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토빗 12,1.5-15.20
복 음 :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은 종영되었지만,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의 김태호 피디의 MBC 채용 면접 일화를 어느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면접 볼 때 떨리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면접 볼 때 앞에 방송국 국장님, 이사님, 사장님이 앉아 있지만
사실 제가 입사해야 국장님, 이사님, 사장님이지
떨어지면 제겐 그냥 동네 아저씨보다 못한 분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굳이 여기서 떨고 있어야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또 ‘넌 복덕방에 와 있다. 이 아저씨들은 바둑 두던 아저씨들이다.’라는 생각을 했죠.”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을 잘 갖지 못하지요.
상대방의 지위와 부에 신경을 쓰고 주눅이 들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일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구의 모습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전지전능하신 그분 앞에서는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렇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고,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기준 아래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 것을 보셨고, 또한 몹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아주 적은 돈인 렙톤 두 닢을 넣은 장면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이 가난한 과부는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지요.
가난한 과부보다 훨씬 큰돈을 헌금하지만, 주님의 뜻에 맞추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헌금의 성격이 더 크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부자의 모습을 닮기보다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마음을 가진 가난한 과부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야말로 주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 아래에서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참 행복한 삶
-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 -
이수철 프라니스코 신부
어제도 참 좋은 날씨에 눈부시도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수도원 자연경관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우리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십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요 의무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앞에 갔을 때 물음은 단 하나 ‘너는 행복하게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시는 가르침 또한 행복하게 사는 방법들입니다.
어제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날마다
자연의
당신의 향기에, 아름다움에
취하여, 반하여 산다
볼수록
참 좋고, 새롭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당신은
내 삶의 기쁨이요 행복이다.”-
마침 어제 제 강론을 읽은 분으로 부터의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오늘 강론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살아오면서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매일 새로 나게 하시며 새로운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을 느끼며 감사드렸습니다.
“행복은 어디에?”
화두 같은 물음입니다. 흡사 “길은 어디에?” 묻는 듯 합니다.
행복은, 길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밖으로 찾아 나갈 필요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길을 찾지 못하면 밖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요즘 6월 예수성심성월을 시작하면서 매일 화답송 후렴 시편성구가 한 결 같이
우리의 행복은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바로 성서의 무수한 주인공들이,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하느님이 우리의 참 행복임을 증거합니다.
시편 저자의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성인들의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1300년 전 성인인데도 흡사 가까이 살아계신 분처럼 느껴집니다.
파란만장한 삶 중에도 그 옛날에 79세 장수를 누리시다가 순교하셨으니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영국의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인 보니파시오 성인은 독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독일 지역 사람들의 개종에 헌신하고 신설된 독일 교회가 로마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되도록
조직하고 성직자의 개혁과 선교활동을 위한 수도회 설립에 헌신하던 중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동료 52명과 함께 754년 6월 5일 순교합니다.
성인은 ‘게르만족의 사도’, ‘독일의 사도’로 불리며 널리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께서 순교하기까지 온갖 고난 중에도 지칠 줄 모르는 한결같은 선교열정은
그대로 성인의 하느님 사랑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이 온갖 시련과 고통 중에도 행복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평생 휴식이 없었고 평생 고통이 함께 했어도
주님만으로 행복했던,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렸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거짓 신앙인의 표본인 율법학자들과
참 신앙인의 귀감인 가난한 과부의 예를 들면서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참 행복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참 행복은 탐욕과 허영, 교만의 피상적인 율법학자들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두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삶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온전한 봉헌에서 온 삶을 봉헌한 자신의 모습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위한 사랑에 날로 비워가는 봉헌의 삶에 참 행복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외적으로는 가난해도 내적으로는 주님으로 충만한
참 행복한 부자이자 자유인인 과부요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많이 소유해서 부와 행복과 자유가 아니라 필요로 하는 것이 적을수록,
마침내 주님 한 분만으로 행복할 때 참 부자요 자유인이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에서 주님은 라파엘 천사를 통해 참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라파엘 천사가 토빗과 토비야 부자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참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잘 해 주셨으니,
살아 있는 모든 이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여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
그분을 찬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라.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찬미와 자선으로 요약되는 참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께 찬미는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자선은 이웃 사랑을 반영합니다.
