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1. 의미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기리고,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은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로 살아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을 기리고, 그들의 존엄과 인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날입니다.
이 기념일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인권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며, 또한 생존자들의 고통과 용기를 기리는 의미가 깊습니다.
2. 역사적 배경
8월 14일은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로서 그 피해 사실을 증언한 날입니다. 이는 1991년 8월 14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 사실을 공개한 순간으로,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은 이후 많은 생존자들이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강화되었습니다.
일본군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나오게 되었소..........
내 팔을 끌고 이리 따라오라고. 따라간다고 하겠어요? 무서우니까 안 갈려고 반항을 하니까 발길로 차면서 내 말을 잘 들으면 너는 살 것이고 내 말에 반항하면 너는 여기서 죽는 거야. 죽고. 결국은 그야말로 참 계집애가 이 꽉 물고 강간을 당하는······ 그 참혹한······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못다 하겠어. 이때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하고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故 김학순 할머니(1924~97) 증언 중에서-
3. 국제사회와의 연대, 공동노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민간단체들은 2012년 12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8월 14일을 정하였으며, 세계 여성단체들은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캠페인과 연대집회를 개최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4.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중심이 된 시민 모금으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세운 동상으로, 부부 작가(김운성, 김서경)의 작품입니다.
5. 과거와 미래의 연결 - 가토와 고노담화의 배경
1993년 8월 4일에 발표된 고노 담화는 이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등의 노력은 얼마나 실천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1) 가토 담화: 일본 정부의 부정적 입장
1992년 7월에 발표된 가토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이 담화에서는 ‘위안부’의 모집과 관련된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하고, 기존의 입장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론과 규명 요구는 가토 담화 이후 더욱 커져갔습니다.
2) 고노 담화: 강제 연행의 인정과 사죄 표명
가토 담화 이후, 1992년 1월과 7월에 가토 고이치 내각 관방장관이 발표한 가토 담화를 거쳐 1993년에 발표된 고노 담화가 있습니다. 이 담화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인정하며, 강제 연행과 모집에 대한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관여를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이 담화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모욕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표명하였습니다.
■ 가토와 고노 담화의 차이점과 의의
1) 강제 연행의 인정
가토 담화와 고노 담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강제 연행에 대한 입장입니다. 가토 담화에서는 강제 연행을 부정하였으나,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강제 연행과 직접적인 관여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2) 역사 인식 변화와 사회적 영향
고노 담화는 강제 연행과 관련된 직접적인 인정과 사죄 표명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 인식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사회와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