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들 상여
입동을 앞둔 늦가을 날씨지만 한낮에는 포근한 감이 든다.
높고 청명한 하늘 아래 곱게 펼쳐진 황금 들녘이 차창으로 스쳐 간다.
서울농협 퇴직 동인회로부터 농촌일손돕기 행사 참여 초청을 받았다.
재직 중에는 철따라 모내기, 벼 베기, 자연재난 피해복구를 위한 농촌 일손 돕기를 자주 했었다.
지금 새각해 보면 수십 년 지난 아련한 추억이다.
충남 예산군 삽교농협 관내 어느 과수 농가에 버스가 정차한다.
과수원 곳곳에 사과 따기가 한창이었다.
농장 주인으로부터 ‘사과 따는 요령’을 듣고 과수원으로 들어섰다.
농촌 출신이기는 하지만 과수원 일은 처음이다.
처음 해 보는 일이지만 사과 따는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튼실하게 익은 사과를 따 바구니에 수북이 채우는 재미에 ‘수확의 기쁨'마저 느껴졌다.
3시간 남짓 작업을 하고 일손 돕기 행사는 모두 끝났다.
오후 일정은 문화재 탐방 계획에 따라 ‘남은들 상여’가 있는 ‘남연군(南延君)’묘소를 찾았다.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마을에 차가 선다.
웅장해 보이는 가야산 원효봉 아래 남연군묘가 자리 잡고 있다.
흥선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군 남송 정에서 1846년 이곳으로 이장을 하였다.
대원군은 종실의 중흥(中興) 이라는 큰 뜻을 품고 조상 묘 이장을 준비했다.
유명한 지관 정만인(鄭萬仁) 에게 명당 터를 찾게 하였다.
전국을 답사하고 가야산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터’ 라고 해서 이곳을 택한 것이다.(二代天子之地)
그 자리에 원래 있던 가야사라는 절을 불태워 없애 버리고 남연군묘를 이장 하였다.
묘소 앞 한 편의 상여 보호 각에 복제된 상여가 보관돼 있다.
궁중식 상여로 장강(長江)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龍鳳) 상여다.
4귀에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으로 되어 있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게 보인다.
묫자리가 결정되고 경기도 연천 남송 정에 있는 선영의 묘를 옮겼다.
시신을 넣은 관을 500리길 운반 하는데 구간별로 그 지방 주민들이 동원되어 일을 하였다.
각 구간을 연결하여 운구하는 동안 마지막 구간인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한 정성으로 시신을 모셨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고, 그 이후로 마을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 로 불리고 있다.
진품은 국립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곳 복제된 상여는 2012년 문화재청 국비 지원을 받아 제작된 것이다.
이장한지 7년 만에 대원군의 차남이 태어났고 그가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종 황제시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1907년 고종의 둘째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 2대 황제로 즉위했다.
지사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명당이라는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풍수지리는 역경(주역), 서경(書經)의 음양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산수(山水)의 형세나 방위 등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전통적 이론이다.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풍수지리 사상을 이기적인 상술이나 신비로운 미신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막상 본인이 상(喪)을 당하게 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풍수 지관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어느 시대나 이상과 현실은 같을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