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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30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에 비유하면서 세상 끝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하신다. 그물이 바다 속에 있을 때는 그물 안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있지만 물가로 끌어올렸을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된다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하신다. 지금이 곧 세상 끝 날이라는 자각으로 살아야 하늘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박후임 목사(농부 목회자)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마태오 복음 13,47-53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괜찮은 횟감이 됩시다> 오늘 복음은 저희 같은 ‘꾼’들에게는 유난히 실감나게 다가오는 복음입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출조 하지만, 설레는 마음을 충족시키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잘 이해 안 되는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회칼이며 도마며 초고추장이며, 매운탕에 넣을 갖은 양념들을 잔뜩 챙겨갈 때 치고 제대로 고기 잡히는 법이 없습니다. 의외로 그냥 바닷바람이나 한번 쐬고 오지, 하며 마음 비우고 나갔을 때 손맛을 톡톡히 보곤 합니다. 별로 재미를 못보고 있을 때, 더 속상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공치고 있어 잔뜩 우울해있는데, 지나가던 분이 빨리 지나가지 않고 뒷짐 지고 한참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뭐가 좀 잡힙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창피하고 난감합니다. 그래도 이런 분은 양반입니다. 어떤 분은 남의 허락도 없이 잔챙이만 몇 마리 들어있는 어망을 확 들쳐보며 ‘에게게!’ 하며 비웃습니다. 더 재수 없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복어새끼입니다. 이게 뭔가 하고 끌어올려보면 복어새끼입니다. 제 깐에 위협하느라 배를 있는 대로 잔뜩 부풀립니다. 23cm 미만의 우럭 잔챙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만 잔뜩 커서 회 떠봐야, 별로 먹을 게 없습니다. 이런 녀석들은 잡자마자 멀리 던져버립니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갈매기들이 날아와서 잽싸게 채 가버립니다. 반대로 5-600g 정도 나가는 듬직한 감성돔이나 우럭, 솥뚜껑만한 광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대견스럽기도 해서 몇 번이나 들어보고 쳐다보고, 나중에는 고이 아이스박스에 잘 챙겨 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똑같은 비유를 드십니다. 좋은 것들, 회 떠서 먹을 만한 녀석들, 매운탕이라도 끓이면 괜찮은 녀석들은 그릇에 담고, 별 볼일 없는 녀석들, 회감도 매운탕꺼리도 안 되는 녀석들, 독이 있어 잘못 먹었다가는 큰 일 날 녀석들, 이상하게 생겨서 검증 안 되는 녀석들은 죄다 던져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괜찮은 횟감이나 매운탕꺼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괜찮은 횟감이나 매운탕꺼리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허물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의 나를 딛고 변화되고자 몸부림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의 나를 뒤로 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제의 나와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떠나 변화되고 쇄신되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장을 원하지만 본질적으로 변화되기를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을 원하지만 껍질을 깨는 아픔을 거부합니다. 익숙한 곳, 친숙한 대상을 선호하지 새로운 환경, 낯선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른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익숙한 문, 매일 다니는 문을 포기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17주간 목요일 - 오늘, 나의 마지막 날
제가 아는 한 신부님께서 약속이 있어 나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병자성사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사제는 병자성사가 들어오면 자다가도 바로 나가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과 약속을 하고 나가시던 중이라 그 가정에 전화를 하여 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이 끝난 후 두 시간 정도 뒤에 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가족들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위독해서 신청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 다 모였기 때문에 신청한 것이니 나중에 오셔도 상관은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이 임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가족들이 그렇게 말한 것 때문에 마지막 성사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죽음의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입니다.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에게 “앞으로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든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과 화해하겠다든가 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집, 땅 등을 사거나 비자금을 조성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실제로는 이 설문조사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은근히 뒤로 미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았던 이태리의 한 자매님은 암에 걸려 3개월의 시간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그 시간동안 병원에 있기를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그렇게 크게 아프지도 않고 2년 정도를 성녀처럼 살았습니다. 그분의 장례미사 때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시장님조차도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그만큼 큰일을 하고 돌아가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를 ‘나의 마지막 날’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산다면 몇 배로 가치 있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심판은 어부가 고기를 그물로 잡아 그 잡힌 고기들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나누어 좋은 고기는 추슬러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들은 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곡식이야 익으면 단체로 수확을 하지만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은 성숙한 물고기를 비롯하여 송사리까지 걸려듭니다. 물고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건 한 번 그물이 내리면 그 곳에 있는 고기들은 싹 잡힙니다. 