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주의 탄생
1912년 5월,
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에 이름없는 황녀가 태어났다.
순종황제와 영왕의 이복동생으로,
조선 제26대왕 고종황제와 궁녀인 양귀인을 어머니로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양씨는 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어머니는 세수간 나인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의 후궁 양씨다.
당시 서른 살이었는데 30년 연상의 회갑년을 맞은 고종황제와의 사이에서 옹주를 낳았다.
1905년 나인으로 궁에 들어와 7년 만에 성은을 입었다.
복녕당 귀인 양씨( 1882 ~ 1930 )
당시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贊侍室: 오늘날의 비서실) 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출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고 하여 옹주의 탄생과 함께 고종이 직접 산모를 찾았음을 기록했다.
대개 초칠일이 지나야 산모를 찾는 관례에 비추어 보면 고종의 행동은 이례적이었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가 그만큼 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옹주의 출생 이후 고종은 늘 어린 딸과 함께했다.
예순에 얻은 고명딸을 금지옥엽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와 침전에서 키웠다.
옹주는 스무살의 유모 변복동(1892~1972)의 젖을 먹고 자랐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 귀인 양씨가 아닌 아버지 고종황제 함께 보냈기에,
옹주는 아버지에 대한 정이 그만큼 깊었다.
고종에게 옹주는 쓸쓸한 말년에 찾아온 한줄기 빛이었다.
영특한 어린 옹주는 당시 힘의 역학 관계를 일찍 감치 감지하였던지 명성왕후가 시해된 후 중전을 대행하던
영왕의 생모인 엄귀비에게는 깍듯이 '어마마마'라 하고 자신의 생모인 복녕당은 '어미'라 불렀다한다.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를 당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황제에게 옹주는 삶의 큰 위안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격랑은 망국의 옹주에게 만만치 않은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폐위 당한 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핏줄을 지켜낼 수 없었다.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태어났으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이름조차 받지 못했다.
5년 후에 황적에 오르고, 4년 후 ‘덕혜’라는 이름을 갖게 되지만,
그 대가로 오빠 영왕처럼 일본의 볼모가 된다.
- 옹주의 유치원 입학
1916년 4월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에 다섯 살 난 옹주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고종은 유치원을 개장하여 옹주가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해 주었다.
옹주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10여명과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다.
5월 16일 고종은 직접 옹주의 유치원 입학식에 참석했다.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유모 변복동의 수행을 받아 옹주는 가마를 타고 등원했다.
옹주와 10여명의 원생들은 모두 한복차림인데 당시의 사진을 보면 옹주는 다섯살로가장 어렸으나,
야무진 인상이다.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앞줄 가운데)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옹주를 포함한 10여명의 원생들이 모두 한복차림으로 다녔다.
사진(가운데 치마 고름이 긴)에서 옹주는 다섯살로 가장 어렸으나 야무진 인상이다.
가끔씩 고종의 배려로 황실음식을 궁녀들이 머리에 이고와 원생들과 선생님을 대접했다.
덕수궁 준명당
옹주가 다섯살이 되자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유치원을 세웠다.
난간을 설치한 흔적인 둥근 홈이 있다.(붉은 색 네모 표시)
준명당의 건물 바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홈이 파여 있다.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져 다칠까 철제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다.
덕혜옹주에 관한 사진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1931년 일본에서 결혼한 이후,
1962년 병든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사진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나마 어린시절 몇 장의 조선왕실 가족사진과
일출심상소학교의 사진첩에서 학교 생활하는 옹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옹주는 조선왕실의 상징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존재였던 만큼,
각 일간지에서 종종 옹주에 관한 기사와 함께 사진을 실어,
옹주의 성장과정과 일상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옹주는 일본총독부에서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황적에 입적했다.
고종은 늦게 얻은 고명딸이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거나 일본인과의 결혼을 피하려고 했다.
옹주가 여덟 살이 되던해 1919년, 황실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하게 한다.
일본인들이 옹주를 볼모로 데려가려 하자 서둘러 약혼을 시켰다.
하지만 이를 안 일본인들은 약혼을 취소시키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다.
고종은 늦게 얻은 고명딸을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옹주가 여덟 살이 되던 해 황실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하게 한다. 일본인들이 옹주를 볼모로 데려가려 하자 어린 나이지만 서둘러 약혼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