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제1독서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과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4,8-17
8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
9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0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11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
12 그러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
대신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론 임금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론 임금은 그의 통치 제팔년에 여호야킨을 사로잡았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주님의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가고,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주님의 집에 만들어 놓은 금 기물들을 모조리 떼어 냈다.
14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5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을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간 것이다.
16 바빌론 임금은 또 훌륭한 사람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등,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7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복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아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 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 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고 또 글도 많이 쓰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은퇴 후의 삶이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다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셨습니다. 은퇴하셨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 형제님은 삶이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거실에서 미끄러져서 고관절 골절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운동도 또 독서도 또 밖으로 외출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는 지인이 이 형제님을 만나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폭삭 늙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무엘 울만의 시 ‘Youth’(청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꿈도 없고 또 열정도 없다면 나이가 얼마 안 되어도 늙은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청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약하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상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의 시련에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청춘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노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만 넘쳐난다면 충분히 청춘으로 삽니다. 이렇게 청춘을 사는 사람만이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사르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