와 주신 예수님
b. 우리의 삶에 친히 찾아와 주시고,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경험케 하심
2. 둘째로,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a. 어찌해야 할 지를 모르는 상황에 처한 사울을 다마스쿠스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
b. 우리를 친히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 각자에게 가야 할 길을 친히 일러 주심
3.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십니다.
a. 다마스쿠스에 머물게 하시고, 그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을 보내 주시고, 그가 해야 할 일을 주시는 예수님
b. 우리 각 사람이 걸어가야 하고,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을 위해 감당해야 할 일들을 맡겨 주심
나에게적용
1. 세상 속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리자
2. 지금도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들을 감당케 하시는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성실히 오늘 하루를 살아가도록 하자
3.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그 속에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그 크고 놀라운 경험들을 기뻐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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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에 기록된 사울의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 전체의 분수령이며 교회사의 분수령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사울의 회심은 세계선교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로마제국 지배하의 헬라 문화에 익숙한 로마시민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고 그 일에 사용하셨습니다(15, 롬 11:13; 갈 2:8; 딤전 2:7). 사울의 회심을 기점으로 13장부터는 사도행전의 중심인물이 베드로에서 바울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2. 스데반 집사를 돌려 쳐서 죽인 사건의 핵심 인물 격인 사울은 예루살렘의 큰 박해를 진두지휘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위임 받아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사울이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비추어진 빛 앞에서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고, 자기를 부르는 소리 앞에서 누구신가를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핍박한 것은 신자들과 교회였지만, 주님은 주님의 몸인 교회와 당신 자신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3. 자신에게 비추인 빛 앞에서 눈이 먼 사울은, 다메섹에 들어와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사람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자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힘을 얻어 며칠이 지나자, 그는 즉시 각 회당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감당할 유대인이 없었습니다.
4. 유대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사울은 다메섹을 떠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26). 그러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전 사울은 약 3년간 아라비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갈 1:17). 사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사울의 회심을 반신반의하던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한 인물은 위로의 아들 바나바였습니다(27).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의 위협을 받게 되자, 사울은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가서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 교회로 가기까지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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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열심(9:1-2)
예루살렘 성도들은 핍박을 받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는데, 하나님은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구원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해 특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쫓아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핍박으로 흩어진 주의 제자들까지 잡아들이려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훗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며,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해더욱 열심이었다고 회상합니다(갈 1:13-14). 성경에 약속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열심인 사울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 묵상 질문: 주의 제자들을 잡아들이려는 사울의 동기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 적용 질문: 교회 생활에서 특히 열심을 내는 부분은 무엇이며, 그 동기는 무엇인가요?
사울을 찾아오신 주님(9:3-9)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옳다고 여길 때 전력을 다합니다. 사울은 무지한 열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주의 제자들을 잡으러 가는 사울을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훗날 바울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라고 고백합니다(갈 1:15-16).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 가운데 주님을 만난 사울은시력을 잃고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의기양양한 모습은 사라지고식음을 전폐한 채 시름에 빠집니다. 주님을 만난 뒤에 자신이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임을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사울은 하나님 손에 이끌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게 됩니다.
- 묵상 질문: 앞을 보지 못한 채 남의 손에 이끌려 사흘 동안 지내야 했던 사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의 빛 앞에 내 어둠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제 노력과 열심이 오히려 복음 전도 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봅니다.
주님은 교회의 핍박자 사울마저도 친히 만나 변화시키신 분입니다.
제 불완전한 열심을 주님의 완전한 열심으로 바꿔 주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겨 볼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사울에게 찾아와 주시고, 그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주님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처럼,
저를 찾아와 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저이기에, 때로는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때로는 포기하기 싶은 마음으로 가득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도 힘 주시고, 용기 주시고, 위로해 주시면서 저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주시고, 끝까지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해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 힘과 능력을 부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 십자가의 그 기쁜 소식을 잘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도 주님을 위해 더욱 더 열심히 뛰고,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하며 달려가는 일상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빛으로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어둠을 태우시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믿음을 세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위에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자연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크고 깊은 뜻을
열방에 선포하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