바로 경천애인이 참 행복의 비결임을 보여줍니다.
봉헌 삶의 진위眞僞도 경천애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거듭 주님 찬미와 찬양을 강조하며 떠나는 라파엘 대천사입니다.
“나는 일곱 천사들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나는 나를 파견하신 분께 올라간다. 너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어라.”
라파엘이 파견하신 분께 올라가듯 우리 또한 한 생애를 마치면
파견하신 우리의 본향이신 하느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기록해 둬야 함을 배웁니다.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입니다.
사랑의 찬미, 사랑의 봉헌, 사랑의 자선입니다. 결국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경천애인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사랑에 충실함으로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봉헌과 자선의 사랑으로 자기를 비워 갈 때
하늘 나라의 실현이요, 가난한 텅 빈 마음에서 샘솟는 찬미와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돈 모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일이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사랑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4월 28일에 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998년 청주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1999년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본당 신부 임명장을 받고
적성 성당의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추기경님을 가까이 뵙지는 못했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2002년 저는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구역장, 반장 교육과 미사를 준비하면서 가끔씩 추기경님께 총구역장 피정미사를 부탁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총구역장을 위한 파견미사에는 꼭 함께 해 주셨습니다.
복음화 학교 담당 사제로 있을 때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복음화 학교의 피정에도 함께 해 주셨고, 강의와 미사를 해 주셨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시듯이,
추기경님께서는 매일 저녁 교구청 마당에서 묵주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젊은 신부들을 위해서 기도의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96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년 후인 1970년 청주교구 교구장이 되셨고
1998년까지 28년 동안 청주교구 교구장으로 사목하셨습니다.
199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 되셨고 2012년까지 14년 동안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사목하셨습니다.
2012년 은퇴하셔서 원로사목자가 되셨고 202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사제로 9년, 교구장으로 42년, 원로사목자로 9년을 지내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연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추기경님의 정확한 기억력 때문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강의나 강론 중에 오랜 전의 일을 년도와 날짜까지 기억하셨습니다.
4월 28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으니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지 39일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운 어머니도 만나시고,
전임 교구장이셨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도 만나시고,
존경하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만나셔서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야기 나누시길 바랍니다.
추기경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하셨기에 매년 책을 출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새해 선물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본인이 쓰신 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해서, 신학생들의 부모님을 위해서, 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가난한 이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선풍기를 사용하셨습니다.
글을 쓰실 때는 이면지를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옷을 18년 동안 입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안구를 기증하셨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경청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듯이,
추기경님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순교자들을 공경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의 외적인 삶은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교구장으로 42년을 지내셨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내적인 삶은 가난한 과부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하였듯이,
추기경님께서도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려하셨고,
하느님께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고,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고,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삶 또한 칭찬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되고
비록 부자라 하더라도 불선(不善)을 쌓은 집안에는 언젠가는 재앙이 닥쳐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닮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남에게 보이려고"(마르 12,40)
예수님이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봉헌과 자선, 기도가 하느님이 아닌 남에게 보이려는 과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에 영광이 되고자 하는 선행은
비록 타인에게 유익을 주더라도 하느님께는 기만이 될 따름이지요.
자기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예수님께서 어느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주위에서 그 가치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가난한 이들이 제 깜냥을 다해 무언가라도 소박하게 봉헌하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변의 업신여김까지 감당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헌금함에 다가가는 가난한 이들은
어쩌면 사람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에 자신을 내던진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눈에 그들이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녀의 봉헌을 "많이"라고 보신 예수님의 수량 계산법은
우리 인간의 도량형 척도와 상당히 다른 게 분명합니다.
