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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다메섹을 탈출함 9:23~25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함 9:26~31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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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사울은 유대인들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울이 제자가 된 것을 제자들이 못 믿자, 바나바는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사도들에게 알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변론하던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해 다소에 갑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히 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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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다메섹을 탈출함 9:23~25
하나님은 복음 전도자를 지키십니다. ‘여러 날’이 지나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합니다. 사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한 내용을 참고할 때(갈 1:11~24 등) 여기서 ‘여러 날’(23절)은 그가 회심하고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라비아에 가서 머문 후에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던 기간으로 봅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그냥 놔둘 수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 유대교적 신념과 유대 사회 체제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고, 사울의 제자들은 사울을 다메섹에서 탈출시킵니다. 사탄은 복음 전도자를 박해하고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여시고 그를 지키십니다.
● 더 깊은 묵상
다메섹에서 제자들은 위기에 처한 사울을 어떻게 피신시켰나요?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주님은 나를 어떻게 도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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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함 9:26~31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이때 사도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인 바나바가 나서서 중재합니다. 제자들이 마음을 열고 사울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그의 선한 행실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중재와 추천으로 사울은 그들과 교제하게 됩니다. 이때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15일을 보내며 제자들과 교제합니다(갈 1:18~19). 그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며 헬라파 유대인들과 목숨을 건 변론을 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자 형제들이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로 보냅니다. 이후 사울은 등장하지 않다가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11:25).
●더 깊은 묵상
예루살렘에서 사울이 제자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는 서로 불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중재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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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건강한 공동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본국에 복귀한 후 전쟁 당시 경험한 분노, 피해 의식, 수치심 등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표출하며 심각한 사회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의 진단명이 생겼는데,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제2차 세계 대전보다 베트남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을까요? 연구 결과 그 차이가 본국 송환에 사용된 교통수단에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들은 배로, 베트남전에서는 비행기로 이동했습니다. 배로 이동한 미군들은 수개월의 시간을 한정된 공간에서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장에서 경험한 상실과 아픔, 고통과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참회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울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로 이동한 군인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아픔을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국에 도착했을 때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은 영웅으로 대우받았지만,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은 정치·사회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거나 격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한배를 타고 가는 공동체가 건강합니다. 조금은 느려도
서로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솔직하게 나누며 격려해 주는 공동체를 세워 갔으면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군복 입은 연금술사 / 김영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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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9장 27절
제자들이 사울을 두려워할 때, 바나바가 그를 제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이후 유대인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 고향으로 피신해 있던 사울을 다시 찾은 살마도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곁에 서 있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의 사역은 권면하시고 위로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닮았습니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그를 세워 주는 일은 작아 보이지만, 실은 성도와 사역자와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고 어디든 그분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 리처드 블랙커비
오늘의 기도
하나님,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제 기준으로 가늠하고 의심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처럼 곤경에 처한 지체를 돌아보고 위로하게 하소서. 사람과 상황을 모두 움직여 저희를 안전하게 덮으시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평안히 거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23 부름받아 나선 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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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Idea: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이제 주 예수의 이름을 증언합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유대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많은 것들을 경험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성실히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하자
주님을 전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담대히 증거하는 삶이 되도록 모든 준비들을 차근차근 잘 감당해 나가도록 하자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자녀로 더욱 더 성장해 나가는 삶이 되도록 하고,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고, 섬김과 봉사, 나눔을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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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보이지 않게 되었던 눈이 다시 회복되어 보게 되었을 때, 즉시로 각 회당에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 조금도 게으르지 않고 주를 전하는 일에 열심인 사울의 모습을 본다.
나는 이렇게 열심인가?
해야 할 일을 미루며 게으르지는 않은가?
즉시로 예수님을 전하는 사울처럼 해야 할 일을 바로바로 하는 부지런함이 있어야 하겠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다음에 해야지 하지 말자.
회개할 일이 있으면 즉시로 회개하자.
용서할 일이 있으면 지금 바로 용서하자.
다음에 내 마음이 좀 풀리면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 하지가 아니라 사울처럼 즉시로 움직이는 오늘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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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가 안수하자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힘을 얻어 며칠이 지나자, 그는 즉시 각 회당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감당할 유대인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사울은 다메섹을 떠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26). 그러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전 사울은 약 3년간 아라비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갈 1:17). 사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사울의 회심을 반신반의하던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한 인물은 위로의 아들 바나바였습니다(27).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의 위협을 받게 되자, 사울은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가서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 교회로 가기까지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30).