예고도 없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물이 들이닥치더라도 걱정할 것 없는 좋은 물고기로 살고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추려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아무리 봉사를 많이 했어도 지금 냉담자라면 지금까지 해 놓은 것들은 나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빨리 고해성사 보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한 신학생이 집이 어려워져 신학교 등록금을 낼 돈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밤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두 달을 해서 겨우 부족한 금액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몇 년이 흘러 이 신학생이 부제가 되었고 부제 실습으로 봉성체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 폐암 말기 암 환자가 있어 그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는데 그 분이 아는 척을 하였습니다. 그 부제는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 분이 이야기 해 주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분은 전에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의 사장님이었고 신학생은 밤에만 일해서 몇 번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그 때 그 학생이 너무 성실해서 그가 믿는 천주교를 믿어보기로 했고 지금 이렇게 죽기 직전에 그 학생을 다시 만나 병자성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마 그 때 이미 암이 그 분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는지 모르고 그래서 주님께서 그 신학생을 그 분께 보내 주어 마지막 기회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그물이 나에게 들이닥친다 해도 내가 좋은 고기로 분리될 수 있도록 매일을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마태 13,47-53)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도 하늘 나라에 대한 교육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를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셨다. 하늘 나라가 그물과 같다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라고 물으셨듯이 이 비유의 뜻을 다 깨달았는가? 이 비유를 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고,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하늘 나라란 고기를 잡는 그물이다. 무슨 고기를 잡는 그물인가?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사람들을 구해주는 그물이다. 깊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며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내어 살려내는 그물이다. 죽음의 바다에서 생명의 바다에로 건져내는 그물이다.
"배를 져어가자 희망의 나라로!" 라는 노래가 있듯이 절망의 바다에서 희망의 바다에로 건져내는 그물이다.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들, 마음이 허전해서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고, 여기 저기 방황하며 떠돌고 있는 이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 과거의 깊은 상처를 안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억눌려 있는 이들, 사랑에 목마른 이들 등을 건져내는 그물이다.
그 그물 안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죄인도 있고 의인도 있다. 예수님이 치시는 그물에는 마치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셨듯이 이것 저것을 가리지 않고 "온갖 종류의 고기를"다 끌어 올리는 그물이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라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물을 쳐서 온갖 종류의 고기들을 모아들이신다.
예수님이 그물을 쳐서 모아들인 고기들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모으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들은 사람 낚는 어부들이다. 즉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하기 위해 불러 주셨고 그 사명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좋은 것들이고 무엇이 나쁜 것들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식별의 능력이 없으면 좋은 것들을 나쁜 것이라 하고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나쁜 것들을 좋은 것이라 하여 모아들이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만이 할 수 있다.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비슷하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럼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리워져서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서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 갈 때에 비로서 벗겨 지게 되는 것입니다."(코후 3,14-16)
새것은 신약이요, 옛것은 구약이다. 구약은 신약을 통해서 비로서 너울이 벗겨 진다. 그러나 때로는 신약인 새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것인 구약을 들어 설명해주어야 알아들을 수가 있다.
예수님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고 말씀하셨듯이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빛을 받아야 하고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빛을 받아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여 완성시켜 준다. 따라서 하늘 나라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란 구약과 신약을 올바로 배워서 신약을 설명하는데 필요하다면 구약을 꺼내고 구약을 보충하는데 신약이 필요하면 신약을 꺼내서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인이란 무엇보다도 구약과 신약을 모두 공부한 사람들로서 자기 곳간에 언제나 말씀으로 충만해있고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저런 사람을 만나면 저렇게 설명해줄 수 있을만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그물을 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 올려 오면 앉아서 나쁜 것은 밖으로 내던져 버리게 하고 좋은 것은 모아서 더 좋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취약점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당에는 다니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들은 많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떠나거나 냉담을 하게 된다. 왜 그런가? 그 사람에게 알맞게 즉 사람에 따라서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낼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가 부족한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취약점이라고 생각된다.