사실 봉헌의 끝판왕은 주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신 아드님을 세상에 주셨고(봉헌하셨고),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으니까요.
그래서 사심 없이 주는 행위는 하느님의 자기 증여와 닮았습니다.
잘 비우고 나누고 주는 이는 하느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라파엘 천사가 토빗과 토비야 부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권고하는 대목입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7.9)
토빗은 하느님 앞에 충실한 의인이었습니다.
그의 자선과 선행은 자기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엇을 선심 쓰듯 내놓는 차원을 넘어 자기 목숨까지 건, 위험을 무릅쓴 헌신이었지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봉헌입니다.
오늘 "생활비를 모두 다"(마르 12,44) 바친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봉헌과 이어지지요.
"충만한 삶"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허락하고 베푸시는 "충만함"이
물질적 풍요나 세속적 성공과 무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존재적 충만함, 영적 충만함은 물리적 수량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 때문에 비운 만큼, 나눈 만큼이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토빗 12,20)
이것이 이 세상에 남아 순례의 남은 여정을 채워가야 하는 우리의 지상 과제입니다.
많건 적건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바치는 모든 것,
이웃을 사랑하고 연민하기에 그들과 나누는 모든 것이 주님께는 진실된 찬미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한 모든 것은 굳이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 아름답고 영롱한 찬양으로 올려지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이 행복은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누리는 것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어느 신분이건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기도와 헌신,
그리고 그분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선과 선행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주님과 닮아갈수록 더 충만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내어줌의 끝판 왕이신 주님의 거룩한 살과 피를 기리는 성체성혈 대축일을 준비하며,
주님 닮은 성체의 삶을 더 깊이 묵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렵고 팍팍한 삶 한가운데서 나날이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 신앙의 수준은 내가 무언가 잃을 때 드러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부자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시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해 주십니다.
가난한 과부는 가진 재산의 전부인 모든 생활비를 봉헌하였지만,
율법 학자들은 겉보기에 액수는 많아도 일부만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봉헌으로 신앙인의 믿음을 측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니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믿으면 더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봉헌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봉헌은 무엇일까요? 나의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것이 사라지는 것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기까지 합니다.
다만 봉헌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생활비 모두를 바칩니다.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데 아깝지 않을까요? 그만큼 신앙이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40년 된 부부의 외아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자
앞으로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빼앗아가는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분은 40년 동안 신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장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신앙생활이 1년 된 분이 외아들을 잃은 모습도 보았는데,
그분은 그 고통을 잘 참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분은 신앙생활이 자기의 것이나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전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내가 어디까지 봉헌할 수 있느냐로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신앙을 증가시켜 왔다면 혹은 기도 생활을 했다면,
자녀를 잃어도 그동안 키울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은 아이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잠깐 빌려줬다가
다시 받으면 아이는 분명 조금이라도 태워준 친구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항상 감사할 것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과부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성장시켜 온 사람의 모델이고
율법 학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믿음이 퇴보한 사람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이 발전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봉헌은 ‘감사’와 직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기도는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에는 과부의 헌금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봉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가 자라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김준호씨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복무 19개월이 되던 10월 어느 날 부대에서 관물대 위에 올라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척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추를 크게 다쳐 전신 마비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나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감사하는 것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내가 전신 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셋째는 원호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내는 그때 병원의 실습생이었습니다.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 화가(입으로 그리는 화가)가 된 것이 감사합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구필 화가로서 이후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1981년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항상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분이 하는 감사가 ‘과부의 헌금’과 같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신앙이 성숙한 것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만만 커진다면 이상한 율법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이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처럼 자신들의 재산이라 여기는 것으로 하느님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감사가 증가하지 않으면 신앙은 퇴보하는 것이고 기도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이 감사의 마음을 증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란 말도 있듯,
신앙도 끊임없이 감사를 찾지 않으면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인 것만으로도, 신앙을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항상 더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할 수 있다면 신앙이 익어가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