예루살렘 박해에서 사울의 회심까지의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그냥 수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넘치면서 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오늘날의 교회성장은 과연 이런 성장일까요? 과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우리의 삶 속에서 증가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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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복음을 나눔으로 말미암아 큰 힘이 되며 공동체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는 자는 복음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만 찔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찔림은 그들에게 당혹감을 주고 결국은 복음에 대적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복음을 알고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복음에 대하여 담대했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살리셨기 때문에, 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기쁜 소식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길 소원합니다. 그들이 당혹함으로 우리를 배척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한 사람이 회심을 하고 그를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이루십니다. 아나니아와 바나바를 사용하여 사울을 다메섹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로 사용하신 것처럼 교회 공동체에서 믿지 않는 자가 믿게 되고 그가 세워지는 일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런 일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되며 건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자들이 많아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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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울의 다메섹에서의 생활과 예루살렘 방문을 이야기합니다.
1.다메섹의 사울
사울은 아나니아를 비롯한 다메섹의 기독교인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Ac 9:20) 기독교인들과의 만남은 그의 가슴을 매우 뜨겁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였습니다.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말하였습니다. 그의 그러한 변화는 그를 아는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Ac 9:21) 기독교를 멸하려던 사람이 기독교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3년간 사막에 가서 말씀을 더 연구하며 기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에 들어와 복음을 더욱더 힘있게 전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Ac 9:23) 사울의 변화가 너무 극적이고 복음을 대놓고 전하는 그의 모습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사울은 핍박자에서 핍박을 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메섹에서 도망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해 말씀하셨던 '고난'이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Ac 9:16) 그러나 그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는 복음을 위하여 강하게 준비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2.예루살렘의 사울
사울은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Ac 9:26)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그가 누구였는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변화가 그만큼 매우 극적이었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Ac 9:27) 마침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사도를 만나서 자신의 깨달은 복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Ac 9:29)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또 사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시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하게 됩니다.
다소로 간 사울은 그곳에서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다소는 그의 고향이며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학문적인 준비가 더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Ac 9:31)
사울이 다소로 떠난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조용해지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잘 가게 됩니다. 사울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10년 후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역사의 전면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화로 말한다면 베드로가 아직 주연이고 사울은 조연입니다. 아주 잠시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여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대메섹에서, 사막에서, 다소에서 사울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열정 때문에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과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도 사실은 매우 중요한 준비였습니다. 사막에서의 영성이나 다소의 도서관에서의 학문적인 영성에 더불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도 그아 앞으로 사역하게 될 일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사역자로 준비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막, 예루살렘, 다소의 도서관, 고난 등은 그를 준비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준비하는 시간들은 많이 힘듭니다. 사울도 그의 안에는 뜨거운 열심이 있는데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다메섹에서 피신하고, 예루살렘에서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그러한 과정이 다 준비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최소한 자기 자신의 믿음의 준비과정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역을 위해 지금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마음같지 않고 더디게만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그 길을 간다면 그 발걸음이 더디게 보여도 그것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의 성공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열매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일의 성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 아직 그 길에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다면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많은 경우 준비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보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준비하는 인생을 살면서 그 준비 자체도 성공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되면 또한 어느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 행 9:19-31
오늘 본문은 사울이 회심한 후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활동하는 내용입니다. 사울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믿음으로 변한다는 것을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사울의 변화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빛을 본 이후 그는 삼일 동안 앞을 못보게 되는데 그 때 그는 단식을 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 삼 일간 그는 앞을 보지 못하였고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단지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 삼일이 끝나고 아나니아를 만났을 때 그는 앞을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삼 일 만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19-20절) 며칠 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말하는 여러 날은 삼년 정도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아마 사울은 그 기간에 아라비아에 다녀오는데요 그 삼년은 그를 복음의 전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변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 우리는 바울보다 더 신앙의 연륜이 길고, 더 많은 지식을 접하기도 하면서 아직도 믿음에 있어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변화처럼 우리의 믿음도 더 많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2.변화의 의미