교회는 예수님이 그물을 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 올려오면 그들을 올바르게 하늘 나라 교육을 시켜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회는 점점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찰 것이며 언제 어떤 신자라도 처음에 교회에 오는 사람을 만나서 새것고 꺼내주고 옛것도 꺼내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교회는 얼만 풍요로울까? 늘 사람들로 들끌을 것이고 양식은 충만하여 누구나 먹고 먹어도 늘 넘칠 것이다.
2009년 7월 30일 연중 제 17주간 목요일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net thrown into the sea,
which collects fish of every kind. When it is full they haul it ashore and sit down to put what is good into buckets. What is bad they throw away. (Mt.13.47-48)
닭집 주인의 어리석음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중에서)
어느 닭집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이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던지 닭을 사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대요. 그래서 닭집 주인은 신나게 닭을 팔았지요. 저녁이 되기 전에 벌써 딱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바로 그 순간 어떤 아주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닭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주인은 " 물론 있지요. 닭집에 닭이 없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면서 마지막 남은 닭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망설이는 것이예요. 이 주인은 말했지요.
"왜요? 맘에 들지 않으세요?"
"닭이 좀 작은 것 같아요. 혹시 이 닭의 무게를 재 볼수 있나요?"
주인은 저울에 닭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 닭의 무게는 3Kg이었지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너무 작네요. 혹시 더 큰 닭이 있나요?"
닭집 주인은 한마리밖에 없습니다 . 라고 말하기라 뭐했지요. 또한 남은 닭을 얼른 팔고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그래서 약간의 꾀를 내었지요. 주인은 처음에 보여준 닭을 집어 넣고 새로운 닭을 꺼내는 척하면서 처음에 보여준 닭을 다시 꺼냈습니다. 그리고 저울에 올려 놓으면서 그 아주머니 몰래 손가락으로 저울을 살짝 눌렀지요. 그러자 그 닭의 무게는 3.9Kg이 되었습니다. 이 저울의 눈금을 보여 부며 주인은 말했습니다.
"자 ~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아~~ 좋아요. 그러면 처음에 보여준 닭과 이 닭, 두마리 다 주세요."
이 닭집 주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커다란 곤경에 빠졌겠지요. 만약 이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그냥 일찍 들어갔다면, 또한 솔직하게 한 마리밖에 없다고 말했더라면, 혹시 더 장사가 잘 될것 같아 다른 곳에서 닭을 사 놓았더라면, 이런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욕심 때문에,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땋게 할수 없는 곤경에 빠진 것이지요.
이 글을 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며 살고 있는 나를, 솔직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나를, 준비 없이 살고 있는 나를 바라 봅니다. 바로 이런 나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들도 이 닭집 주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의 지령
당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누구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그 소중한 재산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어 봅시다.
영화 ,「 마더 테레사 」보기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중에서)
갑곶 성지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강화에는 극장이 없거든요. 따라서 문화 생활을 위해 영화 한편을 보려 해도 김포까지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사시는 분들을 위해서, 또한 이 곳에 오시는 순례객들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지난주부터 영화 상영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상영했었던 영화는 ...마더 테레사...였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던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였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님꼐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대로 실천하는 실천가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타협에도 절대 굽히지 않고 하는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셨지요.
또한 어떤 어려음이 있어도 늘 기도로써 그 해결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시지요.
"나는 주님 안의 몽당 연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를 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997년 9월 5일 캘커타에서 87세를 일기로 선종하기 전까지 평생을 빈자들을 위해 헌신한 테레사 수녀님께서는 임종을 앞둔 순간에도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대해 달라"며 값비싼 치료를 거부하셨다고 하지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러한 마더 테레사의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랑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말을 했으면서도 불구하고 내가 얼마나 그 사랑을 실천했었는가하는 반성을 해 봅니다.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입으로만 실천하는 사랑, 그 사랑이 얼마나 공허한 말로만 머물렀을까요?
테레사 수녀님은 이러한 사랑을 평생 실천했으며 현재라는 복잡한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사랑하라."
오늘의 할일
웃음을 나누세요. 마음이 부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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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개한다는 것은 어제의 나와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떠나 변화되고 쇄신되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장을 원하지만 본질적으로 변화되기를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을 원하지만 껍질을 깨는 아픔을 거부합니다. 익숙한 곳, 친숙한 대상을 선호하지 새로운 환경, 낯선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