믿음으로 변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처음 회심의 삼일 동안 바로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며칠을 제자들과 함께 하며 더 배웁니다. 그는 온 마음으로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알게 된지 몇일 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가장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 복음은 다른 사람을 영생으로 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에 당연히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복된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변화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습니다. 이 변화는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무엇이 변하였습니까? 오늘날 사탄은 모호함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도 긴가민가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변화하면서도 그것이 복음의 변화인가 그렇지 않은가 혼동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으로 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아주 작은 하나가 바뀔 때도 복음으로 변하고, 그래서 더 나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단호하게 믿음으로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 자신을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변화시켰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변화가 확실하게 하십시오. 우리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믿음으로까지 바꾸어 가십시오. 지금 당장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의 가장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나의 모든 것이 믿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주여 내가 그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조금더 열심을 내고, 조금 더 신실하며, 조금 더 진지하여 더 아름답게 변화되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7월10일 인천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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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변화하자 모든 사람들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때 사울과 함께 교회를 박해하던 친구들은 이제는 원수가 되어서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어쩔수 없이 제자들은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 밖으로 달아내려 도망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제자들도 사울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멀리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예전의 친구들에게도 갈 수 없고 제자들에게도 갈 수 없는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요셉이 나서서 사울의 제자됨의 진실성을 변호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중재로 사울이 제자들과 사귈 수 있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함께 출입하며 주의 이름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사실 우리도 다 요셉처럼 해야 합니다 요셉은 본명보다 바나바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행4:36) 여기서 위로는 헬라어로 παράκλησις(파라클레시스)로 권면, 격려, 위안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별명도 παράκλητος(파라클레토스)로 보혜사, 변호사, 중재자, 위로자를 뜻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런 중재자, 위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성령 충만하다면 요셉과 같은 위로자, 중재자가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우리의 위로가 아니라 성령의 위로입니다 그 위로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열매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러한 성령의 위로로 아름다운 부흥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뿐만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깨어 있기 원합니다
성령의 위로와 더불어 성경의 위로로 우리의 소망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그때 위로의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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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회심은 그가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나 그와 함께 처음부터 뜻을 같이 했던 유대인들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그의 신앙 고백을 교회에 전달하여 믿는 자들 사이에 그가 사역자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결코 과거 자신과 함께 했던 세상이 원하는 평범한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었고 지금까지 그를 지지했던 세력은 그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이는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의 전파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끊임없는 사단의 세력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그 복음의 실체를 저지하려는 영적 전투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집트에서 이끌 때까지 광야에서 40년간 준비되었던 것처럼 사울 역시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내려놓게 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의 고향 다소로 옮겨져 다시 안디옥 교회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10여 년을 그곳에서 신앙의 성숙을 위한 시간이 허락되었고 그동안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의 교회들로 확장되어 가며 그 숫자는 늘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직 그분의 시간과 계획에 따라 이 땅을 변화시키고 성령의 권능으로 사람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이 허락된 장소와 맡겨준 이들을 향해 멈추지 않도록 겸손과 순종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에베소서 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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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의 장을 열어주는 선한 중재자” 안광복 목사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배신한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킵니다.
그들의 계교를 알고 있는 사울을 그의 제자들이 도피시키려고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벽으로 달아 내려서 도망치게 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사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울의 과거에 모습을 생각하며 제자가 되지 아니하려 합니다.
교제의 장을 열어주려는 선한 중재자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한 일과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증거 했는지 사울을 변론하면서 사도들에게 말하게 합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변론해 줍니다.
우리 모두 선한 중재자로 바나바처럼 가까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믿음의 동역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출입하며 주의 이름으로 담대히 증언하며 헬라 파 유대인들과 함께 변론하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힘씁니다.
이들의 음모를 안 형제들이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입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얼마동안 안전하게 지내며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예수의 제자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우리가 섬기는 모든 교회도 늘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점점 더 부흥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교회가 든든히 서 가도록 섬기며 주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성령의 위로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복음의 능력 안에서 평안하게 하시고
말씀의 능력으로 든든히 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와 은혜들이 충만케 나타나시고
펜데믹 이후에 회복을 넘어 부흥을 꿈꾸며 이루는 교회들 되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교회는 여전히 이 땅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과 부활의 소망을 힘 있게 선포하는
모든 성도들 되게 하시고 이 땅에 교회들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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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 사울이 예루살렘교회에 정식으로 승인된 기록으로, 이는 온전히 바나바가 그의 변화됨을 보증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니, 그의 악명이 워낙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추천을 받고 영입합니다. 바나바가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원래 요셉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그를 ‘바나바’로 부릅니다. 그 뜻은 ‘권위자’ 혹은 ‘위로의 아들’로, 실제로 그는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기에 사도들로부터 그런 별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 그가 사울을 만난 것입니다.
냉대를 받고 있던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신뢰해주는 말일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자 믿음이 갔을 것입니다. 사울이 진술한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사울을 보증하게 됩니다. 그로써 사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신뢰를 얻게 되고, 사역자로서 등용이 된 셈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유대인의 편견의 벽을 허물고 사울을 믿어준 바나바로 기인된 것입니다. 결국 위로의 큰 힘이 위대한 사도를 탄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유가족의 마음을 하늘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줄 수 있다면, 그 위로에 힘입어 슬픔을 듣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과 불치병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그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그 경우 환우와 가족들의 마음을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줄 수 있다면, 그 위로에 힘입어 절망을 딛고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연과 이혼 그리고 배신감으로 인해 낙심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그 어떤 것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변치 않는 영원한 주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줄 수 있다면,
그 위로에 힘입어 낙심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정답(지적)이 아니라 공감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고 또한 주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일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바울이 바울이 됩니다.
고향에 묻혀 있는 그를 신약의 보석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위로의 사람 바나바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위로와 격려는 그분의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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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도움(9:23-25)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함께 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합당한 ‘선’을 이루기 위해 합력합니다(롬 8:28).
위대한 사도 바울(사울)도 다메섹 성도의 협력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거듭난 후 각지를 돌며 누구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사울의 회심을 알게 된 유대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성문을 지킵니다.
이때 다메섹의 이름 없는 제자들이 어둠을 틈타 사울을 피신시킵니다.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린 것입니다. 복음을 핍박했던 사울이 이제 복음을 위해 핍박받습니다. 자신이 죽이려 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명을 보존합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롬 11:13)가
이름 없는 이들의 도움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 묵상 질문: 복음을 핍박하던 사울이 핍박을 피해 광주리 안에 들어갈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 적용 질문: 입장을 바꿔 헤아려 보며 도와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바나바의 변호(9:26-31)
사람의 악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지만,
여전히 많은 성도가 그와 교제하기를 꺼립니다. 그러자 바나바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사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다메섹에서 얼마나 담대히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는지 설명합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사건을 여러 사람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를 만나 사울을 향한 주님의 계획도 들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나바 자신이
사울의 복음 전도를 목격하고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보증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 사역자가 되는 길을 열어 줍니다.
이후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성장합니다.
- 묵상 질문: 왜 바나바는 모두가 의심하는 사울을 변호해 준 것일까요?
- 적용 질문: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나요?
오늘의 기도
무명의 지체들이 달아 내려 준 중보의 광주리와 믿음의 동역자들이 도와준 손길이 있기에
오늘 제가 평안하고 든든하게 서 있음을 고백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 환경으로, 말씀으로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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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탄이 궁궁적으로 노리는 것은 교회입니다. 사울이 예수를 전할 때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을 썼듯이 오늘날도 사탄은 예수를 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회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사회와 문화를 통해 서서히 좀먹어가는 것입니다. 동성애 차별법 금지, 여권 신장 을 빌미로 한 페미니즘으로 남녀의 문제를 갈등으로 몰고 감으로써 가정은 물론 젊은이들이 나홀로족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사회의 문화 속에 있는 기독교인 자녀들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가정을 이루지 못하며 이것은 사회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가정을 통해서 흘러갑니다. 대를 잇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주신 복이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이 시대에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세상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교회가 이 땅의 문화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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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가 되자(행9:19-30절)
오늘도 우리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생생한 현장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세워가는 일에 아나니아와 바나바를 사용하십니다.
아나니아가 두려움을 이기고 순종함으로 사울은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징적인 모습은 그동안 잘못된 세계관, 잘못된 종교의 노예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 헌신했던 사울의 인생이 끝나고 새로운 눈을 뜬 사울이 출생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참 뜨거운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나는 잊더라도 사람들은 기억하게 마련입니다.
21절에 “듣는 사람들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고 회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혹스럽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충성스럽게 유대교에 헌신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그렇게 열심을 내던 사람이 회심하여 예수를 전파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볼 때는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그래서 다시 이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획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요? 왜 유대인들은 그렇게 유대교에 충실했던 사울이 갑자기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요? 왜 묻지도 않고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 죽이려고만 할까요? 여기에 그들의 불행이 있습니다.
22절의 당혹하게 했다는 말을 옛날 번역 성경은 굴복시켰다고 쓰고 있습니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겸손해야 하고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살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울에 대한 반응(23-25절)
우선 23절을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냥 여러 날이 지나매 그렇게 되어 있어서 이 여러 날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기간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갈1:16-17절에 의하면 일단 사도는 다메섹에서 계속 전도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내려갔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리고 18절에 의하면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여기서 여러 날은 대략 3년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라비아에 있었던 기간이 2년 6개월쯤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3년에 가까운 시간을 사울은 자신이 알고 있었던 구약적인 지식들과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종합적인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뒷날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이 자신이 체계를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 없다고 술회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했을까요?(23-25, 29절)
그렇게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사울은 열심히 주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사울은 누구보다도 열심 있는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변절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한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과거 김해경 목사님 같은 분은 단군교 교주였다가 회심하고 많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것처럼 사울의 개종은 참으로 위협적이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사울은 그 특유의 왕성함으로 전도를 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훈련받은 학문적인 배경을 가지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고 이겨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던 무리들은 사울 죽이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반응(26절)
그런데요? 26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사울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반응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이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기억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돌이키기만 하면 사람들이 쉽게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과거를 잊지 않습니다.
사실 대도 조세형이 남긴 교훈이나 우리 주변에 너무 쉽게 사람을 세워서 간증하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목격합니다. 그는 변화되었다고 간증하고 교회를 순회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도둑질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연고로 사울이 회심한지 3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기독교 공동체는 그를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나바의 중재(27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제는 과거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공동체가 환영해주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격려자요 위로자인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행4:36-37; 11:24-30; 13:2-4)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섬 출신으로서 레위인이며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행4:36절). 그에게 설교하는 능력과 위로하는 능력이 인정되어 바나바라는 이름이 사도들에 의해 주어졌습니다(4:36).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4:37)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울과 동역자가 되어 활동하기도 했었습니다(11:24-30; 13:2-4). 이러한 그의 경력으로 보아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당시 바나바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울을 지지하고 나온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의하면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어떻게 개종 후에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가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보면 아주 간단한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26절의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워하고 그의 사도됨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데리고 가서 설명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이타적인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향후 사울이 어떤 잘못된 모습을 보였을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도 바나바가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사울에게 형제 사울아!라고 불러 주었던 아나니아와 함께 바나바는 사울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일에 큰 몫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아나니아와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사울을 변호하고 공동체에 접목시켜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도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울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바나바의 중재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 28-29절에 의하면 그는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도 이제 더 이상 그를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만약 이 때 바나바의 중재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사람들과 방법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바나바가 헌신적인 희생의 마음으로 나서 준 것 역시 하나님께서 바나바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나바는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로 말미암아 잔뜩 경직되어 있는 교회를 그를 신뢰하고 받아들임으로서 한차원 성숙하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끝까지 사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오고 오는 교회에서 새로운 사람, 핍박 자와 각양의 사람들이 공동체로 들어오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바나바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들, 힘든 사람들, 지친 사람들에게 바나바처럼 그들을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함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요?
사도 바울이 그 특유의 열정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하며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동안 생명에 대한 위협은 가중되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자신들의 충성스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의하면 바울의 다소로 낙향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참 기독교 공동체에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의 다소 행은 무려 11년을 그곳에 있게 했습니다. 물론 그가 다소에서 보낸 시간들은 결코 허송한 세월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그를 소중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저 유대교에 열심히 있다가 회심한 한 사람의 유대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는 그를 별 고민 없이, 아쉬움 없이 다소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소는 선교사 바울을 만드는 배양실이 되었습니다. 물론 다소에서의 사울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서 연구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계속해서 쏟아낼 것이 있었다는 것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에 참으로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은 때가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성실성, 이 열정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제 교회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든든히 서 가게 되었습니다. 이 한 구절은 사도행전 1:8절이 어떻게 성취되어가고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해라는 자양분을 통해서 교회는 오히려 더 넓게 세상을 향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스데반집사를 빌립집사를, 그리고 아니니아와 바나바를 사용하십니다. 더 나아가 핍박자 사울을 변화시켜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려고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바나바처럼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위로자요, 격려자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한 평생 예수 믿고 살았어도 바나바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세워주고 위로해주고 격려자로 살아보지 못했다면 그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초대교회는 순종하는 사람, 위로자인 바나바와 같은 사람, 그리고 변화된 인생을 살아갔던 사울과 같은 사람에 의해서 이제 땅 끝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고 그 위대한 역사에 동참하는 오늘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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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새날을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시간들도 꾸준히 지속시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론 이해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호흡이 끝날 때까지
맡겨주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